다석은, 하늘과 씨알 섬긴 차원높은 군자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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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2021-06-3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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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㉔ 김원호 이사장<上>

2008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 대회에서는 이틀 동안 19명 학자들이 류영모 함석헌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다. 당시 류영모는 국내에서도 크게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고 함석헌은 민주화 운동가로 더 이름이 높았다. 두 사람이 세계철학자대회를 통해 세계 사상계에 데뷔를 하기까지 씨알재단의 역할이 컸다.
씨알재단은 류영모 함석헌 선생의 씨알정신을 널리 알리고 전파할 목적으로 2007년에 설립됐다. 다석학회 회장 정양모 신부, 유미특허법인 김원호 대표, 함석헌사상연구소 박재순 소장 등이 논의해 씨알재단의 얼개를 만들었다.
다석 류영모는 <노자(늙은이)>를 번역하면서 백성 민(民)을 ‘씨알’이라고 풀었다. 씨알의 저작권은 다석이 갖고 있지만 씨알사상의 홀씨를 세상에 널리 퍼뜨린 사람은 함석헌이다. 그는 <씨알의 소리>라는 정기간행물을 발간해 지금까지 그 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함석헌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요?
“함 선생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제목을 바꿔 수정증보판을 낸 해가 1965년입니다. 고등학생(1963~1966) 때 함 선생을 뵈었죠. 서울대학에 입학한 이후 함 선생이 문리대 강당에 와서 강연을 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명동 가톨릭 전·진·상 교육관에서 노자 장자 강의를 했습니다. 1970년 4월 <씨알의 소리> 창간호가 나왔을 때부터 정기구독을 해 늘 그분의 생각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1977년경 아내가 셋째 애를 가질 무렵에 함 선생 댁이 있는 원효로에 저도 살게 됐습니다. 그 시절 함 선생이 한복을 입고 원효로 언덕을 오르고 내려가는 모습을 뵐 수 있었습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을 직접 뵙지는 못했나요?
“1994년 문화일보에 연재가 시작된 박영호 선생의 글을 보고 류영모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됐습니다. 나중에 정양모 신부로부터 다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씨알재단 설립은 제가 존경하는 정양모 신부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재단 설립을 맡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김원호 이사장을 인터뷰하기 보름 전에 용인시 수지구에 가서 정양모 신부를 인터뷰했다. 인터뷰어가 “정 신부가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종교철학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 하더라”고 전하자 김 이사장은 “워낙 명석하시니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간단명료하고 조리 있게 말씀하시죠”라고 받았다.

다석과 함석헌 선생의 공통분모는 씨알이라고 말하는 김원호 씨알재단 이사장.[사진=윤영은 기자]


-다석을 연구하고 숭모하는 단체도 있구요. 함석헌 선생 관련 단체도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데요. 류영모와 함석헌 두 분의 사상을 함께 계승 발전시키는 단체를 만든 연유가 궁금하네요.
“나는 신앙인 아카데미 조직을 만들어서 진리를 찾는 모임을 했습니다. 정 신부가 그 모임에서 강의를 했지요. 정 신부는 성천문화재단에서도 성서신학 강의를 했는데 그때 류달영 이사장을 통해 류영모 선생에 대한 말을 처음 들었다고 합니다. 정 신부는 ‘성서에 깃들어 있는 사상을 우리말로 포착한 훌륭한 사상가를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석이 세상을 떠난 게 1981년입니다. 정 신부가 독일 유학 갔다가 귀국해서 1971년부터 광주가톨릭대학 교수를 했으니까 ‘조금 일찍 알았더라면 그분을 뵙고 한 말씀 들을 수 있었을 텐데…‘라며 무척 아쉽다고 하셨죠.
다석은 1928년부터 1963년까지 35년 동안 YMCA에서 매주 1회 연경반 강의를 계속했습니다. 1955년 어느 날 다석이 1년 뒤 ‘김교신이 죽은 날에 나도 죽는다’ 라고 사망 가정일을 선포하자 김흥호 선생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어 부랴부랴 속기사 최용식을 불러서 강좌를 쭉 기록하게 했어요. 이렇게 해서 1년치(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 강의 내용이 세상에 남아 전해지게 됐습니다.
그 뒤 30년이 넘도록 출판하지 못해 기록 원본이 흩어져 사라질 염려가 있었지요. 정 신부가 강의 시간에 ‘누군가 1억 원만 희사하면 출판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해서 ‘할 사람 없으면 내가 하겠다’고 불쑥 얘기했죠. 그렇게 해서 현암사에서 <다석강의>라는 책이 2006년 3월에 나왔습니다. 정 신부가 ‘책이 나온 김에 학자들이 연구하는 조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서 다석학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박재순 목사는 함석헌 사상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면서 다석학회에 참여한 것이구요.
함석헌 선생과 다석 선생이 사제지간이죠. 물론 중간에 곡절이 있긴 했지만, 사상의 뿌리가 같은 거지요. 두 분을 기리는 단체를 통합해서 씨알 사상을 제대로 연구하고 알리자는 취지에서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씨알이라는 이름이 두 분의 공통분모 아니겠어요? 씨알 재단을 만들기로 했지만 모금이 잘 안됐죠. 그래서 또 ‘정 안 되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고 했죠. 그렇게 하여 재단이 2007년 9월에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어느새 14년이나 됐군요.”
인터뷰어가 “씨알사상을 요즘 젊은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달라”고 하자 김 이사장은 “나도 씨알사상을 한마디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몰라요”라고 겸손하게 답하면서도 준비된 답을 풀어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국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얼이 바탕에 깔려 있는 무언가가 씨와 알이 아니겠어요? 씨와 알을 합치면 바로 그게 하늘의 자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씨알을 깨치고 키우면 하느님 같은 존재가 됩니다. 말하자면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진화된 인간의 모습이죠. 그것은 예수도, 석가모니의 모습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 취지에서 씨알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함석헌 기념사업회(이사장 목성균)가 올 4월 17일 재단법인 씨알을 비롯한 유관 단체들을 초청해서 함석헌 탄신 120돌, <씨알의 소리> 창간 51돌 기념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장에 가보니 다석과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모임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해미읍성 성지를 찾은 정양모 신부(오른쪽)와 김원호 이사장. 


-씨알재단이 두 선생을 따르는 모임을 통합해서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리 잡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런 뜻에서 재단법인 씨알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두 분의 생각을 기리고, 또 그것을 실천하자는 거죠. 여러 갈래의 단체가 하나로 합쳐 공동으로 활동을 모색하는 시기에 접어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체 하나도 운영하기 어려운 상황인데 지금처럼 다들 나뉘어 있으면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죠. 점차 좋은 기회가 마련되리라고 봅니다. 함석헌 탄신 120돌 관련 단체 좌담회에서 조직은 달리하고 있지만,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하고, 특히 교육의 내용을 새로 짜 청년들을 참여시켜 보람 있는 씨알살이를 할 수 있도록 힘쓰자는 내용을 논의했습니다.”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에서 한국의 근대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다석과 함석헌 선생에 대한 연구 발표가 있었는데요. 씨알재단 이사장을 맡고서 류영모 함석헌 선생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봤을 것 같은데요.
“다석은 제자 함석헌에게 ‘내가 오산학교에 온 거는 바로 너를 만나기 위해 온 것이로구나. 그것으로 큰 보람을 느낀다’라고 했습니다. 1921년 다석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갔을 때 다석이 31살, 함 선생님이 20살이었습니다. 두 분이 11년 차이지요. 무교회주의자였던 함 선생은 1930년대부터 YMCA 연경반에 나와 다석 강의를 열심히 들었습니다. 김흥호 선생이 연경반 강의에 참여한 것은 해방 후에 이북에서 내려온 이후죠. 어느 날 연경반 강의에 참석자가 하나도 없어 다석이 그냥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분이 “우리 둘 중의 하나는 연경반 강의에 꼭 참석하자”고 약속했습니다.
다석과 함석헌 선생은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사유를 확장하고,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 우리말로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두 분은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으면서도 활동 영역은 또 다른 면이 있었죠.”
함석헌은 1940년 8월 도쿄에서 터진 계우회(鷄友會) 사건에 연루돼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다석은 이 소식을 듣고 그동안 그만두었던 ‘통성(通聲)기도’를 다시 하게 됐다. “함석헌이 일제에 의해 투옥되고서는 하느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 안 할 수가 없어 다시 목소리를 내어 간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제자 함석헌을 끔찍히 아낀 것이다.
-두 분의 관계에도 기복(起伏)이 있지 않습니까? 함석헌 선생의 ‘여자 문제’에 대해 다석이 꾸중을 심하게 했고, 두 분이 관계가 소원해진 기간이 오래 갔습니다. 그러나 다석은 일지에서 함석헌 선생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함 석생은 다석이 돌아가신 후에 다석 추모 예배를 이끈 것을 보면 두 분 다 그릇이 크지 않으셨나 싶기도 합니다.
"다석은 옛날로 보면 선비 같은 양반이죠. 함석헌 선생은 굉장히 낭만적이고 감정의 폭이 큰 양반이었습니다. 아마 거기서 다석 선생이 바라는 바에 못 미치는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인간의 잘못으로도 볼 수 있지만 함 선생은 그런 약점이 있기 때문에 더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함석헌 선생에 비해 다석은 정치현실과 거리를 두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3·1운동 때 관여가 되어 다석 선생도 잠시 옥살이를 했지요. 그러고 나서는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성서조선> 등에 기고를 활발히 했지요. 그런데 정면으로 권력 집단을 향해 예언자처럼 외치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사례는 함 선생과 비교하면 거의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죠. 이것 역시 그분의 기질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당신 기질이 조용하고 나를 가꿔 나가는 분이기 때문에 사회활동보다는 개인적으로 계속 하느님을 찾고 인간이 가야 할 길을 찾았던 것이죠.
다석 강의를 보면 언뜻 언뜻 현실에 대해서 울분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표현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사회문제를 완전히 내 문제가 아니라고 한 것은 아니에요. 다만 내가 앞장서서 무엇을 하시지는 않은 거죠. 옛날로 치면 군자(君子)처럼 정치 세계를 떠났던 분으로 생각이 되네요.
일생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한 분이죠. 1943년 53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랐고. 당신의 생각을 펴기 위해서 사회 운동을 펼치는 게 아니라, 적은 인원의 사람을 앞에 두고 교육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생각은 굉장히 차원이 높다고 할까요. 하느님에 대한 정의라든지, 또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에 대한 관점도 인본주의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이 펼치는 사상은 어쩌면 경천애민(敬天愛民·하늘을 공경하고 씨알, 백성을 사랑한다)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을 그런 관점에서 제시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 예수가 삶의 모토라고 하셨는데요, 역사적 예수는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와는 어떻게 다른지요.
“성경 속에 나오는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래서 우리들을 위해서 하느님이 사람으로 내시고 또 그분의 고난을 통해서 그리고 고난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을 구원하는 관점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을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죠.”
-그럼 살아있는 모습으로의 예수, 역사적 예수는 어떤 의미입니까?
“2000년 전 당시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자기 민족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들이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세상에서 무거운 짐을 벗고 좀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복음 아니겠어요? 예수의 삶이 그들과 모든 것을 같이 했지요. 그래서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그분만큼 지극한 사람이 없었거든요. 어느 특정 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분의 삶 자체를 직시해서 그 모습을 쫓아 살아야 하겠지요. 오늘 교회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확실히 다르죠.”

   씨알재단 창립 10주년 기념식장에서 연설하는 김원호 이사장. 

-지금도 활동을 계속하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그 시대에 어떤 일을 했고, 그 조직 안에서 김 이사장이 설립한 신앙인사회학교는 무엇을 했는지요.
“종교인의 사회적인 참여는 당연히 해야 할 의무지, 그것 자체가 정치행위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된 것이죠. 과거에 사회 참여는커녕, 지배계급에 영합해서 그냥 살아온 가톨릭의 역할이 끝난 것이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결정으로 신부들이 미사를 집전할 때 라틴어를 쓰지 않고 모국어로 하게 됐습니다. 그 전에는 사제 혼자서 라틴어로 집전을 하고 신도들은 신부의 뒷모습만 보며 멍청하게 앉아 있었지요. 제단은 벽을 향해 있었죠. 지금은 신도들을 향해 있잖아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 요한 23세 교황이 소집해 논의를 계속하다 선종하면서 바오로 6세 교황이 이어받아 1965년 마무리를 지었다. 가톨릭의 변화를 상징하는 공의회였다. 개신교를 갈라진 형제로 인정했으며, 동방정교회와 화해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가톨릭이 사회적 불의에 하느님의 말씀으로 저항하는 예언자적 책임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저명한 신학자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신학 자문으로도 활동한 칼 라너 사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독일의 전체주의에 저항하지 않은 점을 비판했다. 비오 12세 교황(재위 1939~1958년)은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다간 가톨릭 신자들에게 위해가 가해질 것으로 우려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칼 라너 신부는 최근 작고한 한스 큉과 함께 20세기 기독교 신학의 양대 고봉(高峰)이다.
한국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프랑스 선교사들은 신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앙의 자유만 인정해주면 일제에 저항하지 않는 입장을 취했다. 신부들은 총독부가 시키는 대로 남산의 신사에 가서 참배를 했다. 일제의 정책을 거부하다간 조선시대 100년 동안 이어졌던 것 같은 가톨릭 박해를 다시 부를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이 계속 내려오다가 유신독재를 맞으면서 가톨릭이 달라졌다. <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김원호 약력>
1948년 출생
1963~1966년 서울고교
1966~1970년 서울대 철학과
1970~1972년 서울대 경영대학원
2005~2007년 가톨릭대학교상담심리대학원
1981~2018년 유미특허법인 대표변리사
2021~현재 유미특허법인고문,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이사장, 에코피스아시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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