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이 지금 살았으면 환경운동 했을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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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2021-06-23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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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㉓ 임락경 목사<下>

임락경 목사는 평생 결혼을 안 했다. 독신으로 살면서 딸 넷을 키웠다. 호적에 입양한 딸들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 화천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임 목사는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고 살갑게 전화를 받았다.
“장애인들과 살다 보니 옷을 허술하게 입고 다녀요. 장애인들과 똑같이 살아야 해요. 특별히 구별되지 않게 생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처음 와서 날 찾으려고 하면 못 알아맞혀요. 예수도 로마 병정들이 붙잡으러 왔을 때 옷을 민중들과 똑같이 입어 찾아내기 어려웠죠.”
인터뷰 중간에 임 목사가 점심을 먹고 계속하자고 제안했다. 이곳에서 자연치유를 받는 분들이 산과 텃밭에서 채취한 아욱 취나물 더덕 무침이 뷔페식으로 나왔다. 산에서 자연으로 자라는 더덕은 밭에서 재배한 것과는 달리 크기가 번데기처럼 작았다. 옥정호 경치를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산나물을 먹으면 웬만한 암은 치유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석이 육식도 하지 말라고 했는가요?
“아닙니다. 다석은 육식을 했어요. 다석 댁에 저녁을 먹으러 가면 1960년대에 그 귀한 쇠고기국을 먹더라구요. 질적으로 따지면 다석의 한 끼가 내 다섯 끼 값보다 비싸겠다는 생각도 했죠. 방 안에서 물그릇이 어는 겨울에 선생님 댁에는 스팀이 돌았어요. 거기선 담요만 덮고 충분히 잘 수 있던 거죠.”
-육식도 문제가 되죠. 소가 뀌는 방귀가 온실가스의 주요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살이 빨리 찌게 하고 알을 많이 낳게 하는 사료가 괜찮을지 모르겠구요. 채소도 농약을 너무 많이 써서 문제가 되고 있죠.
“내가 경기도 양돈협회 총회에 강사로 간 적이 있어요. 나는 고기를 조금 먹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송곳니를 가진 포유류는 고기를 먹고, 어금니가 발달한 포유류는 곡식을 먹지요. 앞니로는 채소나 과일 먹지요. 소나 초식동물은 앞니만 있어요. 그래서 고기 먹으면 미쳐요. 그게 광우병이죠. 사자 고양이 호랑이 늑대는 송곳니만 있어요. 고기를 먹어야 건강해요. 채소 먹으면 병 나요. 개는 어금니와 송곳니만 있어요. 그래서 곡식과 고기를 먹게 되어있어요. 개 예쁘다고 사과 주면 안 먹어요. 돼지는 사람과 똑같이 어금니, 송곳니, 앞니가 다 있습니다. 전체 이 32개 중에 송곳니가 4개. 32대 4, 즉 8대 1을 먹어야 건강한 거죠. 그것을 초과하니까 병이 나는 것이죠. 너무 채식만 하거나, 육식만 해도 안 좋아요. 더운 지방에선 고기를 안 먹는 게 좋고, 추운 지방에선 고기를 먹어야 좋죠. 그래서 부처는 살생하지 말라고 했고, 북유럽에서는 고기를 먹어야 좋다고 한 거죠.
부처님이 잘하신 거는, 더우니까 집을 나가야 하고, 더우면 앉아있어야 하고, 일사병 안 걸리기 위해 그늘에 앉아있어야 하고…. 고기 먹으면 안 되니까 절대 살생하지 말라 했죠. 부처님이 만주에 살았더라면 달라졌을 거예요. 아마.”

구기동 댁으로 다석을 찾은 사람들. 맨 앞줄 앉은 사람이 다석과 부인 김효정 여사. 맨 앞은 손녀.[사진=임락경 목사 제공]

임 목사는 건강식에 관한 책도 여러 권 집필했다. 그 내용에 100% 동의하지 않을 전문가도 있겠지만 홀섬(wholesome) 자연식을 강조한 책이니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암환자들을 위한 민간요법을 강의한다는데, 주로 어떤 분들이 오나요?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안 찾아오죠. 의사가 병을 고치지, 나는 병은 안 고쳐요. 항암제 독 때문에 죽는 사람이 많아요. 구토하고 머리 빠지고…. 나는 병원에 가지 마라, 항암제 맞지 마라고 하지 않아요. 항암제 독을 해독시켜주면 되지요. 음식 한두 가지 먹도록 하고, 항암제를 맞으면 죽는 환자가 그리 없더라고요. 의사가 아니니까 암 고친다고 하면 큰일 나지요.”
-공기 좋고 물 맑은 데 와서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으면 암 치유에 아무래도 도움이 되겠지요.
“공기보다는 음식이 첫 째입니다. 자연식을 하면 좋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요.”
-책을 여러 권 펴냈는데, 가장 애착이 가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농민신문에 3년간 연재한 걸 모아서 책으로 펴낸 <흥부처럼 먹어라, 그래야 병 안 난다>가 제일 잘 팔렸죠. 원고료가 상당히 많이 나오더라고요. 잘 받아 썼는데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그렇게 많이 팔렸다는데 인세가 나오지 않아서 물어봤더니 계약할 때 다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계약을 잘못한 거죠.
건강에 대한 책을 다시 쓰려고 해요. 우리나라 의술이 유럽과 미국을 거쳐 왔는데, 우린 그들과 식생활이 달라요. 허준이 미국 가면 병 못 고쳐요. 허준이 빵, 치즈, 버터 먹는 사람을 연구해보지는 못했거든요. 그래서 한국 사람 병은 <동의보감>(東醫寶鑑)으로 고쳐야 하고 서양 사람 병은 서의보감으로 고쳐야 하죠. 음식이 반 이상 서구화했기 때문에 지금은 허준이 와도 못 고칠 거예요. 허준이 다시 태어난다면 적어도 3년은 새로 공부해야 할 것이에요.  나하고 같이 다니면 1년이면 될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책 제목은 동의보감도 서의보감도 아닌, ‘중의보감’으로 생각해 뒀어요. 기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할 무렵 농민 노동 여성 부문에서 운동이 활발해지자 당국은 크리스챤 아카데미를 의식화 배후세력의 하나로 규정하고 교육 프로그램의 간사들을 체포했다. 1979년 3월 9일 여성사회분과 간사 한명숙을 시작으로 농촌사회분과 간사 이우재 황한식 장상환, 산업사회분과 간사 김세균, 신인령과 더불어 정창렬(한양대 교수)이 구속됐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원장인 강원용 목사와 함께 유영묵(전 중앙대교수), 박현채 양정규 신혜수가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중앙정보부는 이 사건을 불온 사상을 유포한 불법 지하 용공서클 사건으로 규정했으나 항소심에서 용공서클 혐의는 무죄가 나왔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에 연루돼 붙잡혀가 고생을 했는데요.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더군요.
“나에게 적용된 혐의는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조직체계에서 경기도 조직부장이었어요. 세상에 나를 보고 조직에 참여할 사람이 어디 있나요. 거의 서울대 나온 사람들입니다. 임락경 같이 무식한 사람을 어디에 쓰겠어요.”
-고문은 안 당했나요?
“수술을 받거나 담석으로 통증을 느껴도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를 안 했어요. 남산에서 고문당하던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면 통증이 사라져요. 아무리 어려운 일을 겪어도 중앙정보부 끌려가는 것보다는 낫지요. 거기서는 간첩이 되느냐, 사형이냐가 문제였지요. 거기서 경험이 그래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돼요. 아무리 큰일을 겪어도 그보다는 쉬우니까. 아플 때도 아프단 소리 안 해요. 그보다는 나으니까.”
그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면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지도자들도 함구했다”고 말했다. 약점을 찾아내 협박하고 죽지 않을 만큼 고문하니까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강원룡 원장은 어떤 혐의로 조사를 받았나요?
“크리스챤 아카데미 직원이 6명인데 6인 서클로 조직도를 그렸죠. 한명숙이 나랑 같이 들어갔습니다. 같이 고문당했지요. 내가 다녀온 뒤에 강 목사가 들어왔어요. 강 목사는 고문을 안 당했더라고요.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 목사 학생 다섯 분야를 교육시켜서 노동, 농민, 여성운동의 싹을 틔우고…. 강 목사는 민주화 운동의 씨를 뿌린 분이죠.”

 옥정호 앞에 선 임락경 목사. 호반 순환도로는 풍경이 좋은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사진=유수민 기자]


-유신독재 때 탄압받던 강 목사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에는 방송위원장도 맡고 그랬는데요.
“강 목사가 당시에 ‘나 혼자만 알고 있으라’며 이야기 했는데요. 전두환이 김대중을 사형 집행하려고 할 때 찾아갔대요. ‘내가 당신 시킨 대로 다 할 테니 김대중 사형집행만은 말아 달라’고 했답니다. 그런 연고로 방송위원장과 대통령 자문위원을 맡게 된 거죠. 일각에서 강 목사가 변절했다는 말이 나왔어요. 강 목사가 나한테 “락경이, 누구한테 해명하지 마. 내가 사쿠라가 아니라 겹 사쿠라가 되어도 좋으니까 해명하지 마라” 이러셨죠. 그래서 여태껏 해명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젠 상황이 바뀌었으니 내가 대신 해명을 합니다.”
임 목사는 다석의 구기동 댁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2층 건물이었어요. 우리나라에 2층 건물이 별로 없을 때였죠”라고 말했다. 인터뷰어가 “다석의 아버지가 유산을 많이 물려줬던 모양이죠”라고 묻자 “종로에 있는 집을 파니까 돈이 남았던 거죠”라고 답했다. “다석이 직접 돈은 안 벌어봤지요. 원래 아버님이 살던 종로 집을 팔아 구기동에 오면서 집과 터가 넓어졌어요. 양봉을 해서 어렵게 생활하지는 않았죠. 손녀들과 함께 사실 때 갔어요.”
-다석이 1일1식하는데 손님들 식사 대접은 어떻게 했습니까?
“보통 선생님은 2시에 일어나시니까, 새벽 4시에 찾아가도 계셔요. 그래서 주로 4시에 찾아갔죠. 저녁만 드시니까, 아침 점심 안 먹고 같이 이야기만 하지요. 저녁까지 있게 되면 저녁을 먹게 돼요. 손님 왔다고 밥을 따로 차리지는 않지만 저녁 때는 다석과 함께 밥상을 차려주시더라고요.”
-다석은 걷기를 좋아했다지요?
“하여튼 어떤 때는 버스 타서 자리가 있더라도 안 앉더라고요. 젊은 사람이 서서 양보했는데도 서서 가시겠다고.”
-책 <영성가 이야기>에서 십자가에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던데요. 무슨 의미입니까?
“순교자나 옛 성인들은 십자가를 지고 살았지요. 십자가에 기대고 살면 편할 텐데요.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 선교사의 일대기의 추천사를 내가 썼거든요. 출판 기념식 하는 날 나더러 축사를 하라기에 ‘십자가에 기대고 살면 부자도,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십자가를 지고 살면 어려움만 겪습니다. 최흥종 선생과 다석은 십자가를 지고 산 사람들이죠. 십자가를 지고 살면 힘들고 돈도 안 생기죠.”
-종교는 기독교인데, 가톨릭 농민회에도 관여했더군요?
“다석과 최흥종 목사의 영향이 굉장히 컸어요. 다석 강의가 끝나고 병원장이 ‘예수 이름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는 말을 하니까 다석은 ‘천상천하에 무여불(無如佛)’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아니면 구원 못 받는다고 합니까’라고 반문했어요. 물론 다석은 기독교에 가까우신 분인데, 기독교 근본주의 논리가 나오면 불경을 대면서 논쟁하더라고요. 불경, 노자, 장자 말씀도 늘 했어요.
그 당시에는 민주화운동을 할 때 가톨릭의 힘이 원체 크니까, 뭐든지 가톨릭을 끼고 해야 안전했지요. 교회는 집회를 못 하게 하는데, 성당에서는 집회를 할 수 있었어요. 천주님과 하나님이 싸우면 하나님이 백전백패예요. 문재현 신부와 문익환 목사가 똑같이 수사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천주님 아들인 문규현 신부는 형을 안 받고 돌아다니고, 문익환 목사는 감옥에 갇혔거든요. 천주님이 훨씬 힘이 세더라는 것이죠. 그래도 저는 천주님 덕을 많이 봤어요. 1978년 가톨릭 농민회에 빨리 가입하라고 해서 했더니, 80년대 전두환이 순화교육(삼청교육대)할 때 가톨릭농민회원은 하나도 안 끌려갔어요. 기독교 단체 친구들은 많이 끌려갔죠. 의정부 경찰서 순화교육 대상자 명단에 내가 1등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안 잡혀 가서 이상해서 곡절을 알아보니 가톨릭 농민회에 가입해 있어서 그랬더라고요. 나는 천주님 은혜를 많이 입었어요.”
-정농회라는 단체 회장을 했던데 어떤 단체입니까?
“비료 농약 제초제 쓰지 말고 농사를 바로 짓자는 단체죠. 1976년에 창립했습니다. 우리나라 환경농업 단체 중에서 가장 일찍 이런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러고 나서 다른 환경농업 단체가 생기고… 2000년대 가서는 정농회장을 하면서 환경농업 단체의 이사 감사도 맡고 그랬죠.”
-다른 밭에서는 제초제 살충제를 쓰는데 자기 밭만 안 쓰면 벌레들이 집중돼서 농사를 못 짓는 거 아닌가요?
“옆에서 농약을 치니까, 모든 벌레들이 우리 집 쪽으로 오다가 비료를 쓴 쪽을 먼저 먹으러 가더라고요, 그럼 거기서 농약을 쳐서 죽이는 거죠.
환경농업연합회 농업연구소장이 나를 찾아왔어요. ‘형님 회의 좀 나오세요. 엉뚱한 친구가 회장하려고 해’ 그러더라고요. 환경농업단체에 가보니 모두 70년대에 농민 운동하던 사람이에요. 그 사람들이 전부 단체장이 되어서 왔더라고요. 이 사람들이 60년대에는 사회주의 운동하던 사람이에요. 우리가 ‘70년대까지는 민주화운동하고, 80년부터 2000년대까지 환경운동한 거죠. 그렇게 약속을 한 적도 없어요. 그런데 시대적으로 앞선 일을 한 사람은 그 시대에 그 일을 하더라고요.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하면 훌륭한 사람이고, 조선시대에는 양반 때문에 나라가 망했으니까 양민과 상민을 구별 안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에요. 70년대는 박정희가 장기집권 독재하니까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죠. 그래서 막사이사이상을 장준하 선생님이 받게 된 것이죠. 80년대는 전두환이 군사독재를 하니까 제정구 의원이 받았죠. 90년대에는 복지 쪽에서 막사이사이 상을 받는다 했더니 꽃동네 오웅진 신부가 수상했죠. 2000년대는 환경 쪽에서 법륜 스님이 받게 된 것이죠.
70년대 훌륭한 사람은 민주화운동 한 사람이거든요. 나는 거기에 맞춰서 살았어요. 근검절약, 평생 헌 옷 입고 살았고, 민주화 운동은 지나칠 정도로 했지요. 90년대 이후에는 복지 운동을 했죠.
유럽에서 양반 상민 차별 없어지고, 독립하고, 근검절약하고, 민주화하고 복지국가 되고, 환경운동으로 이어졌어요. 거기까지 가는데 유럽에서는 한 단계마다 100년씩 걸렸습니다. 내가 소설 <토지> 최서희와 동시대를 살았어요. 다만 ‘과’가 다르니까 최서희는 못 만나도 길상이를 만났겠죠. 내가 환경농민연합회 이사, 감사까지 하기까지 70년이 걸렸어요. 다른 나라는 한 가지를 해결하는데 100년씩 걸려서, 유럽이 저렇게 된 게 수백년 걸렸는데 우리나라는 빨리빨리 민족이라 10년씩, 총 70년 걸리더라고요. 그 대신에 70%씩만 해결이 되었어요. 양반 상민 차별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민주화도 될 듯 될 듯하면서 아직 70%밖에 안 됐죠. 복지정책도 70%밖에 안 됐어요. 캐나다는 장애인이 태어나면 평생 생활비가 나온 데요. 환경도 30% 남았거든요. 앞으로 30년이면 다 될 것 같아요. 30년 뒤에는 양반 상민 없어지고 독립되고, 근검절약 몸에 배고, 민주화도 다 될 것 같은데, 문제는 30년 후에 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죠.”
-아까 책을 산 적이 없어서 <삼국지>도 못 읽어봤다고 했는데 <토지>는 읽어봤군요?
“소설은 안 봤어요. 텔레비전에서 본 거죠. 나는 길상이 과입니다.”
-이민족의 지배와 전쟁 가난 질병으로 고통을 겪는 동안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그런지 신흥종교들이 많이 생겼지 않나요. 그런 신흥종교에 대해서 연구를 깊이 한 탁명환씨가 동광원을 이단이라고 비판했던데요. 어떻게 된 겁니까?
“탁명환 교수가 정식으로 사과문을 내고 잘 몰라서 실수했다고 발표했어요. 동광원은 기복신앙이 아닌데요. 일단 그 당시에 머리 깎고 한복 입었죠. 일제 때는 양복 입으면 친일파로 보였는데 1950, 1960년대의 생활풍속을 1970년대까지 끌고 가니까 이단으로 비친 거지만 실제 신앙은 잘 몰라서 그런 거죠.”

한옥 사랑방 문 앞에서 임락경 목사와 인터뷰어 황호택.[사진=유수민 기자]

-다석에 관한 시리즈 인터뷰니까 다석 이야기를 좀 더 해보지요.
“다석은 그 시대에 딱 필요한 선각자죠. 일제 때는 오산학교에서 독립군 길러내는 일을 했지요. 지금까지 사셨다면 환경운동을 하셨겠죠.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안 뛰어든 것과 관련해선 그때도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건 함(석헌)이 잘해’라고 답했습니다. 그 당시에 70, 80이면 지금 100세 넘은 거나 다름없어요. 활동은 못하죠.”
-다석과 함석헌 선생의 관계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더 있나요?
“강원용 목사한테 내가 3시간을 들었지요. 동광원 김준호 선생한테도 ‘함 선생의 여자관계가 어떻고 하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김 선생이 답하기를 이승만이 함 선생을 제일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바른말을 하니까. 삼천만 민족이 말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함 선생은 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함 선생 말씀은 삼천만 민족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함 선생은 한 마디가 삼천 마디나 다름없죠. 그래서 함석헌을 벙어리로 만들면 삼천만 명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인데, 거기에 함 선생이 말려 들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인도를 다녀온 함 선생이 광주 YMCA 강의를 하러 온다는데 다석이 동광원 강의를 끝나고 ‘거기에 가겠다’고 하시더라구요. ‘왜 가시냐’고 물었더니 ‘내가 꼭 가야해. 함이 강의를 못 하게 해야지!’라고 목소리를 높였어요. 강의 제목이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란 말을 듣고는 ‘민족이 나아갈 길? 자기 앞길이나 잘 나아가야지…. 조선의 간디? 난 훌륭한 분이 사는 인도 쪽으로는 평생 소변도 안 봤다. 근데 자기가 인도를 다녀와?’라고 했어요.
그날 다석이 내가 본 모습 중에서는 화를 제일 많이 내셨어요. 함이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여자 문제로 삼천만 국민을 벙어리 만드는 일에 휘말렸다는 것이죠.”
옥정호는 섬진강 다목적댐을 만들면서 생긴 거대한 인공호수로 저수면적이 26.3㎢. 옛날에 붕어 낚시로 유명하던 운암 저수지도 옥정호 안으로 들어갔다. 섬진강 상류에 자리 잡은 옥정호는 일교차가 커서 물안개가 많이 발생하는 봄 가을에는 그야말로 선경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다. 옥정호를 끼고 도는 순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사랑방 요양원에서 조금 더 가면 임 목사의 고향이 나온다.
“저 위에 폐교가 있었어요. 양로원을 지어보자고 샀는데 동네에서 반대해서 못했죠. 마침 이쪽에 사 놓은 것이 있어서 이쪽에 지었지요. 호수가 좀 보여야 교회도 좋거든요.”
복잡한 서울살이에 찌든 사람들이 이곳에 내려와 며칠 쉬면 스트레스가 다 날아갈 것이다.
-임 목사에게 다석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영원한 스승이죠. 정신적으로 하늘을 가깝게 해주신 분이죠. 육체 건강도 다석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늘 일어났다 앉았다 하시면서 건강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먼저 다석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으신 최흥종 목사님, 나중엔 이현필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다가 두 분이 돌아가시니까 다석 밖에 의지할 곳이 없더라고요. 20년 정도 찾아다녔죠.”
임 목사의 배웅을 받으며 사랑방을 떠날 때 밭에서 난치병을 앓는 아주머니 넷이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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