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의 생존 직제자 임락경 "그는 3%의 성자"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황호택 논설고문·카이스트 겸직교수
입력 2021-06-16 17:24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황호택 릴레이 인터뷰㉒ 임락경 목사<上>

다석이 1981년 91세로 숨을 거둔 지 어언 40년이 넘게 흘러갔다. 다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다석의 문하에서 배운 제자는 박영호 임락경(1945~ ) 두 사람뿐이다. 임 목사는 열일곱 살에 광주 동광원에 들어가 1년에 두 차례씩 동광원에 와서 강연을 하던 다석을 만났다. 서울 구기동에 살던 다석은 계명산 자락에 있는 벽제 동광원에도 자주 와서 말씀을 전했다. 임 목사는 양주 장흥의 동광원 남자 수도원에 있을 때 계명산을 넘어가 다석의 동광원 강의를 들었다. 임 목사는 다석의 구기동 집에도 박영호 선생과 함께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찾아갔다.
순창은 행정구역으로는 전북에 속하지만 지리적으로는 광주에 가깝다. 임 목사가 순창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찾아간 곳이 동광원이었다. 그는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지 못하고 화폐개혁(1962)을 한 해라고 말했다. 임락경 소년은 동광원에서 최흥종 목사(1880~1966)를 만났다. 최 목사는 광주 YMCA 초대 회장을 지냈고 평생을 나환자 돌봄과 빈민구제, 독립운동과 교육에 헌신한 광주의 별이다. 그는 최 목사와 이현필 선생 그리고 다석을 인생의 사표(師表)로 삼았다.
당시 한국은 6·25 전쟁을 겪고 나서 먹을 것이 모자라 대부분 가정에서 1일1식을 했고 좀 여유가 있는 집이라야 1일2식을 하던 때였다. 임 목사는 춘궁기에 2일1식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석을 알기 전부터 1일1식을 실천한 셈이다.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으로서 중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대신 가르침을 얻고자 찾아간 곳이 광주 동광원이다.
“남원에 셋이서 공동경영하는 삼일 목공소가 있었습니다. 순창 고향교회의 오북환 장로, 서재선 배영진 집사, 세 분이 목공소를 했습니다. 이현필 선생이 남원을 찾아오면서 크게 감화를 받은 오국환 서지선 집사가 이 선생을 따라가는 바람에 목공소가 해체되다시피 했습니다. 서 집사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배영진 집사는 고향교회에서 장로로 있으면서 이현필 류영모 함석헌 선생과 현동완 YMCA 총무님 말씀을 자주 했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듣고 ‘조금만 더 크면 이분들을 찾아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동광원에 들어갔는데, 군 생활을 마치고 갔더라면 이현필 최흥종 선생은 못 뵐 뻔했지요.
다석은 해방 이후부터 매년 광주 동광원에 강사로 왔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선생님과 같은 방에서 잤지요. 새벽 2시에 함께 일어나 같이 요가를 했죠. 가난해서 강사 숙소가 없었던 게 어쩌면 행운이었어요.”

 젊은 시절 다석을 댁으로 찾아뵌 임 목사.


다석은 전주 근교에 있던 절 용흥사를 매입해 동광원에 기증했다. 다석이 지은 ‘진달네’라는 시 제목에서 따 진달네 교회라는 이름을 지었다. 다석의 붓글씨를 새겨 현판을 걸었다. 무등산 결핵요양원에서 건강을 회복한 사람들이 전주 진달네 교회로 옮겨와 닭을 기르고 산양 젖을 짜 콜라병에 담아 팔며 자급자족했다. 임 목사도 1969년 군에서 제대한 후 진달네 교회에서 3년 동안 살았다. 다석이 광주 동광원에 강의를 오면 임 목사가 전주로 모시고 가서 진달네 교회에서 하룻밤 묵고 서울로 올라갔다. 다석은 30만원에 절을, 20만원에 인근 산 13 정보를 사서 결핵이 나은 수도자들이 밭을 일구고 살도록 했는데 다석이 세상을 뜬 후 동광원 운영자가 가톨릭 전주교구에 기증했다.
임 목사는 진달네 교회에서 나와 강원용 목사의 크리스챤 아카데미, 가톨릭 농민회 활동을 했다. 그 뒤 화천에서 ‘시골교회’를 개척했다. 군대생활을 할 때 일요일마다 예배 보러 갔던 교회가 있던 마을이었다. 화천과의 인연은 지금까지 55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전북 정읍 옥정호반에 있는 근사한 한옥 건물은 화천 시골교회의 부설 요양원 ‘사랑방’이다. 손자의 난치병 치유에 감사한 할머니가 헌금한 돈으로 지었다. 난치병 환자들이 임 목사로부터 민간요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다.
임 목사는 낮이면 일하느라 전화를 잘 받지 않았고 저녁에는 묵묵부답. 문자 메시지도 씹었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과 유희영 군산 YMCA 사무총장의 도움을 받아 인터뷰 날짜를 힘들게 잡았다. 그날 인터뷰어가 서울에서 촬영 기자와 인턴 기자를 태우고 네 시간 운전을 해서 정읍 사랑방에 내려갔다. 그리고 두 시간 인터뷰하고 한 시간 식사하고 다시 다섯 시간 운전을 해서 돌아오는 당일치기 강행군이었다. 임 목사는 밭일을 하던 허름한 옷차림새로 서울서 찾아간 손님을 맞았다.
-교회 이름이 하필 시골교회입니까?
“내가 최흥종 목사를 알게 되면서 시골교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최 목사는 결핵 환자들과 함께 살았죠. 1980년대 되니까 관절염, 뇌성마비, 전신마비 환자들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서 30명이 됐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들끼리 사는 건 시설 인가가 나지 않아서 불법이었어요. 교회 차원에서 하면 규제가 덜했죠. 그래서 교회 간판을 걸었습니다. 장로가 교회를 하고 있다간 목사가 바뀌면 끝나니까 ‘내가 목사가 되자’는 생각을 했죠. 늦게 신학을 배워서 목사가 되고 교회 이름을 ‘망할 교회’라고 지으려고 했지요. 수용할 장애인들이 없어져 교회가 망해버려야 좋은 세상이 되거든요. 그런데 신도들이 교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냈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냥 밀어붙였을 텐데 그땐 초년 목사라…고향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보니까 ‘시골 향’ 자를 따서 시골교회라고 했죠. 2010년도까지 30~40년 잘 지냈는데, 지금은 장애인들이 갈 곳이 정말 많아요. 그런데 암환자들이 갈 곳이 없어요. 그래서 이곳 사랑방은 시골교회의 암환자 교육관으로 지은 거예요. 암 환자들 교육을 내가 1년에 30회 이상 나갔습니다. 이 건물에서 암환자들이 모여 숙식까지 할 수 있죠. 여기는 교회라기보다는 사랑방으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광주 YMCA 총무를 지낸 최흥종 목사는 어떤 분이었나요?
“다석보다 10년 연상으로 광주 YMCA를 창립하셨죠. 최 목사는 조선이 망해가던 말기에 의병을 살려내기 위해 순검을 했다더군요. 체포된 의병 수십 명을 다음 날 처단해야 하는데 한밤에 최 순검이 ‘너희를 풀어줄 테니 나를 묶어 놓고 도망가라’ 했답니다. 아침에 의병이 다 달아나버린 것이 알려져 난리가 났는데 최 순검은 ‘나 혼자 지키라고 하면 어떡하냐’고 발뺌을 했습니다. 순검을 그만두고 나와서 독립운동을 했는데 3·1운동 때 광주 지역 책임자였어요(최 목사는 서울종로경찰서에서 체포돼 징역 3년을 받았다).
그땐 나병 환자들이 갈 곳이 없었어요. 최흥종 목사가 나병환자들을 위한 시설을 지으라고 선산을 내놓았습니다. 최 목사는 젊은 시절 주먹이 세다고 소문이 나서 나환자들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광주에 가면 최 목사가 돌봐준다고 하니 나환자들이 광주로 우르르 몰려왔죠. 도지사한테 나환자를 수용할 집을 지어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는데, 답이 없자 총독부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광주에서 걸어서 서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150명이 출발했는데 중간에 숫자가 불어나 500명이 모이더래요. 그것을 ‘구나(救癩)행진’이라고 하는데요. 총독부에선 깜짝 놀랐죠. 그래서 만들어준 곳이 여수 요양원입니다. 여수 요양원 박물관에 가면 최흥종 목사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소록도 박물관에도 최 목사 사진이 있죠. 다석 선생이 광주에 올 때면 최흥종 선생과 무척 가깝게 지냈죠.”
-다석의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이 세상을 뜨고 없어서 보물 같은 존재가 되셨는데요. 다석의 강연은 어땠습니까?
“다석 기념 학회나 기념 발표할 때 후진들이 글로만 읽고 발표하니까 다석의 모습을 흉내도 못 내요. 촬영 기자가 왔으니 내가 그 모습을 한번 보여주고 싶습니다.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아오’”
임 목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노래를 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음성으로 설명하지 않고는 무슨 뜻인지 몰라요. 책에 그저 써놓아도 모르죠. 다석 선생이 하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다석 선생님은 주시경 선생이 큰 실수를 했다고 했죠. 지금의 한글 자모 24자에 옛글자 4자를 그대로 두었더라면 외국어를 표기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었죠.”
우리가 보통 하는 ‘가나다라마바사…’를 다석은 ‘기니디리’로 대신한 모양이다. 다석은 한글을 사랑했고 한글학자들과 가까워 사전 편찬 비용도 내주었다.

임락경 목사가 개척한 화천 시골교회. 여느 교회와 다르게 한옥으로 지었다. <광명시민신문 제공>


-다석에 대해 ‘내가 삶의 큰 빚을 진 스승’이라고 말했던데요.
“원래 큰 나무 밑에선 나무가 큰 줄 모르는 거예요. 최초에 최흥종 목사님 영향을 받았고, 이현필, 다석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세 분 다 나로선 빚쟁이죠.”
이현필의 일생을 알고 나면 보통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성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심중식 귀일연구소장 인터뷰 때 가보니 벽제 동광원에 웅장하게 이현필 기념관을 짓고 있었다. 완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현필 선생은 생전에 그런 기와 집에서 하룻밤도 자보지 못했을 것이다.
-심중식 소장이 임락경 목사가 한옥으로 크게 짓자고 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이곳에 와서 보니 사랑방도 호수가에 한옥으로 멋지게 지었네요.
“불교는 어느 나라에 들어가든지 그 나라 건축양식으로 사찰을 짓고 그 나라 옷을 입고 그 나라 악기를 쓰거든요. 기독교는 어느 나라에 가든지 뾰족집 짓고 그 나라 풍속을 안 따라요. 일본에 갔더니 사찰과 신사 건물이 구분 안 될 정도로 비슷해요. 스님들은 일본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복 잘 입으면 중 옷 같다고 하지요. 다석도 평소에 한복 입고 머리 깎고 다니니 중 같다고 했는데 그게 아니거든요. 건물을 이렇게 지어놓으니 교회가 아니라 절간 같다고 하는데…. 기독교는 여기서 진 거예요.
불교는 건물 하나를 지어놓고 예불도 드리고 교육도 하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다 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는 이렇게 하려면 건물을 5채 지어야 해요. 예배당 따로, 교육관 따로, 숙소, 식사 따로…. 1채로 해결하는 것이 우리 전통 한옥 방식이죠. 화천의 시골교회도 이렇게 한옥으로 지었어요.”
-초등학교만 졸업했다고 하는데요. 책도 10여 권 쓰고 목회자로 활동하시고…. 독학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나는 낮에는 한 번도 책을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그래요. 밤에 공부했죠. 낮에는 일해야 하죠. 오늘도 여러분들 오기 전까지 부지런히 일했어요. 그리고 아직까지 책 열 권을 안 사봤어요. 아직 삼국지도 안 읽어봤어요. 내 앞에 없으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책이 100권이 안 됩니다. 책 한 권 사고 싶어도 계속 지킨 전통이 깨질까 봐 안 사고 있어요.
대부분 남의 책을 빌려 읽었어요. 공책도 남이 쓰던 것을 썼죠. 밤에 조카나 동생들이 연필로 쓴 헌 공책에 나는 펜으로 덧입혀서 쓰면 되거든요. 학교 안 다니고 공부하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학교 다닌 사람보다 노력을 배로 해야 해요. 나중에 교수들 하고 회의를 해도 거침없이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김성훈 상지대 총장이 국제환경유기농센터를 설립하면서 임 목사를 교수로 임명했는데 ‘초등학교 졸업자가 대학 교수가 된 것은 처음’이라고 소감을 말했더군요.
“김성훈 농림부 장관 때 마침 내가 정농회 회장이었죠. 친하게 지냈어요. 상지대 총장 취임식 날 갔더니 친환경 농업과를 세운다고 하더라고요. 이후에 일부러 찾아갔어요. 친환경 농업과를 설립하는데 친환경 농업이 무언지도 모르는 교수랑 운영하시겠냐고 물었어요. 실제 친환경 농업을 실천한 사람이 교수가 되어야 한다고 했더니, 총장이 학장에게 각 도에 한 명씩 임명하라고 했어요. 강원도의 임락경 등에게 교수 임명장 수여식을 하고 나서 김 총장이 ‘가보로 보관하십시오’라고 해서 화천 집에 임명장을 보관하고 있죠.
미국에서 한 달간 강의 초청이 왔는데 농민과 목사 타이틀로는 비자가 안 나왔어요. 그런데 교수재직 증명서 내니까 금방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미국 가서 한 달간 강의했죠. 서부에서 동부까지 주파했습니다. 가자마자 미주한국일보와 기자 회견했죠. 이현주 목사와 제가 같이 갔어요. 강의는 주로 교민들을 상대로 했죠.
김동성이라는 사람이 중학교 때 나를 따랐는데 미국서 방송을 하고 있었죠. 한인 투표율이 15%였는데, 김동성이 한인 유권자 센터를 만들어서 65%로 끌어올렸어요. 미국 정치인 중에 김동성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버락 오바마가 상원의원 때 찾아왔대요. 김동성은 오바마 당선에도 도움을 주고 미국에서 훨훨 날았죠. 김동성을 뉴욕서 만났는데 ‘선생님 내일 방송하셔야 한다’ 하더라고요. 미국에서 방송한다는 것이 신났죠.”
-초등학교 학력으로 목사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야간 신학대학을 정식으로 다녔습니다. 호헌총회 신학대학입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대학이지요.”
대한예수교장로회에도 교단이 많다. 호헌총회는 그중에서도 군소교단이다. 신학대학들은 고졸 학력을 기본으로 요구하지만 농어촌 목회자 특별전형은 학력을 따지지 않는다. 임 목사는 정농회 회장을 했고 상지대 초빙교수를 한 경력으로 특별전형을 통과했다.
-기성 대형 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기독교 방송에서 추석특집이 나가는데, 목사님 교단이 무엇인지 제일 궁금하대요. ‘대한예수팔아 장사회’라고 적어두고 다신 물어보지 말라고 그랬어요. 다른 목사한테 항의가 오면 어떡하냐기에 ‘나한테 바꿔주라’고 했어요. 전화 바꿔주면 ‘당신은 예수 팔아서 장사 안 하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상품이 같으면 싸워요. 가게가 나란히 있어도 상품이 다르면 싸우지 않죠. 예수 팔아 장사하는 사람은 나와 싸우겠지만 거룩하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시비를 걸겠느냐 하고 글을 썼더니 다시 한 통화도 안 와요. 그래서 나는 기독교 방송에서 인정해준 대한예수팔아장사회예요.
어디든지 97대 3이라고 하더라고요. 진리를 제대로 하는 것은 3%래요. 제대로 생활하는 사람, 교회, 절이 3%래요. 거기에 다석이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불교에서 이판사판이 있는데, 이현필 스승님은 ‘이판’이죠. 이판은 청렴결백하게 고기 한 점도 안 먹고 기도만 하는 스님을 말하고, 절 크게 짓고 시주를 좋아하는 걸 사판이라고 하는데요. 나는 이때까지 이판이 훌륭하고 사판은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불교를 지금까지 유지한 것은 이판이죠,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이판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유지됐고, 사판 같은 사람이 욕을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영성가 이야기> 책 쓰기 며칠 전에 훌륭한 사판 스님을 만나서 깜짝 놀랐어요. 이판은 자기 밥벌이도 못 한대요. 포교는 누가 하고 절은 누가 지키냐는 것이죠. 그래서 ‘아 사판 중에서 훌륭한 사람이 있고 이판 중에서도 못된 사람이 있구나’하고 판단했어요.
내가 판단하기엔 사판 중에서도 이판 냄새가 나고 이판 중에서도 사판 냄새가 나야 해요. 이판 쪽으로만 가면 외골수가 되고, 사판 쪽으로만 가면 안 되죠. 둘 다 겸할 수 있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석은 두 가지를 겸했죠.”

   다석 묘소 앞에 선 임락경 목사.

-다석은 수행에서 ‘몸성히’를 강조했는데요. 어려서 콜레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론 병을 앓은 적이 없지요. 비결이 궁금합니다.
“다석은 체조와 요가를 했는데요. 그 시절에도 인도 요가가 있었다면 굉장히 잘했을 거예요. 다석은 스스로 창안한 요가를 했어요(임 목사는 유튜브 동영상용으로 시범을 보였다).
그 체조를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하세요. 두 시간 동안 그 체조만 하는데, 선생님이 허리가 좀 굽으셨거든요. 꼿꼿이 영감님이 왜 그런가 봤더니 앞으로 구부린 체조만 한 거죠. 지금 같으면 뒤로도 펴고 다양한 요가를 했을 텐데…. 그리고 바지 입을 때 손으로 벽 짚지 마라. 목욕탕에서 때 밀어 달라고 하지 마라. 이렇게 생활에서도 요가를 했죠.
내가 한번 선생님께 병원에 간 일이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2층에서 떨어졌을 때 ‘내가 왜 낮잠을 자지?’ 하고 돌아보니 병원이라고 했어요. 그때 이후론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없었대요. 일제 강점기에 아들 며느리가 모두 홍콩 독감에 걸렸는데 다석은 안 걸렸답니다. 눈병도, 감기도 안 걸렸다고 해요.”
-다석의 건강법인 1일1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다석 선생님의 1일1식을 따라 해봤어요. 1식도 해보고 2식도 해보고…. 정오가 되기 전에 밥 안 먹기로 결심한 적이 있는데, 아침 4시에 일어나서 타작을 하고, 5시에 밥 먹으러 가면서 산행하는데 배가 고파서 무거운 짐을 들 수가 없더라구요. 밥을 먹으니 둘러멜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일하는 사람이 1일1식은 못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땀 흘리는 일을 안 하는 불한당(不汗黨) 이론에 휘말릴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다석 선생께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일하는 사람은 제때 먹어!”라고 했어요. 무릎 꿇고 앉은 모습을 따라 하니까 “그렇게 앉지 마! 일하는 사람은 그러면 안 돼!”라고 했어요. 항상 예외는 있더라고요.
당시에는 다석 선생님을 따라 한다고 1식을 굉장히 오래 했죠. 그런데 일을 못 하겠더라고요. 다석 선생님은 항상 땀 한 번 안 흘리고 사신 것에 미안해해요. 돈을 안 벌어보고 사셨다고 내가 스승을 불한당이라고 하죠. 종로 집에서 태어나 살다가 한 번 이사 가서 십 여 년 살고, 이사 한 번 또 가서 20년 정도 살고, 환갑 지나서 아들이 먹여 살리니까 평생 돈을 안 벌어보셨지요.”<인터뷰어 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임락경 약력>
-1945년생
-1958년 순창 유등국민학교 졸업
-1962년 동광원 입소
-1966~1969 화천에서 육군 복무
-1969~1971 전주 진달네 교회 생활
-1972년 벽제 동광원에서 생활하며 다석을 자주 찾아뵘
-1979년 3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으로 구속 수사받음
-2006~2012년 정농회 회장
-2005~2012년 상지대 국제친환경유기농센터 초빙교수
-1980년 화천에 시골교회 세움
-2018년 정읍 옥정호반에 사랑방 개소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