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신아방강역고-32] 세종대왕은 조선의 광개토대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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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21-06-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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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대왕의 친신중의 친신 문무겸장 이천

  • 조선 최고 팔방영웅 이천이 잊혀진 까닭은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리베로 & 먼치킨 이천
그에게서 '리베로'가 떠오른다. 리베로는 이탈리아어로 '자유인'을 뜻한다. 축구에서 리베로는 최후방 수비수지만, 자기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공격하기도 한다
 
그에게서 판타지 소설에서 쓰이는 강력한 캐릭터를 지칭하는 단어 ‘먼치킨’이 떠오른다. 여러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 남들을 압도할 정도의 성과를 내는 팔방미인, 팔방영웅(八方英雄)이 먼치킨이다.
 
필자는 많이 알려졌거나 논의된 것보다 잊혀졌거나 적게 논의되는 주제를 이야기하길 훨씬 좋아한다. 제1차 파저강(랴오닝성 훈강) 정벌 사령관 최윤덕과 제3차 파저강 정벌 사령관 남이 장군은 유명하다. 하지만 제2차 파저강 정벌 사령관 이천(李蕆)은 생소하다. 이천은 누구인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살펴보다 경악했다.
 
세종대왕이 가장 신뢰한 친신, 전방위 전천후 문무겸장, 세종대왕의 리베로, 친부와 계부 모두 참수형을 당한 사람. 이뿐만이랴. 대마도 정벌, 경자자(庚子字)·갑인자(甲寅字) 개발, 간의·혼천의·앙부일구 개발, 장영실의 멘토이자 천거자, 악기 발명, 무기 개발, 쾌속정 개발, 한강 함포사격 훈련, 제2차 파저강 정벌 사령관 등등...

이토록 드라마틱한 삶을 살면서 다양한 업적을 세웠으나 잊혀진 위인은 조선 500년 역사상 그 말고 따로 찾기 어려울 것 같다.(1)* 본 주제인 2차 파저강 정벌을 이야기하기 전에 조선최고 문무겸장 자유인, 팔방영웅 리베로이자 먼치킨, 이천의 일대기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친부와 계부 모두 참수형을 당한 비운의 초년시절
제2차 파저강 정벌 사령관 이천은 1376년 경상도 예안현에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때 군부판서 이송(李竦)의 아들로, 그의 집안은 문인으로서 조부 이승(李昇)은 종3품의 성균관 좨주를 지냈다. 어머니는 공민왕의 권신이자 외척이었던 염흥방(廉興邦)의 누이동생이었다. 염흥방의 전횡으로 그와 연관된 자는 모두 참수형에 처해지고 사형당한 자의 처와 딸등 30여명은 관노가 됐고, 6살짜리 아이와 어린 젓먹이도 임진강에 던져죽였다. 당시 이천의 아버지 이송은 연좌되어 참수형을 당했다.(『고려사』 열전49권 간신) 당시 13세이던 이천과 그 아우 이온(李韞)은 산 속 절의 승려가 불쌍히 여겨 동굴에 숨겨준 덕택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천의 어머니 염씨는 개성부윤(개성시장)을 지냈던 변남룡(卞南龍)과 과 재혼하여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이천의 새아버지 변남룡은 태종 때 이양우, 이천우, 이숙을 "태상왕(이성계)을 끼고자 한다"는 무고죄로 그의 아들 변혼과 함께 저자에서 목을 베이고 그 가산은 적몰했다.(1401년 태종1년 1월9일)

이런 연유로 이천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행적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문무겸장·팔방영웅- 전천후 전방위 이천의 활약상
이천은 1393년(태조 2년) 하위무관직인 별장에 임명돼 관직에 나섰다. 1402년 무과 초시에 급제하고, 1410년 무과 중시에 각각 급제하여 동지총제 ·충청도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태종으로부터 '천'이라고 불리며 그의 딸인 소현옹주 호위를 맡아 태종의 최측근이 됐다. 1415년 (태종 15년)공조참판으로 부임하여 황해도 일대 은광 개발을 담당했다. 이어서 대마도의 왜적을 방비하기 위해 경상해도 조전절제사에 올랐다.
 
1419년(세종1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당시 첨절제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 1420년 (세종 2년)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킨다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고했다.
 
대마도 정벌과 왜적 토벌에 공을 세운 이천·윤득홍 등에게 무관직을 제수하다.
『세종실록』 5권 1419년(세종1년) 6월 2일
 
대마도는 경상도에 매여 있으니, 모든 보고나 문의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경상도 관찰사에게 보고를하여, 그를 통하여 보고하게 하고, 직접 예조(외교부)에 올리지 말라
1420년(세종 2년)윤1월 23일
 
이천은 1420년 경자년에 다시 공조참판에 올라 국장도감의 제조가 됐다. 세종의 명을 받아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다. 경자자의 발명에 사관은 ”실로 우리 조선 만세에 한 없는 복이다(實我朝鮮萬世無疆之福也)”라는 『조선왕조실록』(1392~1910년) 518년간 기록에서 찾기 힘든 최상의 환호성의 역사를 쓰게끔 했다. 표준저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였고 중국에서 견문한 사륜차를 개발했다.
 
경자년 겨울 11월에 우리 전하께서 공조 참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새로 글자 모양을 고쳐 만들게 하시니,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일곱 달 만에 일이 성공하니, 인쇄하는 사람들이 이를 편리하다고 하였고, 하루에 인쇄한 것이 20여 장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글은 인쇄하지 못할 것이 없어, 배우지 못할 사람이 없을 것이니, 문교의 일어남이 마땅히 날로 앞서 나아갈 것이요, 세도의 높아감이 마땅히 더욱 성해질 것이다. 한(漢)·당(唐)의 임금들이 단지 재리와 병혁(兵革)에만 정신을 쏟아, 이를 국가의 급선무로 삼은 것에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뿐만이 아닐지니, 실로 나의 조선 만세에 한 없는 복이다.“實我朝鮮萬世無疆之福也。
1421년(세종 4년) 10월 29일
 
임금이 공청이나 사가에서 사용하는 저울이 정확하지 아니하므로, 공조 참판 이천(李蕆)에게 명하여 개조하게 하였다. 이날에 이르러 1천 5백 개를 만들어 올렸는데, 자못 정확하게 되었으므로 중외(中外)에 반포하고, 또 더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사들이게 하였다.
1422년 (세종 4년) 6월 20일
 
공조 참판 이천이 사륜차를 만들었는데, 앞은 낮고 뒤는 높게 하여, 재궁을 받들어 끌고 산으로 오르기가 평지에 있는 것과 같았다. 이어 헌릉의 비석을 감독하여 조성한 공으로 안장 갖춘 말을 하사받았다. 1422년 (세종 4년) 9월 6일
 
1431년에는 우군 도총제가 되어 쾌속정(군함)을 개발했다. 1432년 천추사 총재가 되어 북경에 다녀왔고 이어 지중추원사가 됐다. 1432년 이천은 세종에게 천민 출신 장영실을 발탁해 공조판서 자신의 휘하에 두고 함께 천문 기구인 간의대 제작에 착수했다. 혼천의 제작에 착수해 1년 만에 완성했다. 1434년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한 ‘갑인자’를 만들어 인쇄 발달에 이바지했다. 또, 조선의 군선(軍船)을 개량하고 노궁(弩弓)을 개발하였고 악기를 개선했다.
 
이천은 1436년 최윤덕에 이어 평안도 도절제사가 됐다. 1437년 7월에 평안도 도절제사로서 약 1만5000명의 군사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을 정벌했다. 이천은 이 공으로 정헌대부 호조판서 겸 평안도 도절제사가 됐다. 이어 북방지역을 방안을 아뢰는 등 북방영토 수복 전진기지 4군의 구축에 힘썼다. 1443년 중추원사가 되고 화포와 무기 등을 개량했다. 1445년 세종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강에서 함포를 사격하는 수군훈련을 실행했다. 1450년 정2품 벼슬인 판중추원사에 올라 세종으로 부터 궤장을 하사 받았다. 이천은 무신으로서 요직을 역임하면서 세종 대의 과학기술 발전과 북방 영토 수복에 큰 공을 세웠다.
 
 
임금이 시험선의 속도를 시험하게 하다. 총제 이천(李蕆)이 상소하기를,
신은 생각하기를, 배가 느리고 빠른 것은 여부에 있지 아니하고 체제에 달렸다고 봅니다. 신이 일찍이 동정(東征; 1419년 대마도 정벌) 때에 가지고 온 왜대선(倭大船)을 보니, 그 갑으로 만든 방법이, 밖에는 월외송(月外松)으로 싸고 가운데를 회로 막지 않았는데, 경쾌하기가 병선보다 훨씬 낫습니다. 앞으로는 이 방법에 의하여 배를 만들되, 그 판목(板木)은 반드시 해가 지나도록 오랫동안 말린 뒤에 쓰게 하소서." 1431년 (세종 13년) 5월 14일
 
임금이 북경에 천추사로 가는 총제 이천을 전송하다. 천추사 총제 이천(李蕆)에게 옷·갓·신·약을 하사하고 내관을 반송정(盤松亭)에 보내어 전송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4월 22일
 
이천·정인지 등이 혼천의(渾天儀)를 올리매, 임금이 그것을 곧 세자에게 명하여 이천과 더불어 그 제도를 질문하고 세자가 들어와 아뢰라고 하다.
1433년 (세종 15년) 8월 11일
 
이천(李蕆)을 불러 의논하기를, 경이 지혜를 써서 판을 만들고 주자를 부어 만들어서,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하여, 비록 밀을 쓰지 아니하고 많이 박아 내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심히 아름답게 여긴다. 이천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고, 집현전 직제학 김돈·직전 호군 장영실(蔣英實)·) 등에게 일을 주장하게 맡기고, 주자(鑄字) 20여 만 자를 만들어, 이것으로 하루의 박은 바가 40여 장[紙]에 이르니, 자체가 깨끗하고 바르며, 일하기의 쉬움이 예전에 비하여 갑절이나 되었다. 1434년(세종16년) 7월 2일
 
임금이 한강 가운데서 수전(水戰)을 연습하라고 명령하였다. 지중추원사 이천 등이 삼군
으로 거느리되, 한 군선마다 사졸 30여 인씩 싣고, 또 배 4척으로 허수아비 사람을 태워 적군을 삼아 가지고 상거(相距) 20보쯤에서 각(角)을 불고 북을 울리면서 주화·질려포(走火蒺藜砲)를 쏘면서 전투하는 모양을 하는데, 세자가 대군과 함께 희우정(喜雨亭; 오늘날 망원동 근처) 서쪽 산봉우리에 나가서 관람하였다. 1445년(세종 27년) 3월 2일 을해
 
◆제2차 파저강 정벌 최고사령관 이천
화제를 이천의 제2차 파저강 정벌로 되돌린다. 세종은 1433년 제1차 파저강 정벌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북방지역 탈환에 나서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조합해 관리했다.(2)* 
세종이 가장 신뢰하는 친신 이천을 1436년 평안도 절제사로 임명해 제2차 파저강 정벌을 준비하게 했다.
 
세종은 1437년 5월 19일 압록강 이북의 야인을 토벌할 최종결심을 이천에게 밝힌다.
 
" 경의 도적을 토벌하는 정성을 이미 자세히 알았다. 즉시 대신들로 하여금 함께 논의하게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만주가 칙서를 받들고 왔으니 토벌할 수 없다. ’고 하나, 나는 생각하기를, 비록 칙서를 받들고 왔다고 하나, 그 칙명이 이만주에게 간여된 것이 아니고 본국에도 관계가 없으니, 칙명을 받들고 온 사람으로 논할 수는 없다. 만주가 파저강에 있을 적에 해마다 지은 죄악은 용서할 수 없으니, 비록 그 소굴에 있을지라도 진실로 마땅히 사로잡아 베어서 변경의 원수를 갚아야 할 터이다. 그 소굴을 토벌하라. 1437년(세종19년) 5월 19일
 
두달후 7월 18일 제2차 파저강 정벌을 떠나는 이천 장군에게 구체적 작전명령을 내린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우리가 만약에 성채만 지키고 공격하지 않는다면 더욱 적의 배포만 키우게 되어 뒷날의 화가 무궁할 것이니, 반드시 선제 응징하여 후환을 저지하는 게 상책이다. 계축년(1433년 1차 토벌)에는 적의 장정을 잡아다가 즉시 죽이지 않고 우리 지경에 되돌아와서 베어 죽였으나, 이번에는 반드시 당장 죽여라. 부녀자와 어린 아이를 제외하고는 온전하게 살려 둘 필요가 없다. 파저강의 적들은 사람마다 각각 강도가 되어서 우리 국경을 침략하려고 모책하매, 죄가 가득하고 악이 쌓였으니, 어찌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있겠는가. 1437년(세종19년) 7월 18일
 
 
그로부터 두 달이 채 못된 이천이 이끄는 파저강 1만 5천 정벌군이 승전했음을 알려오다.
평안도 감사가 치보하기를,
"이번 9월 초7일에 좌군 도병마사 상호군 이화와 우군 도병마사 대호군 정덕성이 산양회에서 압록강을 건너갔고, 도절제사 이천 등은 만포 구자(滿浦口子)의 앞 여울을 지나서, 11일에 좌·우군이 고음한 지방에 들어가서 적의 전장을 양쪽으로 공격하니, 적이 모두 도망하므로 좌군은 홍타리로 향했고, 도절제사의 군대는 오자점에서 강을 따라 내려와서, 적의 소굴 12호를 수색하고는 적 35명을 목 베이고 5명을 생포하였으며, 소와 말들을 빼앗고 그들이 쌓아 둔 서속을 불태웠습니다. 12일에는 우군이 파저강을 지나서 올라 산성(랴오닝 환인 오녀산 산성))과 아한 지방을 수색하였으나, 적이 모두 도망하여 숨었으므로 단지 1명만 목 베이고, 그들의 집과 콩과 서속을 태우고는 즉시 파저강을 도로 건너서, 13일 새벽녘에 우군과 도절제사 군사들이 함께 오미부에 이르러서 그 적의 소굴을 포위하니, 이미 적이 미리 알고 숨어서 드디어 그들의 빈집 24호와 쌓아 둔 콩과 서속들을 불태웠습니다. 도절제사의 군사는 즉시 돌아오고, 우군은 소토리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좌군을 기다렸는데, 좌군은 적 10명을 목 베이고 남녀 9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홍타리로부터 와서 모이니, 이날 해질 무렵에 적이 우군이 진을 치지 않은 틈을 타서 돌입하여 교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14일에 아침에 적이 또 곧장 좌군을 가리키면서 크게 호통을 치며 진을 범하기로, 우리 군사가 화포를 쏘니 적이 물러났고, 좌·우군이 모두 군사를 돌려서 좌군이 앞을 서고 우군이 뒤에서 오다가, 길에서 또 적의 50여 기(騎)가 갑자기 숲 사이에서 나왔으나,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그들의 말 2필을 빼앗았습니다. 16일에는 좌·우군과 도절제사 군사가 모두 도로 강을 건너 돌아왔습니다. 모두 적을 죽이고 잡은 것이 60명이옵고, 우리 군사인즉, 황해도에서 자원하고 들어온 1명이 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였다. 이천 등이 사인을 보내어 첩서를 바치기를 전후하여 다섯 차례나 하였는데, 그 때마다 사인들에게 모두 의복을 차등 있게 내려 주었고, 최정안도 또한 승전한 것을 와서 아뢰므로, 옷을 내려 주고 인하여 전농 주부 이하의 고신을 주었다. 1437년 (세종 19년) 9월 22일
 
이천의 제2차 파저강 정벌의 전과는 표면적으로 미미하였으나 그 파급효과는 지대했다. 정벌이 있을 거라는 기미를 알아차린 이만주 휘하 여진족은 동으로는 요서지방으로, 서쪽으로는 연해주까지 도주해 남만주 지역 전체 여진족의 분열을 야기시켰다. 세종대왕은 4군을 전지기지화한 데 이어서,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임명해 사민정책 등을 펼치면서 동북지역의 국토를 탈환하기 위한 6진을 개척했다
 
◆조선최고 문무겸장 팔방영웅 이천이 잊혀진 까닭은?
이천의 본령은 무인이다. 대마도 정벌에 큰 공을 세웠고 1433년 제1차 파저강 정벌 사령관 최윤덕의 후임자로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5년을 직임했다. 1437년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한 2차 정벌의 책임자로 다시 한번 정벌하고 북방영토의 수복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4군 지역은 매우 중요했다. 파저강 정벌 이후 책임자였던 최윤덕은 이후 조정에서 우의정, 좌의정이면서도 여진족을 경계하기 위해 평안도 도절제사를 3년 동안 겸임했다. 또 1443년 4군 전진기지가 완성될 때까지 10년 중에, 조정에서 재상의 반열에 있던 60세를 넘긴 두 노장이 7년간을 책임진 것에서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두 노장이 세종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었는지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이천은 호조판서로서 오랜 연구 끝에 천문학 기구인 대간의·소간의·혼의·앙부일구·자격루 등을 만들었고, 그 밖에 화포를 만드는 등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외에도 나라에서 건축하거나 개축하는 공사에서 대부분 주관하는 관청의 재조를 맡아서 능력을 발휘했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을 알아보고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그런데 역사는 이러한 이천을 왜 잊었을까? 아니 왜 꼭꼭 감췄을까? 전지적 일본인 시각으로 쓰여진 역사 친일매국사관에서 이천은 대마도 정벌이라는 일본에 묵과할 수 없는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은 아닐까? 게다가 이천은 일제가 고착시킨 압록강-두만강 이남 한반도 수비형 무인의 프레임을 뛰어넘어 만주 정벌이라는 공격형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은 아닐까?

◆◇◆◇◆◇◆◇◆◇◆◇각주

(1)*이천에게서 한국 판타지 소설에서 쓰이는 강력한 캐릭터를 지칭하는 단어 ‘먼치킨’이 떠오른다. 여러 분야에서 어떤 일을 하든 남들을 압도할 정도의 성과를 내는 팔방초인 먼치킨

(2)*『세종실록』은 1433년 제1차 파저강 정벌에서 1437년 제2차 파저강 정벌까지 세종대왕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근정전에서 조회를 받는데, 파저강 야인도 참예하다 1433-09-11 (세종 15년)
임금이 안숭선에게 최진이 이만주 등의 죄를 덮고자 음모를 꾸민 상황을 열거하여 말하게 하다1433-11-26 (세종 15년)
근정전에 나아가 조회를 받고 참예한 파저강 야인에게 음식과 옷을 하사하다 1433-12-16 (세종 15년)
파저강 야인 이만주가 지휘 왕답올 등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치다 1433-12-21 (세종 15년)
국경 사람들의 사적 왕래 문제·야인의 귀화 문제·기민의 구제 상황에 대한 시찰 등을 논의하다1434-01-12 (세종 16년)
항복해 온 야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문제를 논의하다 1434-04-07 (세종 16년)
대마주 태수 종정성 등과 파저강 야인 심타납노 등이 사인을 보내 조공을 바치다 1434-05-26 (세종 16년)
파저강 야인 등에 대한 방어 대책을 논의하다 1434-05-29 (세종 16년)
파저강 야인인 이만주 관하의 유가가납이 서울에서 시위하기를 청한 것에 대해 논의하다 1434-06-13 (세종 16년)파저강 야인으로 귀화하여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자의 처리문제를 논의하다 1434-06-14 (세종 16년)
사로잡은 야인과 야인의 재산과 마필의 송환문제로 사신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이를 상의하다 1434-07-03 (세종 16년)
아내와 함께 도망해 온 파저강 야인 와대의 처리문제를 논의하다 1434-08-17
야인에게 간첩을 보내는 일에 관한 논의하다 1436-07-18 (세종 18년)
야인의 침략에 대비해 창성·의주 등의 수비를 강화하도록 하다 1436-10-06 (세종 18년)
김종서가 야인 정벌을 건의했으나 시기를 미루다 1436-11-09 (세종 18년)
자성 강계 등에 화포를 교습시키는 관원을 배치하다 1436-11-27 (세종 18년)
야인을 토벌할 뜻을 함길도 절제사에게 전하다 1437-05-16 (세종 19년)
야인 토벌의 계책을 세우도록 김종서에게 명하다 1437-05-20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행동을 삼갈 것을 명하다 1437-06-09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야인 토벌의 세 가지 계책을 올리다 1437-06-11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좋은 계책이 있으면 즉시 아뢸 것을 명하다 1437-06-14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16조목을 헤아려 아뢰다 1437-06-30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 이천이 이만주 무리를 소탕할 계책을 올리다 1437-07-17 (세종 19년)
평안도 감사에게 야인 토벌 계획을 알리다 1437-07-18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토벌 지침을 전지하다 1437-07-18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이만주가 오미부에 거주하고 있음을 알리다 1437-07-19 (세종 19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엄격히 군령 대로 행할 것을 명하다 1437-07-25 (세종 19년)
변방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이주했는지 조사시키다 1437-08-07 (세종 19년)
이천이 이끄는 야인 토벌군이 승전했음을 알려오다 1437-09-22 (세종 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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