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구 칼럼] 하노이 이후의 실패, 무엇을 두려워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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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구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입력 2021-01-20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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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구 교수]



지난해 말 일본에서 출판된 『2021년 이후의 세계질서(2021年以後の世界秩序)』(와타나베 쓰네오 지음)란 책을 읽고 여러 가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20페이지의 그리 두껍지도 않는 문고판이지만, 미국의 정치외교에서 미중관계, 코로나 시대의 국제문제, 기후변화, 북한 핵문제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다양하기도 하지만 깊이도 만만치가 않다. 2021년 이후의 국제정세의 흐름과 방향을 생각하는 데에 도움은 되었지만, 한편에서는 이런 책을 쓸 생각도 하지 못한 필자의 나태함이 부끄러웠다.

책 속에는 미국의 대한 무역적자가 180억 달러가 달하는 데도 불구하고 35억 달러나 되는 주한미군 주둔경비를 부담해야 하는 것에 격노한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파기 의사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하려는 2017년 9월 5일자 서한의 초안을 개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이 대통령 책상에서 빼돌려 숨겼다는 밥 우드워드의 책(『공포: 백악관의 트럼프(Fear: Trump in the White House)』)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필자의 책장에 꽂혀있는 이 책을 다시 꺼내보고 읽었던 흔적을 발견하고는 조금은 위안이 되었지만, 만약 이 서한이 한국 측에 전달되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2017년 7월 북한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탄도미사일을 두 번이나 시험 발사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군사적 행동을 시사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8월 5일 북한의 외화수입원의 수출을 차단하고 금융제재를 추가하는 결의를 채택하자 북한은 7일 발표한 정부 성명을 통해 극악한 미국에게 ‘천 백배로’ 대가를 치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미 국무부는 9월 1일부터 미국인의 북한 여행을 금지하고 북한 체류 미국인들에게 자진 퇴거를 요구했는데, 이틀 뒤인 9월 3일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위원장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ICBM 장착용 수소폭탄 실험을 지시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전했다. 6번째 핵실험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 14일 CNN과의 인터뷰에서 독자적인 핵무장과 주한미군의 전술핵 재배치 가능성을 명확하게 부인했지만, 이에 앞선 9월 7일 문 대통령은 경북 성주 주한미군 기지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THAAD) 잔여 발사대 4기의 추가배치를 결정했다. 11월 29일 사거리 1만 킬로미터가 넘는 화성-15형을 쏘아올린 북한은 마침내 국가핵무력의 완성을 선언했다.

2018년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를 계기로 반전(反轉) 드라마는 시작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면서 남북대화가 시작되고 4월 27일 남북 분단의 상징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모든 군사적 적대행위를 멈추고 전쟁의 실질적인 위협을 해소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구축하기로 합의했다. 군사적 위기와 전쟁의 먹구름이 가시고 한반도에 평화의 훈풍이 불기 시작해 온 나라가 흥분했다.

우여곡절은 겪어야 했으나 한 달 반여 뒤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역사적인 첫 번째 북미정상회담은 전 세계로 중계되었는데,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이 아니었다”면서 “우리한테는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고 있었는데 모든 걸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는 34세의 ‘은둔의 왕국’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의 모두발언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또한, “새로운 조미관계 수립과 조선반도에서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안전담보를 제공할 것을 확언”하고 김정은 위원장은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확고부동한 의지를 재확인”하는 공동성명이 채택되는 데에는 한국 정부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 열린 실무회담에서 북미 양국은 구체적인 비핵화 방안과 절차와 상응조치를 둘러싸고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2018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북미정상회담은 결렬되고 6월의 전격적인 판문점 북미(남북미) 정상회동과 10월의 스톡홀름 실무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는 길고긴 동면상태에 빠졌다.

2018년 9월 19일 저녁 15만 명의 평양시민을 상대로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이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주의 원칙을 확인”했으며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제안했다. 또한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8천만 겨레의 손을 굳게 잡고 새로운 조국을 만들어 나갈 것”이며 “우리 함께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자고 호소했지만, 지난 2년 사이에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 정부에 대한 북측의 기대와 희망은 불신과 실망을 넘어 남북관계 파탄의 책임자라는 비난으로 돌아왔다.

1월 5일부터 8일이나 열린 제8차 당 대회를 통해 북한은 ‘한반도 운전자론’과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던 한국에 대해 변덕스런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정부 내의 강경파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바람막이는커녕 “방역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관광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을 꺼내들고 북남관계개선에 관심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면서 “이중적이며 공평성이 보장되는 않는 사고관점”을 버리지 않는 한 상대도 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당 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2016년 5월의 제7차 당 대회에서 자신이 제시했던 국가경제발전 5개년전략의 목표가 “거의 모든 부문에서 엄청나게 미달”했음을 인정하면서 그 원인을 ‘야만적인 제재봉쇄책동’이나 ‘혹심한 자연재해’ ‘세계적인 보건위기의 장기화’ 때문만이 아니라 ‘과학적인 타산과 근거에 기초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계획에 있다고 신랄하게 자기비판했다. 나아가 김정은 위원장은 그렇게 해야 앞으로 “할 수 있고 반드시 해야 할”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얼마 전 필자가 참가한 세미나에서 일본의 북한전문가는 이것은 결코 ‘패배선언’이 아니며 목표 미달이라는 부(負)의 역사에서 교훈을 찾아 앞으로의 교훈으로 전환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내재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 18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이 왜 성공하지 못했는지 되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청와대와 정부·여당 어디서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멈춰선 원인을 반추하려는 각성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더 이상 희망적 관측이나 이상에 기대지 말고 두 눈 부릅뜨고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있는지 끊임없이 자문(自問)해야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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