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 왜 실패했나] "창신·숭인 기간산업 저버린 탁상행정, 홍보만 급급했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김재환·윤지은 기자
입력 2020-12-21 07:5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봉제산업 명소 만든다" 6년 전 약속, 달라진 건 없어

  • 종사자와 무관한 ’역사관·봉제거리‘ 등 홍보성 사업만

  • 한수원·민간서 작업공간·기계 제공하자 청년들 찾아와

창신·숭인동 일대를 봉제산업 명소로 재생하겠다는 서울시의 계획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실무자격인 공무원 사이에서도 안타깝다는 하소연이 나올 정도다. 실패의 원인은 지역에 관한 낮은 이해도와 보여주기식 탁상행정이 주요했다.

◇관련기사
[도시재생 왜 실패했나] 창신숭인 예산 전수조사 해보니"안 하니만 못했다"
실패한 서울형 도시재생?...창신동 등 6개구역 집단행동 예고 


서울시가 뒤늦게 시작했다가 1년 만에 끝난 지원사업은 한국수력원자력과 민간이 이어가고 있었다. 청년들에게 필요한 시니어 기술자의 교육부터 재료비, 작업장 임대료, 수천만원에 달하는 봉제 기계를 지원하면서 청년들이 창신동에 찾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차경남 서울봉제산업협회장(왼쪽 첫번째)와 수강생들이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 647-9번지 일대 봉제산업협회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사진 = 차경남 회장 제공]


20일 본지가 서울시 종로구 창신동에서 만난 차경남 서울봉제산업협회장은 "지역민한테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 외부인한테 보여주기 좋은 사업만 했는데 어떻게 도시가 재생되겠나"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그는 "봉제산업 기반 도시재생을 한다던 게 2014년인데, 서울시 책임자를 재작년에야 만났다"며 "뭐가 필요하냐고 그때야 묻더라. 교육비랑 재료비 정도만 지원해달라고 했다. 작년부터 도시재생사업이 끝났다면서 지원도 끊겼다"고 말했다.

서울시 지원이 끊긴 후 제자들이 교육비를 주겠다고 했지만 차 회장은 차마 그 돈을 받지 못했다. 다행히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한국수력원자력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올해부터 한수원은 교육비와 재료비뿐 아니라 창신동 청년 디자이너와 공장에 의뢰해 옷을 만든 후 기부하는 등 일감을 제공하는 식으로 실질적인 도움도 주고 있다.

반면 그동안 서울시가 창신동에 868억원을 들여 조성한 봉제 역사관과 채석장 관광화 사업, 문화공원, 카페, 채석장 전망대, 백남준기념관 등은 잊힌 채 방치된 상태다.

이 중 봉제 역사관에는 32억4500만원이 쓰였다. 값비싼 봉제 기계를 100대는 살 수 있는 돈이다. 봉제협회에서 역사관이나 간판 바꾸기 대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업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시가 도시재생사업 예산으로 봉제공장마다 붙인 간판. 정작 공장 관계자들은 "손으로 돌리는 미싱이 뭐냐. 요즘 기계들이 얼마나 첨단인데, 아직도 수십년 전 고루한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고 불평했다.[사진 = 김재환 기자 ]


관광지로 만든다던 채석장에는 표지만 덜렁 있는 정도였다. 카페나 전망대, 문화공원은 가장 높은 언덕에 있어 주민들이 찾아가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지역민과 무관한 사업에 대규모 홍보성 예산을 투입했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봉제 역사관의 경우 지역민들은 "만드는지도 몰랐다"고 입을 모은다.

25년간 창신동에서 봉제공장을 운영한 이 모씨(53세)는 "동네에 도시재생을 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았다"며 "산업 종사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사무실이나 공용 기계도 아니고 역사관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더라"고 비판했다.

청년 디자이너들은 작업공간과 공용 기계만 지원해줘도 창신동에 정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로선 봉제산업거리라는 문패만 있을 뿐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실정이다.
 

바닥에 창신동 봉제 역사관으로 가는 길 표지가 있다. 지역 상인들이 "표지를 처음본다"고 답했을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표지가 '박물관'인 이유는 역사관 건립계획 당시 본래 박물관으로 계획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물관 이름을 붙이기 위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박물관' 명칭을 쓸 수 없게 됐고, 최종 명칭은 '봉제 역사관'이 됐다.[사진 = 김재환 기자]

뉴욕에서 차 회장의 데님기술을 배우러 창신동에 온 김 모씨(28세)는 "임대료랑 봉제기계가 너무 비싸다. 기계가 한 대에 2000만~3000만원 한다. 이것만 지원해줘도 정착할 요인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동대문 인근 자재 시장과 공장, 패션쇼가 열리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이 가까워 적당한 유인책만 있으면 청년 디자니어가 정착하기에 매력적인 입지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유일하게 창신동에 정착한 청년 디자이너인 박 모 대표도 차 회장으로부터 5개월치 임대료와 기계를 지원받은 사례다.

차 회장은 "대학 강의를 하다 보면 디자이너 지망생들 99%가 공장에 직접 가본 적이 없다. 직접 디자인한 결과물을 현장에서 보는 경험은 정말 귀하다. 기회만 있으면 청년들은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그 기회만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도시를 되살리는 건 결국 청년이다. 봉제산업은 첨단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옛날과 보여주기에 얽매였다. 정말 현장에 필요한 행정을 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지금 창신동 일대 봉제공장은 청년 디자이너의 소량 일감을 받아주고 있다. 물량이 적은 만큼 이윤이 남지 않아 무상 수준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다. 

차 회장은 "청년을 돕는 공장에 인증서를 발급하는 제도도 방법도 괜찮은 것 같다"며 "기술자는 돈이 아니라 자부심을 먹고 산다. 청년이 유입돼야 창신동에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차경남 협회장(왼쪽 두 번째)와 정재훈 한수원 사장이 2020년 봉제 교육사업 지원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 차경남 협회장 제공]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