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 칼럼] "우리가 애국할 대상은 오직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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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객원논설위원· 서울시립대학 초빙교수
입력 2020-12-14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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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위원]


독일 통일 당시 동서독 지식인들은 통일을 반대했다. 이유는 이렇다. 통일 국가로서 독일은 74년간 존속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은 1, 2차 대전을 비롯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통일이 되면 인류에 또 재앙”이라며 우려했던 것이다. 민족국가를 복원하는 형태로서의 통일은 유럽에도, 독일에도 불행하다는 논리다. 이런 인식에 기초해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제 우리가 애국할 대상은 국가나 민족이 아니다. 민주적 헌법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는 통렬한 경고다. ‘5·18 왜곡처벌법’과 ‘대북 전단 살포금지법’에서 전체주의적 발상이 보인다는 이들이 많다. 국가주의에서 비롯된, 헌법적 가치와 어긋난다는 비판이다. 오히려 5·18을 욕보이고, 뿌리 깊은 이념 대결을 초래할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 헌법은 말할 수 있는 자유, 즉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지난 민주주의 역사는 ‘말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었다.

피 흘려 쟁취한 그 가치가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다. ‘5·18 왜곡처벌법’에 따라 앞으로 형사 처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부인, 비방, 왜곡, 날조, 허위사실을 유포하면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또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북한을 향해 확성기 방송이나 전단을 살포해서도 안 된다. 어길 경우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 더불어민주당이 주도한 입법 선의와 필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다.

1980년 이후 40년이 흘렀지만, 5·18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극우인사들은 틈나는 대로 5·18을 왜곡·선동하고 있다. 지난해 자유한국당 김진태·이종명·최순례 의원은 극단적인 망언으로 5·18을 욕보였다. 또 지만원은 북한군 개입설을 끝없이 유포하며 태극기 부대를 선동하고 있다. 대북 전단 살포와 비방 방송도 부정적 측면이 없지 않다. 남북 화해 무드에 걸림돌이 되고, 접경지역 주민들은 불안을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당위성이 헌법적 가치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국가가 역사 인식을 독점하겠다는 발상 또한 위험하다. 민주주의 위기가 시작됐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최진석 서강대 교수는 ‘5·18왜곡 처벌법’과 관련해 반대 의견을 피력한 뒤 곤욕을 치르고 있다. 최 교수는 “언제부터인가 5·18은 민주당 전유물이 됐다”면서 “법으로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5·18을 살리는 길”이라며 ‘표현의 자유’ 침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전남대 최협 교수도 “현행 법으로도 얼마든지 허위사실 유포나 명예훼손을 처벌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자신이 없어 또 법을 만들려 하는지 궁금하다”고 회의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역사적 사실을 정의하고 규정하고, 이를 부정하면 형사 처벌하는 나라가 21세기에 있을 수 있다는 현실에 경악한다”고 했다. 얼마 전 전두환은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 5·18 관련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실형을 받았다.

대표 발의한 민주당 양향자 의원은 “역사왜곡이 아이들 역사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나라 정체성을 흔드는 정신적 내란죄”라고 주장했다. 역사 지평은 진상규명이나 활발한 토론을 통해 넓혀야 할 문제다. 법으로 재단하겠다는 발상은 과잉 대응이다. 국가보안법 ‘찬양·고무죄’와 비교하는 이들도 있다. ‘자유민주적 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질서 혼란을 조성할 허위사실을 날조하거나 유포한 자를 처벌’한다는 게 찬양·고무죄다.

찬양·고무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는 분명하다. 국가권력이 해석하고 판단한다. 이 때문에 지난 역사에서 수많은 양심수들이 양산됐다. 이런 논리라면 제주 4·3, 6·25전쟁, 4·19의거, 천안함 폭침, 세월호까지 법으로 재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확대된다.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다. 이 말은 역사는 확고한 진리가 아니라 시대정신에 따라 끊임없이 해석과 평가를 달리하는 사실이라는 뜻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관점에 따라 역사 해석은 달리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으로 굳어진 통념이나 사실까지 부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함은 아니다. 때로는 학계에서 정립된 학설조차 부인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은 헌법을 위배한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우려한 빅브러더 출현을 21세기에 목도하는 것은 왠지 불편하다. 역사 해석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양심의 자유에 속한다.

표현의 자유 침해와 관련해 ‘대북 전단 금지법’도 논란이다. 미국 의회 내 초당적 국제인권기구인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는 “명백한 한국 헌법 위반이자 근본적인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준수를 저버린 어리석은 입법”으로 규정했다. 불쾌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다시 위르겐 하버마스로 돌아가자. “우리가 애국할 대상은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민주적인 헌법이다.” 선의로 법을 만든다고 하는 자들이 새겨들을 경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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