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3)] "다석은 인간의 최고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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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0-12-0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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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영모 삶에서 '예수'를 떠올린 이들, 서영훈, 이진구, 기자 이충우

[다석 류영모]


다석사상 용어인 '가온'을 호로 쓴 사람

서영훈(1923~2017)의 호는 '가온(嘉溫)'이다. 한자를 풀면 '아름답고 따뜻한'이란 뜻이지만, 실은 류영모의 철학용어인 '가온(가운데)'에서 빌린 말이다. 서영훈은 류영모에게 "저의 호를 가온으로 정했으면 좋겠다"고 뜻을 말했고 류영모는 흔쾌히 수락했다.

서영훈은 1953년(30세) 대한적십자사에 입사해 1982년 퇴임할 때까지 29년을 이곳에서 일했다. 1972년에는 남북적십자회의 대표로 참가해 남북한을 왕래하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것은 김대중정부 때인 2001년이었다.

그는 주로 시민활동을 많이 했다. 1968년 안병욱의 권유로 흥사단에 입단해, 1983년부터 1986년까지 흥사단 이사장을 맡았다. 2006년에는 임시정부기념관건립 준비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또 2010년에는 생명평화선언대회 대표를 지냈다. 적십자사 활동으로 하루 4시간씩 1주일간 공해방지 교육을 한 것이 한국 환경운동의 효시가 됐다. 또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익숙한 표어가,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정의사회구현협의회,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부정방지대책위원회, 시민단체협의회 대표를 역임한다.

그는 1988년 노태우정부 때 KBS사장에 발탁된다. 그는 관영방송 이미지를 벗기 위해 방송자유화에 힘썼다. 취임 때는 정권 입김이 전혀 없는 사장으로 손꼽혔지만, 임기 중에 노사관리와 조직경영에서 미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에 노태우 정권의 미움을 사 경질된다. 후임 사장에 낙하산 인사로 서기원(전 서울신문 사장)이 왔고, 이후 KBS사태가 발생한다. 2000년 김대중정부 때 창당된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맡기도 했다. 스스로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남을 만큼 비중있는 정치적 이력을 갖고 있는 그는 초동교회 장로를 역임한 기독교인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류영모와 인연을 맺었을까.

사상계 전신인 '사상' 잡지를 낸 서영훈

묘향산 남쪽에 있는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그는 송정보통초등학교 6년을 수료한 것이 수학(修學)의 거의 전부였다고 한다. 물론 광복 이후 국제대학교(현 서경대학교) 교육학과를 다니기도 했고, 원광대와 호서대,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학력(學力)은 철저한 독학에서 나왔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했고, 종교, 철학, 역사, 교육에도 밝았다.

해방 이후 그는 38선을 걸어서 월남했다. 서울에 와서 민족청년단 청년간부 훈련을 받았다. 김구, 조소앙, 이범석, 정인보, 안호상, 장준하, 김준엽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 6·25 때 부산 피란지에서 백남준 당시 문교부장관이 원장으로 있던 국민사상 지도원에 근무한다. 여기서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사상(思想)'이란 잡지를 냈다. 당시 그는 함석헌을 스승처럼 모셨다.

1956년 서영훈이 함석헌을 만나기 위해 원효로에 있는 집을 찾았을 때, 함석헌의 부인이 나와 "함 선생은 선생님 강의를 들으러 갔다"고 말한다. "스승에게 강의를 하는 그 스승은 누구냐"고 물었더니, 부인은 "류영모 선생을 모르냐"고 되물었다. 류 선생은 종로YMCA에서 매주 금요강좌를 연다고 전해줬다.

서영훈은 적십자사 청년부장 시절, 청년대학생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에 함석헌을 강사로 자주 초빙한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함석헌은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는 바람에 강의를 할 겨를이 없었다. 서영훈은 이 무렵 류영모에게 강의를 부탁하기 시작했다. 1963년 여름부터 서영훈이 기거하고 있던 적십자사 사택에서 매주 한 차례(처음엔 수요일 저녁, 나중엔 일요일 아침) 류영모의 강의가 있었다. 교수와 대학생들 20여명이 참석했다. 이 모임은 3년간 계속됐다. 류영모는 구기동에서 남산동까지 걸어서 아침 8시 정각이면 어김없이 도착했다.

적십자사 사택에서 있었던 류영모 강의에 참석한 수강자들은, 황종건 박윤호 이호진 이애선 고순영 김신일 이병호 정태기 곽일훈 오인문 이종우 조영선 노공근 박한식 서정각 등이었다. YMCA모임 수강자인 전병호 염락준 류승국 김흥호도 보였다. 류영모 일요강의는 현동완, 최원극, 문설, 고봉수, 김종호 등의 집에서 열기도 했다.

류영모 돌아간 날, 자카르타서 꿈을 꾸다

서영훈이 1981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국제적십자사연맹 총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다. 호텔에서 잠을 자다가 문득 이상한 꿈을 꾼다. 한국에 있는 아내가 소복을 입은 채 허공에 대고 절을 하고 있는 꿈이었다. 서영훈은 잠을 깬 새벽에 하도 이상하여 한국에 전화를 한다. 아내에게 별일 없느냐고 물었다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간밤에 류영모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서영훈은 교회 장로를 지낸 사람으로 류영모의 비정통 신앙에 온전하게 동의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참'에 대한 깊은 열정과 해박하고 정교한 사상, 그리고 생의 전부를 바친 헌신적인 실천에 감복을 했기에 그의 강의를 부지런히 들었다. 서영훈의 꿈에 류영모의 죽음이 보였던 것은, 마음속에 스승으로 모셨던 각별한 감정이 빚어낸 일이 아닐까 싶다.

류영모가 돌아간 뒤 해마다 류영모의 구기동 집에서 제자 김흥호가 추도식을 주관했다. 3년 뒤 유족들이 구기동에서 경기도 고양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서울에서 추모모임을 가질 만한 장소가 필요해졌다. 그때 흥사단 이사장으로 있었던 서영훈은, 도산기념관 강당을 내준다. 이 추모모임을 신문에 광고하려고 하는데, 개인 명의로 하는 것이 적절치 않아서 급히 '다석사상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처음에 김흥호에게 회장직을 권했는데, 그가 고사하는 바람에 서영훈이 첫 회장을 맡는다. 함석헌이 죽기 한해 전인 1988년 흥사단 모임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연설을 했던 사건은 이전 시리즈에서 이미 얘기한 바 있다.

서영훈은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 시절인 1980년, 직접 앰뷸런스를 타고 포위망을 뚫고 광주 시내로 혈액을 운반한 일이 있다. 광주의 상황을 직접 본 뒤 서울로 와서 "다친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정부에 산소통을 요구했고 그것을 싣고 그날 위험한 도시로 뛰어든 것이다. 그의 청렴도 소문이 났다. 민주당 대표 시절 그의 지갑 속에는 2천원이 들어 있었다. 의원과 당원을 대상으로 '점심 식사 3만원 안넘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 적십자사 총장 때는 집에 전화가 없어서 그를 찾느라 많은 이들이 애를 먹었다.

첫 다석사상연구회장이 된 서영훈

다석사상연구회에서 낸 류영모 추모문집 서문에는 서영훈의 글이 실려있다.

"선생은 예수·석가·공자를 받들어 그 가르침을 소중하게 배우고 가르쳤다. 소강절 · 장횡거 · 톨스토이 · 마하트마 간디를 특히 좋아하였다. 그 밖에도 참을 찾고 참에 나아간 이는 누구라도 귀하게 받들었다. 류영모님은 이와 같이 동서고금에 걸친 성현들의 종교 철학사상을 널리 섭렵하여, 그 진수와 요강을 스스로 체득하고 밝힘에 따라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인 최고 경지에 이르렀다. 삼독(三毒, 탐욕과 성냄과 치정)을 이겨내어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얻은 이다."

서영훈은 1995년 유달영의 성천아카데미 특강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마음속에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 있는 영원한 생명의 '나'가 있음을 느낍니다." 이것은 교회기독교의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말에 가깝다. 즉 류영모가 역설했던 '그리스도의 씨'를, 서영훈이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음을 드러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추모글에서 말한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인 최고 경지'는 바로, 예수가 다다랐던 경지이며, 류영모가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며 그리스도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 뜻에 붙이는 예찬(禮讚)이 아닐 수 없다.

류영모가 돌아간 해인 1981년 한국일보의 이충우 기자는 '격동의 근대를 살다간 위대한 한국인들'(7월 19일자)이라는 시리즈에서 류영모의 생을 다뤘다. 그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남들의 위에 앉아 섬김을 받고자 한 적이 없다. 오로지 남들을 섬기고자 하는 삶으로 일관한 일생이다. 그러므로 자랑할 만한 경력도 없다. 다만 '참'을 찾는 벗을 사귀고 서러운 씨알[庶民]과 더불었다. 그의 생애 91년은 보통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고 감히 단언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류영모가 도쿄물리학교에 머물 무렵 비정통 기독교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추정한다. "그곳에서 그는 교회와 예수와의 거리를 심각하게 생각한 끝에 초교회적인 신앙생활의 길로 들어섰고 그 길에서 일관했다. 그때 섬기는 자가 되는 하느님 아들이 걷는 좁은 길을 택하면서 대학진학을 포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충우는 류영모가 예수와 같은 길을 걸었다고 보았다. 그가 꿰뚫은 예수의 정체성은 바로 '섬기는 자'였다.
 

[다석 류영모]

예수의 좁은 길을 걸은 사람

류영모의 신앙생활에서 큰 변화는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구금될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1일1식을 시작했다. 이충우는 이렇게 그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매일 새벽 3시경에 일어나 체조하고 냉수마찰을 한 다음, 하오 5시에 저녁 한끼니만을 들었다. 유일한 식사를 할 때 그는 보통 1시간 이상 음식을 씹었다. 그렇게 40년간을 1일1식으로 살았다."

류영모의 하루 한끼는 신에게로 몰입하고 섬기는 자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수행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었지만, 그 부수적인 결과로 그를 평생 병 없이 건강하게 살게 했다. 1식은 질병에서 헤어날 수 있는 강력한 건강식임을 류영모가 입증한 셈이다. 그의 한끼는 이른 저녁이었고, 천천히 음식을 씹는 느린 식사였다. 이 같은 간소하고 느린 식사 습관이 요즘 시대의 많은 문명질환과 비만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묘책이 될 수 있다는 걸 이 성자가 40년의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또 새벽 냉수마찰도 중요한 포인트다. 둘째 아들 류자상은 이렇게 증언한다. "아버지는 통풍이 잘돼야 한다면서 사방 창문이 달린 방에 기거하셨습니다. 방안에 대야물을 항상 받아놓았는데, 한겨울밤엔 그것이 꽝꽝 얼어붙었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얼음을 깨고 그 찬물로 냉수마찰을 하셨지요. 하루도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다석(多夕)이란 호를 쓰게 된 것에 관해 이충우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어둠과 허공에서만 우주의 실재를 볼 수 있다고 믿었다. 다석은 어둠이 분명 빛보다 크다면서 '먼저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다'는 창세기와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다시 햇빛이 쓸데없다'는 묵시록을 인용하며 '처음도 저녁이요 나중도 저녁이다. 저녁은 영원하다. 낮이란 만년을 깜박거려도 하루살이의 빛이다'라고 갈파했다. 저녁은 해가 빛나는 낮보다도 절대세계인 하늘나라를 더 잘 나타내고 있다. 낮에는 빛에 현혹되어 세상에 미혹되므로 하느님을 그리기보다 세상에 얽매이게 마련이다. 낮에 기도할 때 왜 눈을 감는가. 저녁을 만들기 위해서다. 맘과 뜻과 힘을 합해 하느님을 사모했던 다석으로서 저녁을 좋아했던 건 당연하다. 

2000년 전 '섬기는 자'를 한국서 보다

'성서신애(聖書信愛)'를 펴냈던 이진구씨(李瑨求)는 류영모를 일컬어, "아무나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신 분"이라고 말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사랑과 섬김이다. 류영모는 자녀들에게도 결코 잔심부름을 시키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단정한 한복을 입고 수십리 길을 오로지 걸어다녔으며 약속은 늘 한치 틀림없이 지켰다. 시계도 차지 않았다. 또한 얼음과자나 음료수는 입에 대지를 않았다. 과수원에서 손수 딴 감이나 자두 외에 비싼 과일도 전혀 먹으려 하지 않았다.

먹는 일에서, 입는 일에서, 자는 일에서, 사는 모든 일에서, 그는 자신의 몫을 줄이고 비워 그 삶을 오직 하느님에게로 향하도록 하였다. 이미 스스로의 육신이 '입다가 버릴 옷' 같은 것으로 여겼으니, 자기의 것에 대한 욕심이 스며들 곳이 없었다. 세상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과 욕망과 겉치레와 허튼 자아감 같은 것을 모두 거둬들였으니 오직 할 일은, 신과의 소통과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눠주고 싶은 뜨거운 강연뿐이었다. 이토록 하늘에 경건하고 인간을 섬기는 이를, 인류는 2000년 전 '예수'라는 이에게서 뚜렷이 본 적이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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