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80)] 신은 '가운데'에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20-11-11 11:10
왜 류영모는 광주에 가서 살고싶어 했나

[다석 류영모 초상화.]


김정호에게 '양떼 목자(牧者)'를 권한 류영모

철학자 김정호(1931년생)는, 사귐을 함부로 넓히지 않았던 류영모에게는 각별한 사람이었다.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1년이나 무등산 산양목장에서 함께 기거했다. (함께 머무를 당시 목포대 교수였던 김정호는 타계했으며, 자세한 삶의 행적을 추적하기 어려웠다.)

무등산 양떼목장을 일으킨 윤영일(尹榮一, 1940~ )은 김정호의 매부(妹夫, 동생은 김옥)다. 그의 장남이자 양떼목장을 현재 운영하고 있는 윤영일의 장남 윤대원에게 김정호는 외삼촌이다. 윤영일은 20세 때인 1960년에 함석헌의 천안 씨알농장에서 생활한 적이 있고, 이듬해인 1961년에 류영모를 만나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류영모가 스스로가 명명한 '빛고을(광주)'로 내려가던 무렵은, 불미(不美)한 일로 제자 함석헌을 출교(出敎)시킨 뒤 그가 참회하고 스스로를 바로잡아 돌아오기를 속으로 기다리며 살아가던 때였다. 그를 따르던 제자 김정호가 문득 찾아왔다. 대학 교수를 그만둔 뒤 스승을 뵙고 싶어 왔다고 하였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 출신으로 지도교수가 박종홍이었다. 김정호는 류영모에게 미국 하버드대학으로 유학을 갈 계획을 밝혔다. 박종홍 교수가 추천서를 써주었다고 했다. 류영모는 공부를 더 하겠다는 제자를 격려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문득 김정호에게 말했다. "미국 유학도 좋지만, 광주 무등산에서 목장 일을 해보는 것은 어떤가요." 스승의 갑작스런 말에 김정호는 "목장을 꾸리려면 돈이 많이 드는데, 지금은 여유가 없어서..."라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류영모는 "그건 내가 해결해 주리다, 우선 이 집터를 담보물로 내놓고 은행에 융자를 받아서 목장을 잘 운영해 보세요"라고 말하면서, 가지고 있던 돈도 내주었다. 류영모는 책들도 가능한 만큼 구입해 목장으로 부치기로 했다. 유학을 가려던 김정호는, 류영모의 제안에 톨스토이가 꿈꾸던 것처럼 온몸으로 노동을 하는 농부의 생활을 선택했다.

류영모는 왜 제자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해주면서 유학 대신 농업을 하도록 권했을까. 그는 김정호가 '머리'로 죽은 지식을 외며 철학을 하는 것보다, 땀흘리는 삶 속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닐까. 제자에게 신앙적 은유가 아닌 진짜 '양떼 목자(牧者)'를 실천하도록 한 일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류영모는 아예 구기동을 집을 팔고 자신도 광주로 내려가 김정호와 이웃해서 살고자 했다. 이곳으로 이주해왔던 1930년대엔 북한산 아래 이 집이 시골이고 전원(田園)이었지만, 갈수록 도시의 잡답(雜沓)이 짙어가는 데 대한 불편 때문이었을까. 당시 자식들도 모두 저마다 다른 곳에서 살고 있기에 움직이는 일도 가볍게 여겨졌을 것이다. 첫째아들 의상은 미국에 이민을 갔고, 둘째 자상은 평창에 농사를 지으러 갔으며, 셋째 각상은 일본에 있었다. 그는 이런 뜻을 류영모의 YMCA강의를 듣던 제자 전병호(全炳浩)에게도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겨레의 살 길이 빛고을에 있는 듯하니, 그곳에 내려가 같이 사는 것이 어떤가요?" 그러나 이런 류영모의 계획은, 부인 김효정의 강력한 반대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당시 김정호가 '무등산 산양목장'을 운영하던 때의 르포기사(1971년 조선일보 신춘화보)가 다행히도 남아있다.

"해발 4백 미터의 무등 중턱의 산양 떼, 목동 겸 주인이기도 한 김정호(41, 전남대 교수)씨는 손짓을 하며 양떼를 모은다. 간판도 없는 무등 목장 능선이 연접한 초원 9만 평에 산양 170마리, 70마리 재래종은 육종으로 쓰이고 자넨 종 1백 마리는 유용(乳用)이다. 김정호씨의 산양목장은 13년 전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은 것이 인연이었다. 임야 42정보를 사들이고 국유 임야 1백 정보를 대여받아 그 가운데 완경사를 초원으로 일구었다. 30도의 비탈에 잡초를 베어 내고 이테리 마이그리스 테드 크로바를 심었다. 산양 수는 10여년간 170마리 선을 유지하고 있다. 더 많아도 기르기가 힘들다는 것. 해마다 새끼는 140마리쯤 낳지만 50마리는 농촌진흥원에 분양해 주고 몇 마리는 도둑 맞고 나머지 50마리 정도는 시장에 판다. 1년에 도둑 맞는 것이 40~50마리는 된다고 김씨는 안타까워 한다."

'중용' 학자 박종홍의 제자와 함께 한 1년

류영모는 이 목장에서 1년을 머물면서 '중용(中庸)'을 우리말로 옮긴다. 왜 하필 중용이었을까. 여기에 김정호와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정호는 서울대 박종홍 교수의 애제자였다. 박종홍은 한국의 '중용' 연구의 권위자다. 그의 '천명(天命)사상' 관련 글들은 이 방면에서는 필독의 저술이다. 다석 또한 이 글을 읽었을 수 있으며, 철학자가 이해하는 중용과 신학사상가가 읽어낸 중용의 차이를 새겼을 것이다. '중용' 연구학자의 제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중용을 전혀 새롭고도 '참'을 향한 통찰로 풀어내고 있는 류영모의 모습을 생각하는 일은, 그래서 더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박종홍의 '중용의 사상'이란 글에는 놀라운 주장이 보인다. 이 탁월한 경전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이론을 제시했지만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실천과학에 관한 이론을 좀더 분석 전개하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중요한 사상이 좀더 여러 조건 밑에서 어떻게 때를 따라 그 경우에 의해 다르게 전개되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불만이다. 그러나 그는 이 실천과학을 '주역(周易)'에서 찾아냈다. 주역의 변역(變易, 변하여 바뀜)에 관한 서술이 바로 그것이라고 본다. 박종홍은 이런 예를 든다.

"가령, 건괘 하나를 보더라도 그 효사가 '초구는 잠룡이니 물용(勿用)이라'하여 미급시(未及時, 미치지 못할 때)의 태도로서 취할 바를 말하는가 하면 꼭대기의 '상구는 항룡이나 유회리라'고 하여 초과의 그릇됨을 경계하고 있다(필자가 좀 설명을 보탠다면, 물에 있는 용은 아직은 쓰임이 없으니, 그런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를 말하는가 하면, 솟아오르는 용은 뉘우치는 일이 생긴다고 하여 지나친 일이 잘못을 빚을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역 전체의 논리가 중용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길하리라, 흉하리라, 또는 무구(无咎, 허물이 없음)하리라 하는 등등의 표현이 우연한 점사라기보다도 중용의 견지에서 맞고 안 맞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인 줄 안다."

이런 관점에 따라 그는, 중용은 유교철학의 개론이며, 주역은 그 각론이라고 주장한다. 주역은 중용사상을 여러 경우에 있어서 전개시킨 것, 그것의 철학적 해명을 시도한 것이라는 얘기다. 세상의 바뀜은 처음엔 생각도 드러내지 않고 낌새도 보이지 않고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感應, 감지하고 반응함)하는 바가 있으면 드디어 천하를 움직이는 이유와 통하게 된다는 주역의 정신이야 말로, '끝없는 정성을 기울여 살아가는 일'(誠敬)과 '홀로 있을 때 스스로 삼가는 일'(愼獨)의 중요성을 생생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드러나지 않았을 때, 투철하게 알맞음을 추구하는 일이 바로 중용의 취지다. 박종홍은 우리 겨레가 중요하게 생각해온 '멋'이라는 가치 또한, 삶의 알맞음을 추구하는 중용가치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멋이란 때와 장소와 사물과 우리의 모든 것이 호흡이 맞았을 때 드러나는 '멋드러짐'이다. 이것이 바로 삶 속의 중용을 실천하는 방식이라고 본다. 우리 겨레가 '중용'을 삶 속에 적용하고 있는 뛰어난 민족이라는 것이다. 

'없이 계시는' 신은, 가운데에 있다

박종홍이 말한 '중용'의 관점은, 류영모의 사상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틀이 된다. 류영모는 '중(中)'이 하느님이라고 했다. 중용의 중(中)이 의미하는 '가운데'나 '알맞음'이 가치가 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하느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운데'나 '알맞음'을 제대로 쓰는 것이 얼나의 길인 까닭은, 신(神)이 '없음'으로 존재하는 그 대의(大義)를 따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중용(中庸)을 '줄곧 하느님과 뚫려있음'으로 풀었다. 신은 가운데에 있으며 알맞음에 있으며 물질세계의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세계를 품고 있는 거대한 절대세계의 존재방식인 '중(中)'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中)'이야 말로 없는 것이며, 그렇지만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멋'이 그런 것처럼, 알맞음은 삼라만상의 모든 변화 속에서 없음으로 존재한다. 그것이 보여졌든(旣發) 아직 드러나지 않았든(未發), 중(中)은 본질로 존재하고 세상의 바뀜 속에서 천하를 움직이는 이유로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신의 모습이며 신의 숨결이다. 류영모는 신이란 '항상 깨달음의 상태에 있는 그 완전함'을 말한다고 했다. 

한편 김정호는 이 목장을 제대로 꾸려가는 일에서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류영모의 지원에도 경제적 수지를 맞추지 못하고 어려워하던 김정호는 목장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목포대 교수로 간다. 하지만 김정호는 무등산의 무등(無等, 차등 없는 탁월)함을 거닐었던 류영모에게, 중용의 깊은 영감을 주었고, 하느님을 동양의 핵심 경전 속에서 뚜렷이 친견하는 시간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류영모는 광주를 좋아했다. 그것을 빛고을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부른 것도 그런 마음이 우러나온 결과였다. 함석헌은 스승이 지은 빛고을이란 말을, 즐겨 사용함으로써 대중적인 낱말로 만들었다.

그가 '빛고을'이란 말을 쓴 까닭은, 단순히 자연의 빛이 고운 마을이란 보편적인 의미가 아니라, 얼의 빛이 빼어난 영적 도시(靈的都市)라는 특별한 뜻을 담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이세종, 최흥종, 이현필로 이어지는 호남 영맥(靈脈)이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세계적인 정신으로 발흥(發興)한 곳으로, '금욕적이면서도 자기희생적이며 또한 실천적인 기독교 운동'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광주에서 살고 싶어했으며, 광주의 영성(靈性)을 특별하게 여겼다.

그는 무등산(無等山)을 '없등(업등)뫼'라고 부르기도 했다. 무등(無等)이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가장 높은'이란 뜻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높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의 등급이 없는 평등과 초월의 정신을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업등'은 어린 아이를 업으려 어머니가 내민 평평하고 널찍한 등이다. 품보다 넓은 등이 바로 '업등'이다. 빛고을과 없등뫼는, 광주의 높은 '종교성(宗敎性)'을 함축한 낱말이 아닐 수 없다.

다석이 남긴 무등산 시편

류영모는 무등산 목장에서 몇 편의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 無等 雪景(무등 설경, 무등에 눈 내린 풍경)

雪杜山門往來絶(설두산문왕래절)
空瞰市街乾坤隔(공감시가건곤격)
敬直靜安自若處(경직정안자약처)
會離不二致格物(회리불이치격물)

눈에 막힌 산문에 발길 끊어져
위에서 본 시장과 거리가 하늘과 땅 사이처럼
예의 바르고 고즈넉하니 저마다 태연한 자리
만남과 헤어짐이 같으니 만물이 제 자릴 찾았네

▶ 望雲(망운, 구름을 보며)

無等上半被天雲(무등상반피천운)
其像恰似羊且牛(기상흡사양차우)
羊乎牛乎千也萬(양호우호천야만)
人子牧之氣運元(인자목지기운원)

무등산 상반신은 하늘구름 입었네
그 모양이 흡사 양과 소 닮았네
양이며 소며 천 마리 만 마리
하느님 아들이 이끄는 솜씨가 으뜸이네

▶ 光州(빛고을)

朝朝霧騰無等山(조조무등무등산)
夜夜曠注光州市(야야광주광주시)

아침마다 안개 피는 무등산이요
밤마다 빛이 내리는 광주시로다

[시 읽기] '무등에 눈 내린 풍경'이란 시는 산 위에서 조감도 같은 광주의 시장과 거리를 보며, 격물치지(사물의 알맞음을 통해 신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의 감흥을 읊었고, 무등산에 피어오른 구름을 보며 쓴 '망운'에서는, 양과 소를 이끄는 목자인 인자(人子, 그리스도)를 떠올렸다. 제자 김정호가 양떼 목자인 것을 함께 은유했을 것이다. 또 '광주'라는 시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말씀씀이가 아름답다. 아침엔 무등산의 '높이 없는 높이'를 보고 신을 느꼈고, 밤엔 별빛이 내리는 빛고을을 보며 얼나를 살폈던 류영모였다.

최흥종,허백련,류영모의 만남

1962년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있는 춘설헌(春雪軒)에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오방 최흥종(1880~1966)과 의재 허백련(1891~1976), 그리고 다석 류영모(1890~1981)였다. 류영모는 당시 후두결핵으로 제중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이현필을 문병하려고 광주에 내려갔다가,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1970년대 초 무등산 춘설헌에서 서화작업을 하는 허백련.[의재기념관 제공]]

류영모 전기(傳記)를 세심하게 기록한 수제자 박영호는, 광주 이야기의 말미에 이 장면을 그려놓았다. '도심과 동심이 살아나 무등산에 산울림이 퍼지도록 재담과 웃음을 꽃피웠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에 대해선 더 언급이 없다. 하지만 이 대목은 문득 후인(後人)의 마음을 건드린다. 어떻게 세 사람이 만나게 되었을까. 류영모보다 열 살 위인 최흥종, 한 살 아래인 화가 허백련.

이현필이 류영모를 만난 건, 1936년에서 1938년까지 2년여간 서울로 올라와 있던 시절이었다. 20대의 이현필은 40대의 류영모가 YMCA에서 하는 강의를 들었다. 이현필이 최흥종을 만난 건 1932년이었다. 천태산의 성자로 불렸던 이세종의 가르침을 받고 있을 때, 최흥종이 그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19세 이현필의 뛰어남을 본 최흥종은 그를 농업실수학교 기숙사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해준다.

류영모가 이현필을 다시 제대로 만난 건, 1946년 광주YMCA 강연을 갔을 때다. 당시 광주YMCA이사회장은 최흥종이었다. 이렇게 하여 류영모는 광주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게 되었고 이현필과 최흥종의 삶과 사상과 신앙수행에 관한 관심이 깊어진다.

허백련은 소치 허련(허유라고도 한다, 1808~1893) 집안의 종고손자(從高孫子)다. 허련의 아들인 허형에게서 그림을 처음 배웠다. 허련은 조선 말의 천재지식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아꼈던 제자로 유명하다. 그러니까 허백련은 추사의 핵심 제자를 고조 할아버지로 둔 사람이며 허련이 짓고 기거했던 운림산방에서 허련의 아들에게서 그림을 배운 것이다.

다도(茶道)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는 1946년 무등산의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차렸다. 다원에서는 춘설차(春雪茶)를 생산했다. 춘설헌은 허백련이 광복 이후부터 타계할 때까지 머물렀던 서실(書室)이다. 춘설차를 마시는 마룻방이란 뜻으로 그렇게 이름지었을 것이다. 그는 타계 이후 이 서실 뒤편에 묻힐 만큼 이 서실에 마음을 두었다.

해방 이후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는 삼애학원이라는 농업전문학교가 세워졌다. 최흥종이 허백련과 뜻을 모아 만든 학교다. 최흥종과 허백련은, 세상을 구하는 일로 서로 마음이 통하여 깊이 교류했던 사이였다.
 

[오방 최흥종]

1962년 춘설헌에서 만난 세 사람은, 그런 인연의 징검다리를 통해 함께 모이게 된 것이다. 최흥종이 류영모에게 청하여, 춘설헌의 허백련을 만나기를 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나환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방 최흥종은, 1933년 '나환자 구하기 도보행진'을 벌여 조선총독부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의 응답을 받아낸 사람이다. 평생 빈민운동과 독립운동을 했던 고결한 삶을 살았고, 한국 최초의 나환자병원인 광주나병원을 설립하기도 했다. 허백련은 동양화 근대 6대가에 꼽히는 화인(畵人)으로, 작품활동과 함께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농업을 살리는 일에도 앞장섰고, 차(茶) 문화의 보급에도 힘을 기울였다.

82세의 '위대한 실천가' 최흥종, 71세의 동양화 거장 허백련, 그리고 72세의 류영모.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마음껏 무엇인가를 하여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 경지)의 경계를 넘어선 세 사람이, 춘설차를 앞에 두고 아이처럼 웃으며 나눴을 대화는 무엇이었을까. '없등뫼' 자락에서 거리낄 것도 없고 덧댈 것도 없는, 홀연한 삶의 한 경지를 공유했을까. 이윽고 저마다 삶의 헛된 허물을 벗어낸 지금, 그 무등삼소(無等三笑, 차별도 구별도 없는 세 사람의 웃음)는 뒷사람의 귓전에 청아한 그리움 같이 잠깐 머무는 것이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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