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웅 칼럼] 위기의 민주주의 시대, 트럼프는 떠나도 트럼피즘은 살아남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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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웅 편집인
입력 2020-11-1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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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웅 아주경제 편집인]


“이번 대선에서 각 후보가 7000만표 이상을 얻은 선거 결과는 국가가 아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이다. 오바마는 최근 CBS 뉴스의 게일 킹과 인터뷰하면서 "이 같은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우리(미국)가 여전히 깊게 분열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서로 완전히 다른 사실에 기반해 각각 주장을 펼친다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세 번째 회고록 '약속의 땅' 발간을 앞두고 일련의 인터뷰를 진행 중인데, 역사학자 데이비드 오루솔가와 한 인터뷰에서는 "미국은 매우 분열되어 있으며 내가 처음 대통령선거에 나선 2007년과 당선된 2008년보다는 확실히 더 분열됐다"고 말했다. 그는 분열의 일부 책임이 "정치적으로 득이 된다고 판단해 분열을 부채질한 현재의 대통령에게 있다"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했다. 하지만 오바마 전 대통령은 이 모든 책임을 트럼프에게만 넘기지는 않았다.

오바마에 따르면 미국의 분열은 트럼프 대통령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계속될 것으로 우려된다. 오바마는 미국을 분열시킨 가장 큰 요인으로 '광적인 음모론'과 '진실의 쇠퇴(truth decay)'를 꼽았다. '진실의 쇠퇴'는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가 "미국인의 공적 생활에서 사실과 자료의 역할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제시한 개념으로, '사실과 자료에 근거한 분석에 이견이 늘어나고 사실과 의견 사이 경계가 흔들리며, 의견과 개인적 경험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증가하고 과거엔 존중받았던 사실의 출처에 대한 신뢰가 저하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번 미국 대선은 ‘트럼피즘’이라는 새로운 정치 트렌드가 등장해 미국을 이념적으로 두동강내는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이런 이념적 대결은 앞으로도 미국 정치사를 장식하는 주요 장치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가 얻은 7300만표 바이든의 7800만표만큼이나 위력적···

오바마의 지적처럼 이번 대선에서 승리자인 바이든이나 패배자(아직 패배를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인 트럼프가 얻은 7000만표 이상은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많은 표이다. 물론 그만큼 투표율이 높기는 했다. 2012년 대선에서 오바마는 6500만표를 얻어 당선됐고, 2002년 부시는 6200만표로 대통령이 됐다.

게다가 대통령선거와 함께 치러진 미국 양원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약진한 것을 보면 트럼피즘의 위력이 여전히 살아있는 불씨임을 증명해준다. 온라인 음모론그룹 ‘큐어넌’을 지지해온 마조리 테일러 그린, 25세의 젊은 ‘트럼피즘’ 추종자 매디슨 코손,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도 모두 의회에 진입하거나 자리를 유지했다.

정치 평론가 제니퍼 루빈은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트럼프의 집권 직후인 2017년, 혐오 범죄는 전년 대비 17% 증가했다며 트럼피즘이 미국사회에 미친 해악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칼럼에서 "공화당원들은 소수 집단이나 여성에 대해 덜 지지하며, 미국을 세계 사회에서 격리하려는 성향이 강하다"면서도 "문제는 그들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반지성주의의 대명사 트럼피즘의 뿌리는 2008년 금융위기.

미국은 물론 전 세계 정치지형을 뒤흔든 ‘트럼피즘(Trumpism)'의 정체는 무엇인가. 

‘트럼피즘’은 당연히 2016년에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과정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말인데, 이제까지의 공화당 이념과는 달리 반세계화, 아메리카 퍼스트, 반공주의 등을 내세우지만 무엇보다 반지성주의적이라는 측면에서 아주 특징적이다. 트럼피즘은 트럼프에 대한 비판을 조금이라도 하면 그 이념적 기본이 보수주의라고 해도 모두 ‘이단’으로 몰아세운다.

사실 트럼피즘은 2008년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결집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10년에 있었던 일이다. 미국의 보수성향 유권자 모임인 '티 파티(Tea Party)' 시위대 1000여명이 워싱턴 DC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개혁과 증세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 시위대는 "오바마이즘: 미국 급습", "우리는 당신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아니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서 세금인상 움직임에 강력한 항의를 표시했다. 이들은 또 오바마 대통령을 자유와 미국의 삶의 방식을 무너뜨리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면서, 현재 자유가 위협받고 있고 건강보험개혁법은 헌법에 어긋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CBS와 뉴욕타임스의 공동여론조사에서는 공화당 지지자이면서 나이가 45세 이상인 백인들이 티 파티 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도 의료서비스에서 소외되지 않게 한다는 오바마케어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미국 의회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진 카바야시 미에코 교수는 니혼게이자이(닛케이)와의 인터뷰에서 오바마 전 정부 때인 2010년 민주당이 단순 과반으로 통과시킨 ‘오바마케어’가 미국사회 분열의 핵심적 원인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전통적으로 미 상원은 예산을 심의할 때 전체 100석 가운데 60표의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민주당은 ‘부자들의 부담이 늘어난다’는 공화당 반발에 번번이 가로막히자, 단순 과반수 51표 가결방식인 화해조정을 통해 오바마케어를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오바마케어는 미국 내 3200만명의 저소득층 무보험자를 건강보험에 가입시키고 중산층에 보조금을 지급해 의료비 부담을 낮추고자 하는 정책이다. ‘티 파티’ 등이 문제를 삼는 대목은 대다수 국민에게 2014년까지 건강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벌금을 부과한다는 대목이었다.

보수 극우진영에서는 오바마케어가 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수 있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게다가 벌금까지 물린다는 점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요즘 코로나가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주장하면서 연일 시위를 벌이는 미국 등 서구사회의 풍경을 보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번 대선 기간 중에도 트럼프는 민주당이 집권하면 세금폭탄을 피할 수 없다고 줄기차게 주장했다. 극우단체 ‘티 파티’는 미국 독립운동의 단초가 되는 조세저항운동에서 이름을 따왔다.

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오바마 행정부는 대졸 이상 고학력 대도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화, 개방주의, 인종차별 철폐 등 진보적 정책을 펴나갔지만 정작 미국 전통 산업에 매달려 있는 저소득 백인층을 등한시한 것이 트럼피즘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직전 대선에서 탄광촌을 찾은 힐러리는 “앞으로 이런 어두운 지역은 다 없어질 것”이라고 대안 없이 엉뚱한 유세를 한 반면, 트럼프는 ‘청정석탄’이라는 말도 안 되는 구호를 외쳐 탄광 노동자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힐러리는 ‘월가의 대변인’이라는 낙인에 시달려야 했다.

‘민주주의는 피가 아닌 돈을 먹고 자란다’··· 바이든 정부의 성공여부도 경제에 달려···

올 초 BBC방송은 “선진국 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지난 25년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진이 발표했다”는 뉴스를 전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로베르토 포아는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는 불만에 찬 상태"라고 말했다. 연구를 실시한 케임브리지대학교 미래민주주의센터는 1995년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을 추적했는데, 2019년의 불만족 비율은 48%에서 58%로 상승해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포아 박사는 또 "저희는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시간이 지날수록 증가했으며 현재 불만이 역대 최고 수준에 달했다는 걸 발견했다. 선진국에서 더욱 그렇다"고 밝혔다. 특히 1995년부터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 미국인의 민주주의에 대한 만족도는 75%에 달했지만, 2008년 이후 49%로 크게 떨어졌다.

트럼피즘은 이 같은 환경에서 이미 싹트기 시작했고 여전히 유효한 집단 이데올로기에 등극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보수 성향 뉴욕포스트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없는 트럼피즘’을 공화당의 차기 대선 승리 공식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대선에 불복하거나 2024년 대선에 다시 출마할지 아니면 트럼프 개인이 그저 역사 속으로 사라질지 누구도 예단하기 어렵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트럼프가 지난 4년간 미국 정치에 남긴 유산 ‘트럼피즘’이 역사 속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에 있다. 지속되는 경제위기와 위기를 해결하는 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음해를 받는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감 등이 트럼피즘을 새로운 이념적 진영으로 완성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공교롭게도 미국경제는 트럼프 집권기간 중 2017년 2.4%, 2018년 2.9%, 2019년 2.2%로 견고한 성장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올해 코로나 직격탄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해진 것도 트럼프의 대선 패배에 한몫했을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의 전망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피즘이라는 특수 이데올로기와 싸워 미국 사회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으려면 경제, 특히 내수를 살려내야 한다. 하지만 오바마의 정책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이 대안이 될지는 좀 더 심사숙고가 필요할 것이다. 오바마 정책이 바로 트럼피즘을 키워냈다는 분석을 소홀하게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이든이 얻은 7800만표가 트럼프의 7300만표보다 많으니 ‘반트럼프 정책’을 밀어붙여도 된다는 셈법도 일리는 있지만 어쨌든 그리 되면 미국의 분열을 막기는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

사실 모든 복잡한 정치분석은 경제성적표 앞에서는 그저 초라해질 뿐이다. 미국의 분열에 대해 오바마의 주장처럼 단순히 ‘진실의 쇠퇴’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책 속에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외침을 발견할 수 있지만, 최근 흐름를 보면 “민주주의는 돈을 먹고 자란다”는 해석이 그럴듯해 보인다. 때문에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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