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 천주학과의 운명적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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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20-01-1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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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정약용과 형제들이 천주학을 만난 마재성지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그렇다면 영혼은 불멸하다는 말이군요.”
“그렇지. 천주님은 사람에게 생혼과 각혼을 영혼과 함께 주셨고 거기에다가 영혼 불멸의 축복까지 주셨네.”
“영혼이 불멸하다면 오늘 저녁 형수님께서는 제상을 받으셨군요.”
“그래서 나도 누님을 뵈오러 이렇게 오지 않았는가.”
소설가 황인경이 <소설 목민심서>에서 정약용과 천주교의 첫 만남을 묘사한 대목이다. 1784년 4월 어느날, 남양주 마재마을 가까운 한강 두미협(斗尾峽. 지금의 팔당댐 근처). 이곳을 지나던 한 척의 배에서 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 형제가 사돈 이벽(李蘗)으로부터 천주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서학(西學) 즉 천주교와의 만남은 정약용의 삶에 있어 가장 운명적인 순간 가운데 하나다. 그 후 정약전 정약종(丁若鍾) 정약용 형제는 한양의 명례방(지금의 서울 명동)으로 자리를 옮겨 이벽, 이승훈(李承薰), 권일신(權日身) 등과 천주교에 대해 지속적으로 토론했다. 이듬해인 1785년 이들은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설을 듣다가 발각되었다.
 

1784년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있었던 천주교 모임. 이 자리에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가 모두 참석했다.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이벽. [화가 김태 그림]


이른바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 추조(秋曹) 즉 형조(刑曹)에서 천주교도들의 비밀 신앙집회를 적발한 사건이다. 1784년 베이징(北京)에서 천주교에 입교하고 귀국한 이승훈이 이벽, 권일신 등 10여 명과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가져오다 1785년 봄 도박을 단속하기 위해 순라(巡邏) 돌던 포졸들에게 적발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조정에서는 천주교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정약용에게도, 19세기 조선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정약용은 벼슬길에 오른 뒤 서학과 거리를 두었다. 그가 천주교에 거리를 둔 결정적인 계기는 진산사건(珍山事件)이었다. 추조적발사건이 일어나고 6년이 흐른 1791년, 전라도 진산(珍山․지금의 충남 금산)에서 윤지충(尹持忠)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인 윤지충은 어머니의 상(喪)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 그러다보니 어머니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했다. 천주교 서적의 수입을 금하고 윤지충을 전주감영에서 참수형에 처했다.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다.

한국에서 아름다운 건물로 손 꼽히는 전동성당은 윤지충이 참영을 당한 자리에 세워졌다. [사진=천주교주교회의]


 제사 거부 받아들이기 어렵고 집안 멸문될까 두려움 컸다

정약용은 천주교가 아무리 평등하고 개방적인 사상이라고 해도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이념이 아무리 옳다고 해도 한 나라 한 민족의 전통을, 그것도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부정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약용은 또 천주교로 인해 자신의 집안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기에 정약용은 일부러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정조와 정약용을 음해하고자 하는 세력들, 서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공서파(攻西派)는 천주교를 들이대며 정약용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정약용은 수시로 자신이 천주교를 배교(背敎)했음을 보여 주어야 했다. 1797년 정약용은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배교 사실을 공개했다.

1979년 정조에 고백상소 올려 "천주교 배교했습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서학은 대단히 매력적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철학이자 종교였다. 지배 계층, 양반 계층은 서학을 우리 전통 미풍양속과 성리학적 세계관을 망가뜨리는 악으로 보려 했다. 하지만 정조의 생각은 달랐다. 정조는 ‘무리하게 다스리지 말고, 정학(正學) 즉 성리학이 바로 서면 사학(邪學) 즉 서학이 자연스럽게 소멸한다’고 생각했다. 정조의 이러한 생각을 ‘부정학(扶正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학을 도와 사학을 예방한다는 것이다.

마재성지에 있는 한복 입은 성모상. [사진=이광표]


정조는 부정학의 신념으로 정약용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정조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지배 계층의 부정적인 인식이 워낙 강경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대반전이 일어났다. 조정은 강경한 척사(斥邪)로 돌아섰고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천주교 대박해가 시작되었다.
정약용이 진정으로 천주교를 배교한 것인지, 단언할 수는 없다. 가족과 가문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여튼, 배교 선언에도 불구하고 서학과 맺었던 인연은 결국 정약용에게 시련으로 돌아왔다. 정약용이 그 상황을 예견하고 절연(絶緣)까지 했지만, 시련을 피해가기에 정약용 형제들과 천주교의 인연은 너무 깊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 영세자인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결혼했다. 그는 1784년 중국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해 서울 명례방에서 한국 천주교회를 세웠다. 그리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참형을 당하고 순교했다.
정약용의 맏형은 정약현(丁若鉉. 1752~1821)이다. 정약현의 부인의 동생은 이벽이다. 이벽은 초창기 한국 천주교 전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조선 천주교 교단 조직을 결성해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정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약현은 훗날 백서(帛書) 사건의 주인공인 황사영(黃嗣永)을 사위로 들였다. 그러나 정약현은 끝까지 천주교와 거리를 두었다.
정약용 형제의 둘째는 정약전이다. 천주교를 신봉했고 1801년 신유박해 때 흑산도로 유배를 갔으며 그곳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했다.

 정약종이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초기 천주교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00년경 필사했고 1860년애 목판본으로 간행돼 널리 전파됐다. 


셋째는 정약종이다. 정약용 형제 가운데 천주교 전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인 정약종은 1800년경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책을 저술했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정리한 천주교 교리서로,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은 천주교가 보통 백성들 속으로 파고 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정약종은 천주교의 교리를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책을 쓸 수 있었다. 또한 평신도 모임을 이끌어 천주교의 대중화와 일상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정약종의 부인 유조이, 아들 정하상(丁夏祥)과 정철상(丁哲祥), 딸 정정혜(丁情惠)는 모두 신유박해와 기해박해(己亥迫害․1839) 때 순교함으로써 정약종의 가족은 모두 순교자가 되었다.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 가운데 정하상은 1984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황사영 백서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사위였다. 황사영은 16세에 진사(進士)시험에 합격했다. 그런데 정약용 집안의 천주교 분위기에 젖어 들게 되었고, 처삼촌인 정약종의 절대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1790년대부터 천주교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1801년 백서를 작성했다. 그리곤 체포되어 참수를 당했다. 배교를 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나 정약용은 끝내 이 백서사건으로 인해 18년 유배를 떠나야 했다.
  

  마재성지에 설치된 정약종 초상[사진=이광표]


마재성지에 천주교 대중화 앞장선 정약종 등 자취 남아 

정약용 형제들과 천주교와의 만남은 시종 수난의 연속이었다. 운명적이지 않고선 이 같은 시련을 어떻게 감내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는 마재성지가 있다. 정약용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 남짓. 한국 천주교는 이곳 성지를 천주교의 요람으로 정해 정약용 4형제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특히 정약종 일가를 각별하게 기억한다. 마재성지 초입에는 한복 입은 예수상과 한복 입은 성모상이 있고 그 옆에 정약종의 초상화가 세워져 있다. 그 옆으로 아들 정하상과 정철상, 딸 정정혜 등의 모습을 표현한 초상화도 보인다. 정약용 형제들과 이 땅의 민초들의 모습을 그린 벽화도 단정하게 설치되어 있다.
마재성지 한쪽에 조성한 ‘십자가의 길’을 걷노라면 ‘잘린 발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보인다. 못 자국이 있어 예수의 발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걸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해진다. 그것이 예수의 발목이라고 해도 우리에겐 정약종의 발목, 정약용 형제의 발목, 민초 순교자들의 발목으로 다가온다.
마재성지의 키워드는 단연 순교이다. 여기서 순교는 애민(愛民)과 희생과 동의어일 것이다. 19세기 전후 격변기,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에서 간난(艱難)의 생을 보내야 했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같은 시대를 살아갔던 보통 사람들. 마재동산의 잘린 발목을 보며 그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어떻게 그 낯선 종교에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일까.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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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학예사 김형섭


<참고문헌>
1.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김영사, 이덕일
2.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박석무
3. 정약종과 초기 천주교회, 한국사상사학 18집, 조광
4. 흑산, 학고재,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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