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쟁 피바람 피해 낙향한 다산, 당호 '조심하는 집'이라 짓다

입력 : 2020-01-07 17:16

<19>다산 정약용 생가 여유당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그건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에게 청천벽력이었다. 슬픔이고 분노이고 또 두려움이었다. 1800년 6월, 정조(재위 1776~1800)가 승하했다. 19세기가 시작하던 첫해, 무수히 많은 개혁 프로그램을 남겨둔 채 개혁군주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대비 김씨의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시작되었다. 대비 김씨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였다. 권력은 당연히 정순대비 김씨의 외척을 중심으로 한 노론벽파(老論僻派)에게 넘어갔다. 정치는 격랑 속으로 빠져들 것이고 개혁은 후퇴할 것이 분명했다. 노론벽파와 경주 김씨 정순왕후 세력은 정약용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천주교와의 연루를 내세워 자신을 죽이려 할 것이라는 사실을 정약용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치 외풍 막아주던 군주 잃은 뒤···'생존'을 떠올리며 쓴 현판

정약용의 나이 서른여덟. 정조가 승하하고 그해 겨울 정약용은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로 낙향했다. 능내리의 당시 이름은 마현(馬峴·마재마을)이었다. 낙향을 두고 고민을 하고 말고 할 일도 아니었고, 머뭇거리고 말고 할 일도 아니었다. 한양에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한 자신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한양 땅을 찾지 않으리라, 죽을 때까지 고향땅을 지키겠노라 다짐을 하고 또 했다.
 

 다산이 지은 당호 '여유당(與猶堂)'의 편액. [강귀일 작가 제공]

그 무렵 정약용은 자신의 남양주 생가에 당호(堂號)를 붙였다. 당호는 건물의 이름을 가리킨다. 옛 사람들은 자신의 집이나 거주 공간에 멋지고 의미있는 이름을 붙였다. 정약용이 지은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여유당기(與猶堂記)’에 그 내력을 써놓았다.
“나의 병은 내가 잘 안다. 나는 용감하지만 무모하고 선(善)을 좋아하지만 잘 가려서 하질 못하며 마음이 끌리는 대로 곧장 나아가 의심할 줄도 두려워할 줄도 모른다. 그만둘 수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기쁨을 느끼면 그만두질 않는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그만두기가 꺼림칙하고 산뜻하지 않으면 그만두질 못한다.
그래서 어려서는 이단으로 치달리면서도 의심하질 않았고 장성해서는 과거 공부에 빠져 돌아보질 않았으며 서른이 지나서는 지난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선을 몹시 좋아했지만 비방을 유독 많이 받았다. 아아 이 또한 운명인가? 성품 탓이나 내가 어찌 감히 운명을 말하겠는가?
‘노자’에는 “머뭇머뭇하노라(與), 겨울 시내 건너듯. 조심조심하노라(猶), 사방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말이 있다. 아아, 이 구절은 내 병을 치료하는 약이 아니겠는가? 대개 겨울 시내를 건너려는 자는 추위가 뼈를 에듯 하므로 그야말로 부득이하지 않으면 건너지 않는다. 사방을 두려워하는 자는 엿보는 시선을 염려할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부득이한 일일지라도 하지 않는다.”

정조 승하 이듬해 18년간 유배···형 정약종 참형, 정약전 유배

여기서‘여(與)’는 머뭇거린다는 뜻이고 ‘유(猶)’는 조심조심한다는 뜻이다. 원래 여는 머뭇거림이 많은 동물의 이름이고, 유는 두려움이 많은 동물의 이름이라고 한다. 여유당은 그래서 머뭇거리고 조심하는 집이라는 뜻이 된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의 정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여유당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 경전에 나타난 예(禮)의 차이를 논해볼까 하다가도 생각해보니 하지 않아도 무방한 일이다. 하지 않아도 무방한 일은 부득이한 일이 아니다. 부득이한 일이 아니므로 그만둔다. 조정 관리의 시비를 논하는 상소문을 써서 올려볼까 하다가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는 남모르게 해야 하는 일이다. 남모르게 하려는 일은 마음에 큰 두려움을 느끼는 일이다. 마음에 큰 두려움을 느끼는 일은 그만둔다.…내가 이런 이치를 터득한 지 6, 7년이 되었다. 그 생각을 써서 거처하는 집에 현판으로 올리려다 잠시 생각해 보고는 그만두었다. 이제 소내(마재마을)로 돌아와 비로소 문 위에 여유당이라 써 붙이고 이름 지은 뜻을 기록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정약용은 논쟁 하나, 상소 하나에도 신중하고자 했다. 당쟁의 와중에서 정약용은 남인(南人)이었기에 특히 시파(時派)였기에 조심해야만 했다. 반대파의 위협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래도 정조가 막아 주었지만, 이제 그 방패가 사라졌다. 그래서 더욱 여유(與猶)로 살고자 했다. 겸손함과 동시에 생존의 지혜가 여유당이라는 당호에 집약되어 있다.

    마재의 다산 생가 '여유당' 전경. [사진=게티이미지 제공]


정약용은 결혼하고 서울로 떠나던 15세 때까지 남양주 여유당에서 살았다. 여유당은 깨끗하고 단정한데다 주변 풍광 또한 빼어나다. 지금은 이 마재마을의 정약용 생가 일대를 ‘다산 문화의 거리’라고 부른다. 거리 초입에는 정약용의 수많은 저술을 상징하는 조형물을 세워 놓았다. 그 옆에 정약용 박물관 역할을 하는 다산문화관이 있고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를 복원해 놓았다.
다산 생가 사랑채에 여유당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를 돌아 들어가면 안채가 나온다. 여유당 건물은 정약용의 삶만큼이나 담백하다.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다. 다산이라는 사람이 저랬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여유당은 다산을 닮았고 다산은 여유당을 닮았다.
여유당은 한강변에 있다. 정약용은 이곳의 한강과 함께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이름을 열수(冽水)라 부르기도 했다. 열수는 한강의 다른 이름이다. 정약용이 한강을, 한강물의 흐름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장우성 화백이 그린 다산의 표준영정. 직계후손 4명의 인상 특징을 반영했다. 그러나 다산은 외탁했던 모양이다. 다산은 '나의 정신이나 모습은 대부분 외가(윤선도 윤두서 후손)에서 받았다'고 했다. [한국은행 소장]


정약용의 예상대로 이듬해 1801년 시련이 닥쳐왔다. 그리곤 경상도 포항 장기를 거쳐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18년 유배 생활을 마치고 1818년 고향 남양주로 돌아온 정약용은 여유당에서 18년을 더 살았다.
정약용은 1822년 회갑을 맞아 자신의 묘지명을 미리 써두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묘지명을 많이 지었다. 이는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약용은 6남 3녀의 자식 가운데 4남 2녀를 어린 나이에 떠나보냈다. 정조를 보내드리고 형 정약종, 매형 이승훈, 외사촌 윤지충, 조카사위 황사영 등이 참형을 당했다. 형 정약전마저 유배지 흑산도에서 끝내 생을 마쳤다. 그렇기에 정약용은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자찬묘지명은 “이것은 열수(冽水) 약용의 무덤이다. 자는 미용(美庸), 호는 사암(俟菴)이다…약용은 어려서 매우 영리했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했다”로 시작한다. 중간에 이런 대목도 있다.“약용의 사람됨은 착한 일을 즐겨하고 옛것을 좋아하며 과감히 실천하고 행동했다. 마침내 이 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마음속에 원망과 후회가 가득 쌓였다…마침내 긴요치 않은 일을 씻어버린 뒤 밤낮으로 자기성찰에 힘써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회복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어그러짐이 없길 바란다.”

직접 쓴 묘지명엔 삶에 대한 자부심, 정조에 대한 그리움 묻어나

정약용의 ‘자찬묘지명’엔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 정조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묻어난다. 천주교로 박해를 받은 것의 부당함과 그 억울함도 드러냈다. 정약용은 그러나 자신의 이런 호소가 당대에 받아들여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글과 생각이 살아남아 역사를 증언하리라고 믿었다. 지금 나의 억울함을 해결하려는 집착이라기보다는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되 앞날을 기약하는 현명함과 대범함이라고 할까.
1836년 2월, 정약용은 결혼한 지 60년을 맞았다. 회혼일(回婚日)을 사흘 앞두고 결혼생활을 돌아보며 시를 썼다. ‘결혼 생활 60년 잠깐 흘러가고/ 복숭아나무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구나/ 생이별이나 사별 모두 사람을 쉬 늙게 하지만/ 슬픔은 짧고 기쁨은 오래 가니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노라.’

여유당 바로 뒤 언덕에 있는 다산 부부의 합장묘. [유대길 기자]


사흘 뒤 정약용은 회혼례를 열었다. 그런데 그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14세 때 한 살 연상의 풍산 홍씨를 아내로 맞았던 정약용. 친지와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회혼일에 세상을 떠나다니, 무언가 운명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약용이 세상을 떠나고 2년 뒤, 부인 홍씨는 여유당에서 생을 마쳤다. 그리곤 집 뒤편 언덕에서 남편 정약용과 합장(合葬)되었다.
여유당 건물 바로 뒤로 언덕 오르막길이 있다. 계단을 올라가면 거기 정약용 부부의 무덤이 나온다. 오르는 길목에 자찬묘지명을 소개해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무덤 앞에 서면 여유당이 내려다보인다. 여유당 건물은 뒤태도 반듯하다. 저 멀리 한강이 눈에 들어온다. 한강의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장엄하고 도도하다. 거기 정약용의 삶과 철학이 함께 흐르는 것 같다. <杓>
 [편집자 주]시리즈 표제인 '왕들의 길 다산의 꿈, 남양주를 거닐다'를 '왕들의 길 다산의 꿈, 조선眞景 남양주'로 바꿉니다.  남양주는 겸재가 그린 '진경 산수'의 요람이었음을 고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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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다산초당, 이덕일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박석무
다산문선, 솔, 정약용
다산의 마음, 돌베개,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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