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죽은자' '죽인자' 함께 묻힌 이곳

최윤재 논설고문입력 : 2019-12-10 16:59
무엇이 조광조를 죽였나…실패한 개혁이 묻는다

<15>기묘사화로 숙청당한 김식, 권력 탈환한 홍경주·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1519년(중종 14년) 11월 15일 밤, 경복궁 편전에서 중종의 갑작스런 하명이 떨어졌다. 놀라운 내용이었다.
“승정원에 숙직하던 승지 윤자임(尹自任) 공서린(孔瑞麟), 주서 안정(安珽), 한림 이구(李構), 홍문관에 숙직하던 응교 기준(奇遵), 부수찬 심달원(沈達源) 모두를 의금부 옥에 가두고 우참찬 이자(李耔), 형조판서 김정(金淨),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부제학 김구(金絿), 대사성 김식(金湜), 도승지 유인숙(柳仁淑), 좌부승지 박세희(朴世熹), 우부승지 홍언필(洪彦弼), 동부승지 박훈(朴薰)을 잡아 가두라.”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첫 장면. 심야의 기습이었고 정국에 파란이 일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폭적으로 신뢰했던 개혁 사림(士林) 조광조와 김식 등을 가차 없이 쳐버리는 순간이었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이 “벌이 과한데다 절차가 비합리적”이라고 반대했지만 중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묘사화로 인해 이상주의적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38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식의 묘표. 남양주 삼패동에 있다.[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중종은 “조광조 김정 김식 김구 등은 서로 붕당을 맺고서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며 끼리끼리 의지하여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고, 후진을 유인하여 궤격(詭激)이 버릇이 되게 함으로써 국론과 조정을 날로 어지럽혔다“고 죄목을 밝혔다. 신진 사림들이 당파를 만들어 상대를 배척하고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 김식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기묘사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 결과, 홍경주 남곤 등 훈구파는 승리했고 패배자 조광조와 김식 등은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다.
조선시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와 환국(換局)이 있었지만 기묘사화만큼이나 순식간에 대반전이 이뤄진 경우도 드물다. 중종이 사림 숙청에 적극 개입했는지, 아니면 소극적이었는지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중종은 신진 사림들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1515년부터 4년에 걸쳐 조광조 등 사림과 함께 거침없이 개혁정치를 펼쳐온 중종이었는데, 이 같은 변심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중종이 내세운 신진사류 축출 명분은 한마디로 과도한 당파성과 급진성이었다. 중종 역시 어느 순간부터 신진 사림의 과격한 개혁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1506년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1515년 무렵부터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했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림들은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강력하게 추구했다. 중종에게 철인(哲人)왕도정치 이론을 가르치며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여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을 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이상적이고 원칙적이다보니 신진 사림들은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다. 자신들과 뜻이 다르면 소인으로 지목하며 철저하게 배척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도학사상만이 선(善)이었다. 훈구파는 소인배요 개혁대상이었다.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갈등의 정점은 현량과(賢良科)와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이었다. 현량과는 그 절차가 매우 독특했다. 성품, 기국(器局·도량),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인재를 천거해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시가와 문장 즉 사장(詞章)중심의 기존 과거시험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는 취지였다. 현량과는 1519년 4월 한 차례 시행되어 김식 등 28명이 선발되었다. 그런데 합격자는 거의 모두 사림이었고 이들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의 요직으로 나아갔다. 개혁도 개혁이지만 신진 사림들이 현량과를 독식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림들은 삼사에 대거 진출했다. 훈구파의 경계심은 날로 커져갔다. 급진적인 개혁에 중종마저 불안감을 느끼며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몇 달 뒤 사림들은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질렀다. 이른바 위훈삭제 사건이다. 사림 중심의 삼사는 1519년 10월 말 중종에게 정국(靖國) 공신의 공훈을 삭탈할 것을 요청했다. 중종반정 공신 117명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도 없이 공훈을 받았으니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해 작위를 삭탈하고 전답과 노비를 모두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훈구파와 핵심 홍경주에 대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중종과 대신들은 반대했지만 사림파 삼사는 집요한 주장 끝에 11월 11일 중종의 윤허를 받아냈다. 사림들의 개혁 행보는 승승장구였다.

 1506년 홍경주가 정국공신으로 책록됐을 때 하사받은 공신상(功臣像)
을 18~19세기에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경기도박물관 제공]


위협을 느낀 홍경주와 훈구파가 가만있을 리 만무했다. 반전의 토대를 위한 음모가 기획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이다. 당시 홍경주의 딸은 중종의 총애를 받았던 후궁 희빈 홍씨였다. 훈구파는 이런 이점을 적극 활용해 희빈 홍씨를 끌어들여 중종과 조광조를 이간질했다. 또한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도록 한 뒤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주었다. 走와 肖를 합치면 趙자가 된다. 조씨 즉 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믿음이 심히 흔들렸다.

 


결국, 위훈삭제 불과 나흘 뒤인 11월 15일 밤, 전격적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중종은 밀지를 내리고 야음을 틈타 홍경주, 남곤 등 주요 대신을 비밀스럽게 경복궁으로 불러들였고, 조광조 김식 등 사림의 핵심 인물들을 전격 체포했다. 사림파는 일거에 숙청되었다. 조광조는 화순으로 유배를 갔고 한 달 뒤인 12월 사약을 받았다. 불과 4년 동안의 관직생활이었다. 왕도정치를 향한 개혁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37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김식 김정 김구 윤자임 기준 박세희 박훈은 외딴 섬이나 변방에 안치(安置)되었다. 
남양주에 가면 홍경주(?~1520)와 김식(1482∼1520) 의 묘가 있다. 기묘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다시 장악한 홍경주, 그에 밀려 숙청당한 김식. 이들은 모두 남양주 땅 양지 바른 곳에 묻혀 있다. 두 사람의 묘소는 승용차로 불과 20분 거리.
연산군 시절 관직에 나아간 홍경주는 연산군의 폭정에 맞서 중종반정에 가담해 정국(靖國)공신 1등에 올랐다. 중종이 즉위하면서 도승지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과(李顆)의 난을 다스린 공로로 정난공신(定難功臣) 2등에 올랐다. 이에 힘입어 병조판서, 대사헌, 좌참찬(左參贊) 등의 요직을 지냈다. 훈구파 공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는 사림파 언관들의 공격으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절치부심 끝에 기묘사화를 이끌어 권력 탈환에 성공했고 다시 좌찬성을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다.

남양주 진건읍에 있는 홍경주 사당 도열사.[사진=김세구 전문위원]


홍경주의 묘는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다. 묘로 올라가는 길엔 그를 기리기 위한 사당 도열사(度烈祠)가 있고 거기 홍경주 신도비도 함께 서있다. 도열사 담장을 끼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쭉 따라 올라가면 정상에 그의 무덤이 나온다. 홍경주 묘 앞에는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가 낳은 봉성군의 무덤이 있다.
김식의 최후는 비극적이다. 성리학 공부에 매진하면서 벼슬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김식은 37세 때인 1519년 4월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면서 조정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당시 현량과 급제자 28명 가운데 유일하게 7가지 천거 항목에서 모두 완벽한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순식간에 곧바로 정3품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대사성에 올라 동갑내기 조광조 등과 함께 개혁정치를 이끌었다.
그러나 불과 7개월이었다. 기묘사화로 실각하고 절도안치((絶島安置)의 유배형을 받았다. 절도안치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으로 유배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의정 정광필 등의 도움으로 목숨만은 건졌고 경상도 선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섬으로 이배(移配)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곤 거창으로 몸을 숨겼다가 시 한 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남긴 절명시는 이렇다. ‘해는 저물어 하늘은 어두운데/산은 텅 비고 절은 구름 속에 있네/ 임금과 신하의 천년 의리는/어느 외로운 무덤에 있는가(日暮天含黑 山空寺入雲 君臣千載義 何處有孤墳)’.
  

청풍김씨 문의공파 묘역 계보도. 동심원처럼 구획화한뒤 한가운데에 김식 이름을 새겨 넣고 둥글게 돌아가면서 후대의 이름을 기록했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김식의 무덤은 남양주 삼패동 청풍 김씨 문의공파 묘역에 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곳, 능선 한쪽에 묘지가 있다. 그의 무덤 초입엔 돌에 새겨 놓은 계보도가 있는데 그 모습이 특이하고 인상적이다. 동심원처럼 원들을 그린 뒤 한가운데 김식의 이름이 있고 그 주변으로 장남, 차남, 3남, 4남, 5남의 이름이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다. 또 그 주변으로 다음대의 이름들이 계속 돌아가면서 새겨져 있는 모습이다. 언뜻 보면 옛 천문도 같다. 다시 눈여겨보니, 둥근 세상의 한 가운데에 김식이 있다. 그는 세상의 중심이고 새로운 방향의 시발점이다. 사림의 개혁 정신, 도덕적 이상주의를 다시 한 번 웅변하는 것 같다.
기묘사화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재산을 되찾았다. 사림파의 개혁을 평가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이 개혁을 너무 서두르다 일을 그르쳤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두고 후대 사람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 부른다. 그들의 현실 개혁은 실패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도덕적 이상주의의 가치는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는 의미다.<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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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기묘사화 전개과정과 중종의 역할, 이정철, 국학연구 34호
3.사화와 반정의 시대, 김범, 아카넷
4.조광조, 정두희,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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