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집안을 돕고 순장당한 明황제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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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19-11-26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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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누이 덕에 세조의 왕위승계를 승인 받아온 한확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 집필


약소국이 강대국에 여성을 진상하는 공녀(貢女) 제도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고려 충렬왕 때다. 몽골은 패전국의 여성을 전리품(戰利品)으로 챙겨 공신과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사기를 올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딸을 공녀로 보내지 않으려고 어린 나이에 시집 보내는 조혼(早婚) 제도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원나라 순제(順帝)의 기황후(奇皇后)는 고려 공녀 출신이었다. 원나라를 몽골 지방으로 내쫓고 건국한 명나라는 처음엔 공녀를 요구하지 않았으나 고려 공민왕 때 부활돼 조선까지 지속됐다. 명나라는 1408년(태종 8년)부터 1521년(중종 16)까지 거의 10여 차례 환관과 공녀를 요구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공녀 진상이 폐지됐다. 

다산 생가에서 멀지 않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陵內里)에는 봉분이 직방형(直方形)으로 조성된 특이한 무덤이 있다. 조선 초기 묘제이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묘소 앞에는 수령이 수백년 된 향나무가 서 있다. 능내리라는 지명도 그 무덤이 왕릉처럼 화려하고 커서 생겼다고 전해진다.

  봉분이 직방형으로 조성된 남양주 능내리 한확의 묘.[사진=김세구 전문위원]



무덤의 주인공 한확(韓確)은 조선 초기에 두 누이를 중국 황제의 후궁으로 보낸 덕에 태종 세종 세조 연간에 걸쳐 조선과 중국의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공을 세웠다. 명나라 3대 황제 성조(成祖‧영락제)는 정비인 인효황후가 죽자 평생 새 황후를 맞지 않았다. 한확의 누나 여비(麗妃)는 미모에 총명함과 덕성까지 갖춰 성조의 총애를 받았고 황후가 없는 궁중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가 태종이 곤경에 빠질 뻔한 일을 막은 내용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누나와 막내 누이 明 황제 후궁 간택

1417년(태종 17년) 공녀로 선발된 한씨, 황씨는 중국 사신 황엄, 남동생 한확, 황씨의 형부 김덕장, 두 공녀에 각기 딸린 시녀 6명, 환관 2명과 함께 북경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많은 구경꾼들이 나와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북경 가는 길에서 황씨가 원인 모를 복통을 앓았다. 수행하는 의원이 여러 가지 약을 써도 아무런 효험이 없어 밤마다 몸종이 배를 문지르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밤 황씨의 몸에서 나무토막을 가죽으로 싼 부인용 성인용품이 나왔다. 몸종이 측간에 버렸으나 시녀들 사이에 소문이 났다(세종실록).
 

조선에서 온 후궁 여비를 총애한 명나라 황제 영락제(성조) 초상.[베이징 톈탄(天壇) 소장]


나중에 이 같은 소문을 전해들은 황제 성조가 처녀가 아님을 따져 묻자 황씨는 “일찍이 형부 김덕장의 이웃에 사는 관노(官奴)와 간통했다"고 자백했다. 황제가 화가 나서 조선의 태종을 문책하는 칙서를 작성하려 들었다. 그러자 한씨가 “황씨는 사삿집에 있는 여자인데, 우리 임금이 숫처녀인지 아닌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애걸했다. 황제가 이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씨에게 황씨를 벌주라고 하자 한씨가 황씨의 뺨을 때리는 선에서 처벌이 끝났다.

한확은 누나를 자금성에 데려다주고 성조에게서 말 6필, 금 50냥쭝, 백은 600냥쭝, 비단 등을 선물로 받아 돌아왔다. 그가 태종에게 황금 25냥쭝과 백은 100냥쭝 등을 바치자 태종은 금 25냥쭝과 백은 50냥쭝은 돌려주었다.

1424년 성조가 죽자 황제를 모시던 궁인(宮人) 30여명이 순장(殉葬)을 당했다. 순장 대상에 한씨도 포함됐다. 순장 날 궁인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마루에 끌어올리니 곡성이 진동했다. 순장 집행 직전에 성조의 장남인 인종(명 4대 황제)이 들어와 고별하는 자리에서 한씨는 “늙은 유모(김흑)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주시옵소서”라고 말해 승낙을 받아냈다.

인종이 떠난 뒤 마루 위에 작은 걸상을 놓고 순장자들이 그 위에 올라서자 목에 올가미를 씌운 뒤 걸상을 빼냈다. 한씨가 죽음을 앞두고 유모 김흑에게 “낭(娘)아 나는 간다. 낭아 나는 간다”라고 했는데 말을 미처 마치기도 전에 걸상이 빠졌다. 인종이 귀국을 약속했음에도 명나라는 김흑이 궁궐에서 보고들은 사실을 조선에 알릴 우려가 있다며 돌려 보내지 않았다. 김흑은 11년 만인 세종 때 귀국해 한씨의 애절한 스토리를 전했다.

황제 죽자 한 씨, 올가미 씌운 뒤 순장
 

한계란을 후궁으로 두었던 선덕제(선종) 초상.[베이징 톈탄(天壇) 소장] [



몸이 약한 인종은 등극 8개월 만에 병사하고 선종이 보위에 오르자 명나라에서 이번엔 한확의 막내 누이동생을 한계란(韓桂蘭)을 후궁으로 간택했다. 언니는 할아버지의 후궁, 동생은 손자의 후궁으로 간택이 된 것이다. 한확이 앓아누운 누이에게 약을 주자 “누이 하나를 팔아서 부귀가 이미 극진한데 무엇을 위해 약을 쓰려 하오”라며 오빠에게 대들었다. 막내 동생 한씨는 장래 시집갈 때 쓰려고 마련해둔 제 침구(寢具)를 칼로 찢고 소중히 간직했던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베이징에 들어간 동생 한씨는 선덕제가 죽었을 때 순장을 당하지 않고 그 후 4대의 황제를 섬기면서 명나라 황궁에서 56년을 살다가 1483년(조선 성종 14년) 7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명나라 호부상서((戶部尙書) 유우(劉羽)가 쓴 한계란의 묘지명(墓誌銘)에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행동이 떳떳하며 성품이 착하여 여러 사람과 화목했다. 궁중 대소사의 법도에 관해 부인에게 묻는 경우가 많았는데 복잡한 궁궐 법식을 하나 하나 기억했다가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후궁을 비롯한 궁녀들이 여스승(女師)라고 부르며 존경했다"고 기록돼 있다(성종실록).  

중국 황제의 명으로 한계란의 가족과 친척들은 명나라에 정사 부사로 들어가 고가의 선물을 받아와 부를 쌓았다. 한계란은 성종의 아버지인 도원군(한계란의 조카사위)을 덕종으로 추존하는 것을 비롯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확은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영접을 하고 황제의 부름을 받고 명나라 조정에 들어간 것도 여러 차례였다. 성조는 한확을 불러 광록사소경이라는 벼슬을 제수(除授)했다. 한확은 중국황제가 내려주는 벼슬을 받은 후에 조선에서도 경기도관찰사 병조판서 이조판서 같은 고위 관직을 지냈다. 세조는 중국 황실에 대한 한확의 영향력을 높이 사 한확의 막내딸을 세자 도원군의 처(후일 인수대비)로 맞았다. 도원군은 일찍 죽었으나 도원군의 둘째 아들이 제 9대 임금 성종이 됐다.
 

 사대부 집안의 여성 교육을 위한 책. 성종의 모친 인수대비가 저술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확의 막내 딸 인수대비(소혜왕후·仁粹大妃)는 중국의 열녀전, 소학, 여교(女敎), 명감(明鑑)에서 부녀자들의 훈육에 요긴한 대목을 뽑아서 내훈(內訓)을 만들었다. 당시에 번역한 내훈의 한글본은 조선 초기 우리말의 연구를 위한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세종과 세조의 왕위 계승을 인정하는 성조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아온 것도 한확이었다.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사신을 보내어 고명을 청하니 성조는 한확을 정사로, 유천을 부사로 불러 고명을 주었다. 이때 성조는 한확을 아들 인종의 사위로 삼으려 했으나 한확은 노모가 집에서 기다린다며 중국 황제의 사위가 될 기회를 사양했다.

한확은 양국서 총애받고 출세가도

조선은 신년하례와 황제의 생일 때마다 금은 그릇과 인삼, 세포 등을 예물로 바치느라 부담이 과중했다. 세종 때는 예조참판 하연과 광록소경 한확을 보내 금은의 면제를 요청했다.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도착하자 황제는 매일 한확을 불러 조선에 사신으로 자주 갔던 황엄과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성조의 총애를 받는 누나 여비 덕분에 한확 일행은 금은 공물의 면제를 윤허 받고 귀국했다.

이렇게 나라에 공이 크니 한확이 실수를 저질러도 세종은 눈감아 주었다. 사가 (私家)에 나가 있던 궁궐 시녀와 한확이 정을 통하다 들켜 신고가 들어왔다. 사헌부가 논죄를 청했으나 세종은 “이 사람은 내가 죄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용서했다.
 

어머니 인수대비의 요청으로 성종이 세운 외할아버지 한확의 신도비. 대리석의 풍화를 막기 위해 후손들이 훗날 비각을 만들었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단종 때 실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좌찬성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고자 했으나 그는 “도원군이 내 사위인데, 오늘날 수양대군이 권간(權奸)을 베어 없애고 수상(首相)이 되어 정치를 보좌하는 마당에 내가 사돈집으로서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되면 여론이 나쁠 것”이라며 받지 않았다. 한확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사돈인 세조의 편에 가담해 정난공신이 됐다. 그는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명을 받고 사은사 겸 주청사로 북경에 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단종이 양위(讓位)한 것이라고 둘러대 황제의 고명을 받아냈다.

한확은 1456년 명나라로부터 세조의 왕위 승계를 승인받는 낭보를 갖고 돌아오다 병을 얻어 중국 땅 요령성 사하포에서 5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세조는 도승지 한명회를 보내 시신을 운구했다. 한확은 1470년(성종 1년) 세조묘에 배향됐다.

막내 딸은 세조의 며느리로···인수대비 등극 

한확의 막내딸로 세조의 큰며느리였던 인수대비가 부친의 묘소에 신도비가 서 있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자 아들 성종이 외할아버지의 신도비를 세우면서 중국에서 수입한 대리석을 사용했다. 우참찬 어세겸(魚世謙)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임사홍이 썼다. <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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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태종 세종 세조 성종)
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궁녀, 신명호, 시공사
4.자금성의 노을, 서인범, 역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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