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사랑한 천문학자 이순지, 화도서 별을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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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19-11-20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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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남양주 화도읍에 묻힌 조선 천문학자 이순지·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세종은 늘 천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곤 조선의 역상(曆象)이 정확하지 않음을 걱정했다. 어느날, 세종이 관료 초년병인 청년 이순지(李純之, 1406~1465)에게 물었다.
“한양의 북극출지(北極出地)가 얼마인가?”
이순지가 답했다.
“38도 강(强)이옵니다.”
세종은 이 대답이 미덥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중국에서 온 사신이 세종에게 역서를 바치자 세종은 그 사신에게 똑같이 물었다. 중국 사신은 “38도 강”이라 답했다. 세종이 기뻐하고 이순지에게 의상(儀象)을 교정하게 하니 지금의 간의(簡儀), 규표(圭表), 태평(太平), 현주(懸珠), 앙부일구(仰釜日晷), 보루각(報漏閣), 흠경각(欽敬閣)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다.

한국화가 이규선 화백이 그린 이순지 초상[양성이씨 대종회관 소장]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순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의 기록이다. 여기서 북극출지는 북극이 땅에서 얼마나 솟아올랐는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북위(北緯)를 가리킨다. 그런데 왜 38도일까. 지금 서울은 북위 37.5도 아닌가. 17세기 서양식 각도 계산법이 도입되기 전까지 동양에서는 원둘레를 360도가 아니라 365와 1/4도로 정하고 있었다. 이것을 기준으로 이순지가 한양의 북극출지를 계산한 것이다. 이 값을 360도로 환산해보면 지금 값과 거의 흡사하다. 이순지의 계산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것이었다.
조선의 자주적 천문역법(天文曆法)을 갈망했던 세종에게 이순지의 등장은 가뭄의 단비였다. 그때 세종과의 만남은 이순지가 조선 최고의 천문학자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세종은 이순지의 재능을 신뢰하게 되었고 1431년경부터 그에게 천문학 연구를 맡기기 시작했다. 하늘의 움직임과 시간의 흐름은 매우 중대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을 이해하고 예측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황제의 나라 중국이 천문역법을 독점하려고 했다. 제후국의 독자적인 천문역법은 허용하지 않았다.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중국의 역법에 의존했고 조선에서도 독자적인 천문역법서를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자격루는 원래 세종의 명에 따라 이순지의 과학이론을 토대로 장영실이 제작했다. 세종시대의 자격루는 사라지고 중종 때 만든 것의 일부 부품만 전해왔으나 남문현 건국대 명예교수의 끈질긴 노력으로 2017년 세종 당시의 자격루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디지털 자동 물시계라고 할 수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그러나 세종은 한반도의 독자적인 천문역법을 갖고 싶었다. 조선의 천체와 조선의 시간을 제대로 파악할 때,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다. 세종의 애민정신이었다. 이순지는 경기도 양성(지금의 안성시 양성면) 출신이다. 1427년 문과에 급제했고 이후 세종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어 서운관(書雲觀)의 판사(判事)와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문종과 단종 때는 예조와 호조의 참판 벼슬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한성부윤(漢城府尹·지금의 서울시장)을 지냈다.
천문역법에 관한 그의 업적은 가히 눈부시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많은 과학사학자들은 1442년 이순지와 김담(金淡․ 1416~1464) 등이 천문학서 ‘칠정산(七政算)’을 편찬한 것을 세종대 천문학 역산학(曆算學)의 정점으로 꼽는다. 여기서 ‘칠정’이란 해와 달 그리고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5개 행성을 가리킨다. 칠정산은 일곱 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는 뜻이다. ‘칠정산’의 편찬자는 이순지와 김담이었다. ‘칠정산 내편’은 1281년 원나라에서 만든 수시력(授時曆)을 한양의 위치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칠정산 외편’은 아라비아 역법을 번역한 중국의 회회력(回回曆)을 바탕으로 조선의 천문 상황에 맞게 정리한 것이다. 이순지는 행성들의 운동을 계산하는 방식을 치밀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일식(日蝕)과 월식(月蝕) 등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이로써 조선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독립적인 역법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평가한다.

 이순지와 김담이 1442년 편찬한 천문학이론서 ‘칠정산 내외편’. 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방식을 설명해놓았다. [서울대 규장각 제공]

 


이순지는 천문학 개론서인 ‘천문유초(天文類抄)’를 편찬했다. 별자리를 해설하고 일월성신(日月星辰)에 관한 이론, 점성(占星)에 관한 이론을 정리해 수록한 책이다. 1445년엔 세종의 명을 받아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했다. ‘제가역상집’은 세종 때 만든 천문기구들에 대한 이론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
1458년엔 세조의 명을 받아 일식과 월식을 간편하게 계산하는 법을 소개한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를 편찬했다. 세종 때 정리했던 일식 월식 계산법을 외우기 쉽게 노랫말로 바꾸고 여기에 사용법을 덧붙였다. 여기서 교식(交食)은 일식과 월식을 통칭하는 말이다. 추보(推步)는 천상(天象)과 역법을 계산하는 것으로, 옛사람들이 해와 달의 움직임을 사람의 걸음걸이와 같다고 여긴 데서 만들어낸 말이다.
이순지는 ‘제가역상집’에 편찬 동기를 이렇게 적었다. ‘제왕의 정치는 역법과 천문으로 때를 맞추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는데, 우리나라 일관(日官)들이 그 방법에 소홀하게 된 지가 오래다. 1433년 가을에 우리 전하께서 거룩하신 생각으로 모든 의상과 귀루(晷漏)의 기계며, 천문과 역법의 책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모두 극히 정묘하고 치밀하셨다.’ 이순지는 자주적 천문역법에 대한 세종의 열정과 혜안을 제대로 간파했고 세종은 그런 이순지를 끝까지 신뢰했다.
1436년 이순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이순지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러야 했다. 이때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젊은 학자 김담을 추천했다. 그런데 세종은 1년 만에 그를 불러들였다. 김담도 뛰어났지만 세종은 이순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세종은 “내가 간의대(簡儀臺)에 얼마나 열심인지 알고 있지 않은가?”라며 상중의 이순지를 불러 간의대 일을 계속 맡겼다. 이순지에 대한 세종의 무한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간의대는 1434년 세종이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세운 천문관측대로, 이 간의대를 토대로 다양한 천문관측기기를 제작했다.

                     조선시대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세조 때인 1462년, 사방지(舍方知) 스캔들로 조선 땅이 떠들썩했다. 사방지는 남녀 양성(兩性)을 함께 갖춘 노비였다. 사방지는 어릴 때부터 여자옷을 입고 40대까지 사대부 집을 출입하다 수상한 일이 반복되면서 사헌부에 잡혀갔다. 사헌부에서 조사해보니 사방지는 남자와 여성의 생식기를 함께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스캔들에 이순지의 딸이 연루되었다. 일찍 과부가 된 이순지의 딸이 사방지와 10년 가까이 내연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대신들은 이순지의 사퇴를 요구했고 세조는 마지못해 이순지를 파직했다.
하지만 세조는 이순지를 열흘 만에 복직시키고 대신 이순지에게 사방지를 처리하도록 맡겼다. 그러나 3년 뒤 이순지가 죽고 나자 딸과 사방지의 관계가 계속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순지가 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지에게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과학자로서의 명성에 흠을 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세조의 신뢰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방지 스캔들 이듬해인 1463년 세조는 “이런 일(지리서 편찬)은 이순지처럼 정교하게 할 사람이 없다…음양이나 지리 같은 일은 반드시 이순지와 의논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순지는 세종 시대부터 문종, 단종, 세조시대에 이르기까지 과학자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에 이런 과학자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1만원권 지폐엔 다양한 문화재가 디자인되어 있다. 앞면엔 세종의 초상과 용비어천가,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 뒷면엔 혼천시계(渾天時計)에 들어있는 혼천의(渾天儀),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천체 망원경이 표현되어 있다. 예전 1만원권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앞면에는 세종의 초상과 자격루(일부 부품)가, 뒷면엔 보루각이 설치되었던 경복궁 경회루가 디자인되어 있었다. 1만원권 디자인의 공통점은 조선시대 천문과학 발명품이 대거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세종시대 과학의 성취를 웅변한다.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에 있는 이순지 부부 합장묘.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과학에 대한 홀대는 아닌지 하는 느낌도 든다. [사진=이광표]


세종대왕 하면 인문을 생각하고 인문 하면 과학이 배제된 인문만을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자칫 문약함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종시대는 그렇지 않았다. 15세기 세종시대는 한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진 과학의 시대였다. 그 과학의 시대를 맨 앞에서 이끌었던 인물은 단연 이순지였다.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과학자로는 이천(李蕆․1376~1451), 장영실(蔣英實․1390년경~?)이 있다. 이천은 과학천문기기 개발과 운영을 총괄했고, 장영실은 실무 제작을 맡았다. 이순지는 이론 연구에 매진해 그 토대를 닦았다. 이순지가 없었더라면 다양한 천문기기를 제대로 만들어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순지는 세종 때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다. 1465년 삶을 마감한 그는 현재 남양주 화도읍 차산리에 묻혀 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문화재 54호로 지정되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다소 소박하다. 소박함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좀 소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시대를 앞서 갔던 그의 과학정신을 기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으면 좋겠다. <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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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 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세조)
2.역사 속 과학인물 성보 이순지, 박성래, 과학과 기술
3.세종시대의 과학, 전상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4.우리 과학 문화재의 한길에 서서, 전상운,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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