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여생 보낸 '대아당' 사라지고 은행나무 두 그루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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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19-12-1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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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임진왜란 때의 명신 이덕형의 사제촌 별서 · 황호택(서울시립대) 이광표(서원대) 교수 공동집필


 한음 이덕형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서 원병(援兵)을 데려오고 전쟁 중에 일본과 외교 담판을 벌인 명재상이자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가 한문으로 남긴 시들은 수백 년이 흐른 지금에도 잔잔한 감흥을 준다. 한음 이덕형이 열네살 때 포천 외가(外家)에 다니러 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안변 군수(郡守)로 있던 양사언 형제의 집이 이웃에 있어 그들과 문장을 주고받았다.
양사언은 대동승(大同丞·평양 찰방)을 거쳐 삼등 함흥 평창 강릉 회양 안변 철원 등 여덟 고을의 수령을 지내 직업이 ‘고을 수령’이라는 말을 들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를 비롯해 ‘미인별곡(美人別曲)’ ‘남정가(南征歌)’ 같은 가사 문학을 남겼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써 석봉(石峰)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더불어 조선 3대 명필로 꼽힌다.
글씨와 문장에 모두 능했던 양사언이 한음의 글 짓는 솜씨를 보고 “너는 나의 상대가 아니라 스승이로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는 한음이 지은 시를 영평의 우두연(지금의 금수정)이라는 골짜기 바위에 새겨놓게 하였다. 아쉽게도 이 바위는 6·25 때 포격으로 유실 됐다고 한다.

野濶暮光薄 (야활모광박) 넓은 들엔 저녁빛 엷게 깔리는데
水明山影多 (수명산영다) 맑은 물엔 산 그림자 가득해라.
綠陰白烟起 (녹음백연기) 녹음 속엔 흰 연기 일고
芳草兩三家 (방초양삼가) 아름다운 풀밭사이로 두세 채 집이로세
 

  포천 금수정의 가을 풍경[김발용 사진작가 제공]


한음의 시 중에서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은 인사차 찾아온 수종사 주지 덕인 스님에게 준 시다. 운길산과 사제촌((莎堤村·지금의 조안면 송촌리)을 둘러싼 겨울 풍광을 담은 수묵화 같다.

僧從西崦扣柴關(승종서엄구시관)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네
凍合前溪雪滿山(동합전계설만산) 앞 개울 얼어붙고 온 산은 백설인데
萬疊靑螺雙練帶(만첩청라쌍연대) 만첩 청산은 두 강을 두르고
不妨分占暮年閑(불방분점모년한) 늘그막에 나누어 차지하고 한가롭게 보내네

두 강은 두물머리에서 만나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일컫는다. 용진 나루터 일대는 팔당댐 건설로 호수로 변했으나 원래는 걸어서 건널 정도였으며 주위가 온통 아름다운 백사장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덕형이 살던 대아당 터에 남아 있는 하마석(下馬石)과 은행나무 두 그루.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운길산 수종사에서 북한강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한음이 살던 대아당(大雅堂) 터를 만나게 된다. 1605년에 지은 대아당은 사라졌고 수령 4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와 하마석(下馬石)이 남아 있다. 
한음은 1605년 운길산 아래 용진(龍津) 사제촌에 별서(別墅)를 지어 아버지를 모시고 여생을 보냈다. 대아당에 읍수정(挹秀亭)과 이로정(怡老亭)이라는 두 개의 정자를 지었다. 읍수는 주위의 빼어난 경치를 가져온다는 뜻이고 이로는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을 즐긴다는 의미다.
만년에 동갑내기 한음과 지기가 된 무관(武官) 박인로는 대아당에 머물면서 사제곡(莎堤曲)을 지었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한음의 삶을 칭송한 국문가사다. 사제는 조안면 진중리에 있던 북한강 제방인데 을축년(1925) 대홍수로 무너지고 수로가 바뀌어 지금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용진 나루터 바로 맞은편이 어머니 묘소. 한음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성묘를 했다. 한음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도 '아득한 천리에서 용진의 달을, 한 해에 두 곳에서 나누어 보겠네'라는시를 읊을 정도로 이곳의 경치를 사랑했다. 한음은 죽은 뒤 자신의 묫자리도 아버지 어머니 묘 아래로 잡았다. 한음 묘소에 올라서면 북한강 건너 대아당 터가 보인다. 한음의 묘에서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상자 같은 돌이 눈길을 끈다. 묘제(墓制)에 해박한 이우덕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사는 “태조와 신덕왕후, 이퇴계 묘소에도 그런 돌상자가 있다. 제사를 지내고 축문을 불태우는 돌”이라고 설명했다.

 이덕형의 묘소 옆에 있는 돌. 제를 올리고 축문을 불태우는 자리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한음 묘소에서 아래 마을 쪽으로 내려오면 신도비가 서있다. 임진왜란 때 일제가 개울 속에 처박아 넣은 것을 해방 후 후손들이 파내 비각 안에 모셨다.
한음은 조선역사에서 가장 이른 나이인 30세에 대제학을 지냈다. 그 후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37세에 우의정에 올라 정승 반열에 들어섰다. 영의정을 두 차례 지냈다. 한음이 고속승진을 거듭한 것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란을 맞아 목숨을 돌보지 않고 일했고 상하가 두루 존경하는 학식과 인품을 지녔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588년 일본의 사신으로 승려 현소(玄蘇)와 대마도주(島主)의 아들 평의지(平義智)가 조선을 찾아왔다. 한음은 동래(東萊)에 내려가 일본 사신들을 접견했다. 그 이듬해인 1589년에는 현소와 평의지가 서울에 와 일본 답방을 요구했다. 조정은 일본 사신 평의지를 따라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을 보냈다. 돌아와서 서인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을 예견한 보고를 했으나 동인 김성일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592년 일본은 20만 대군을 몰고 쳐들어왔다. 조정은 급한 대로 이덕형과 좌의정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조선에 진주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공문을 주면서 역관 응순을 통해 “조선이 강화 (講和)할 뜻이 있으면 이덕형을 충주로 보내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한음의 초상은 1590년 궁중화가 이신흠이 처음 그렸다. 1846년 궁중화가 이한철이 이신흠의 그림을 바탕으로 전신과 반신의 모사본을 제작했다. 이한철의 모사본은 원래 한음의 재실인 쌍송재(雙松齋)에 있었으나 지금은 경기도 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사진=경기도박물관 소장]


이에 이덕형은 “진군 속도를 늦춰보겠다”며 한양을 떠나 용인에 도착해 역관 경응순을 적진으로 보냈으나 일본군은 역관을 죽이고 봉서만 보내왔다. 그는 할 수 없이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선조는 이미 피란길에 오른 후였다.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며 스무날 만에 평양에 닿았다. 그런데 또 현소와 평조신(平調信)이 만나자는 연락을 보냈다. 대동강에서 단신으로 배를 타고 만나 현소와 담판을 벌였다. 현소는 “우리는 명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빌리려고 하는데 길을 빌려주어 중원으로 들어가게 한다면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음은 일본의 교란술에 넘어가지 않고 “귀국이 중국을 침범하려고 했다면 어찌 바다를 통해 절강(浙江)으로 가지 않고 조선으로 왔습니까”라고 응수했다. 절강은 상하이 밑에 있는 지역이다. 가도입명(假道入明)의 기만성을 명쾌하게 논파한 질문이었다.

명나라에 원병 호소···대동강서 단신으로 왜와 담판

오성 이항복은 한음보다 다섯살 위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선조 11년에 치러진 사미시 시험장에서였다. 오성과 한음의 교유는 동화책에 나오지만 어린 시절부터 사귀었다는 것은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다. 이항복이 적은 묘지명(墓誌銘)에는 '한음이 대동강을 건너 내 처소에서 수일 동안 이불을 같이 덮고 자며 명에 구원병을 요청해야 한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날이 샐 무렵 둘이 조정에 들어가 말하자 대신들은 처음엔 난색을 보였으나 한음이 굳게 쟁론하니 조정의 의논이 결정됐다'고 적고 있다.
한음과 오성은 '우리 힘만으로는 일본을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음은 밤낮없이 2백리를 달려 명나라 요동에 도착해 여섯 차례나 글을 올려 원병을 호소했다. 요동 도사(都使)가 감동해 재량으로 병력 5천명을 차출했다. 그러나 명군은 평양성을 공격하다 참패했다. 그러자 명의 이여송 제독이 5만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왔다. 이여송의 대군은 1593년 평양성을 탈환했다.

일제는 임진왜란 극복의 내용을 담은 이덕형 신도비의 비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개울에 처박았으나 광복 후에 다시 세워 비각 안에 보존하고 있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이여송은 평양의 승전에 우쭐해 무리한 진격을 하다 급습을 당해 많은 사상자를 낸 뒤에는 평양으로 후퇴해 성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했다. 이여송은 평양성 술자리에서 한음에게 적벽도(赤壁圖) 한폭을 보여주었다. 적벽대전은 양쯔강 적벽에서 오나라 장군 주유(周瑜)가 조조(曹操)의 대군을 격파한 전투다. 한음은 적벽도를 보고 시 한 수를 지어 이여송에게 평양성에서 나와 진격할 것을 종용했다.

勝敗分明一局碁(승패분명일국기) 바둑은 승패가 분명해야 하고
兵家最忌是遲疑(병가최기시지의) 군인은 전쟁터에서 우물쭈물하지 않는 법
須知赤壁無前績)(수지적벽무전적) 지금 적벽싸움 같은 공을 못 세웠으니
只在將軍斫案時(지재장군작안시)장군은 지금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오

일본군은 1593년 행주에서 권율 장군에게 대패하자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군이 퇴각하면서 이여송의 후임으로 온 유정(劉綎) 제독이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려 하자 이덕형은 통제사 이순신에게 정보를 주어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이 전사했다.
선조가 장남 임해군을 제치고 차남 광해군을 왕으로 정한 것에 명나라가 이의를 제기하며 책봉을 허락하지 않자 광해군은 이호민을 베이징에 보냈으나 책봉을 받아오지 못했다. 광해군은 “한음이 젊고 재주와 슬기가 있다”며 이덕형을 파견했다. 한음은 베이징에 5개월간 머무르면서 각부의 재상과 관원들을 만나고 정성껏 글을 올려 마침내 황제의 책봉을 받아냈다.

이덕형 묘소에서 북한강 너머 사제촌의 대아당이 바라다보인다. [사진=김세구 전문위원]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에 불안을 느끼던 광해군은 1613년 영창대군의 모친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에 사약을 내렸다.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됐다가 이이첨의 지시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 살해되었다. 한음은 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 폐모(廢母)를 반대하며 대북(大北)과 대립했다. 대북이 한음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집중공격했으나 광해군은 삭탈관직하는 데 그쳤다.

20년 청빈한 관직생활···종로~남대문 장례조문 행렬

한음은 그후 침식도 제대로 못하고 찬술만 마시다가 광해군 5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몹시 슬퍼하며 관직을 회복시켜주고 현직 예에 따라 장례를 치러주었다. 그가 죽었을 때 조문을 간 이원은 저정집(樗亭集)에서 “종로에서부터 남대문까지 군졸과 시민이 길을 메우고 울부짖었다"고 적었다. 행장(行狀)을 쓴 이준은 “입각한 지 거의 20년이 되었지만 집에는 아무런 저축이 없었다. 녹봉을 받을 때마다 다급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음의 청렴함과 배려심을 칭송했다.
김장생은 사계어록(沙溪語錄))에서 “한음은 치우침이 없고 당이 없는 동서남북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음과 오성은 당파도 달랐다. 한음은 남인이고 오성은 서인이었다. 한음의 신도비명을 쓴 조경은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3이(李)'의 공로라고 새겼다. '3이'는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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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지원-남양주시(시장 조광한)
협찬-MDM그룹(회장 문주현)
도움말-남양주시립박물관 김형섭 학예사


<참고문헌>
1.조선왕조실록
2.국역 한음선생문고 상하, 광주이씨 좌의정공파 종회
3.한음 선생의 생애와 시, 포천문향청년 제7집, 포천문인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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