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대통령이 지금 다석 류영모를 읽어야 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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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12-08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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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의 파르헤지아] 문재인 대통령께 - 지난 1일 짧은 휴가 때 도올 김용옥(한신대 석좌교수)의 신간 3권을 읽으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최근 여러 모로 쉽지 않은 국정의 와중에 국가 지도자로서의 가치를 새롭게 새기기 위해 가볍지만은 않은 철학서적을 독파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보기 드문 성찰적 미덕으로 느껴집니다. 책의 내용이나 저자의 발언을 발췌해 문제 삼는 보도들도 보았으나, 저는 개의치 않을 사안으로 여깁니다. 설사 그 점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소문난 독서가인 대통령이 그런 한두 구절의 맥락에 구애를 받아 어떤 선택에 차질을 빚을 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고 함석헌 선생(1901~1989).]



도올과 함석헌이 존경한 스승, 다석 류영모

다만 도올의 저작에 관심을 지니시는 것을 보고, 저는 함석헌옹을 떠올렸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시대를 겪었던 이 땅의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함 선생은 군사독재 시절에 양심을 지키며 독창적인 사상을 실천했던 교육자, 저술가, 언론인이었지요. 그간에 겪었던 숱한 투옥은 그가 '결코 묶어둘 수 없는 이 땅의 정신가치'임을 확인하게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나 문익환 목사를 비롯해 이오덕·백기완·한완상 선생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던 용기 있는 시대정신이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옥살이하는 것도 겁내지 말라." 함석헌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사상계’를 발행하며 박정희 정권을 기탄없이 비판했던 ‘씨알의 소리’를 내는 장중한 목청이었습니다. 전태일의 분신 때 달려가 통곡을 했고, 야권의 중심이었던 당시 김대중 선생의 납치와 탄압에 맹렬하게 맞섰던 ‘민주화의 일대 스승’이었지요. “집권자는 아무리 강해도 망하는 날이 온다. 나라의 주인인 씨알(국민)은 영원하다. 집권자에 꼬리치지 않는 나도 살아가지 않는가.” 이렇게 외쳤지요. DJ는 "함 선생이야 말로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예찬했습니다. 함석헌옹이 쓴 명문의 시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에서 ‘그 사람’은 유일한 스승이었던 다석 류영모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함석헌 씨알사상은 그 모두가 다석이 설파한 철학의 핵심입니다. 이 땅의 운동권의 정의와 양심의 푯대였던 함석헌옹이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고 묻는 바로 그 사람을, 민주화 투쟁으로 마침내 꽃을 피운 정부를 이끄는 문 대통령은 읽어야 하지 않을지요.

오죽하면 도올마저 “살아생전에 다석 선생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을 놓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고 하였겠습니까.

철학자 김상봉(전남대 교수)은 도올 김용옥을 함석헌과 같은 좌표축에 놓고 있으며 “도올은 대중들에게 먼저 다가가 하나의 우는 씨알로서 말을 건네는 유일한 철학자”라고 평가했습니다. 세월호와 대북문제에 있어서 보여준 도올의 단호한 입장들은 민주화시대 지식인의 실천적 면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상봉은 "20세기 이후 한국 철학계의 태동은 들판이었으며 광야의 철학이었다"고 평가하면서, 수운(水雲) 최제우의 동학(東學)을 그 탯줄로 잡습니다. 수운의 개벽사상의 한 줄기가 굵직하게 뻗어나간 것이 류영모-함석헌으로 이어진 씨알사상이었지요.

철학이 가장 약한 자들을 받들어 그들의 눈물을 깊이 성찰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다고 밝힙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눈물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는 류영모-함석헌의 철학이 근현대의 깊은 통대(痛帶)인 일제-독재-분단을 이겨낸 정신적 맥락이었던 거지요. 류영모는 바로 문 대통령의 정권이 기반하고 있는 '운동성'의 가치를 형성한 정신지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43일과 882일 사이에 선 대통령에게

왜 지금 다석을 읽어야 할까요. 우선 다석이 구축한 하루살이(일일주의) 실천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가온찍기(가는 것과 오는 것, 즉 과거와 미래의 한복판인 지금을 인식하는 방식)’로 지금 여기 대통령의 좌표를 찍어 봅니다.

대통령은 2017년 5월 10일 취임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943일간 대통령으로 있었습니다. 오늘부터 임기가 다하는 2022년 5월 9일까지 882일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오늘 하루가 있습니다. 누구나 어제의 형편과 어제의 고집과 어제의 생각과 어제의 ‘나’로 살아서는 안 되며 반드시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다석 류영모의 ‘삶의 혁신’ 권고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주신 선물이며 기회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도 바꿀 수 있으며 새로워질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현재 문 대통령이 처하신 교착이나 곤경은 어디에서 온다고 보십니까?

첫째, 다석은 “진리를 쥐지 않고 권력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 경제의 혜택이 국민 전체에게로 확대될 수 있는 정책을 표방하고 실천을 해왔습니다, 주 52시간제의 도입과 최저임금의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그리고 탈원전과 같은 정책은 그런 선한 취지와 신념을 바탕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습니다. 정권의 임기 반환점을 돈 지금, 이 정책들이 빚은 상당한 차질에 대해 정권 내부에서도 당혹스러워하고 야권과 언론의 공격을 받고 있는 점 또한 분명해 보입니다.

경제정책, 정직함과 유연성이 있었는가

그러나 이런 상황이 정권의 핵심 경제정책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방향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 방법이나 속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글로벌 환경과 국내 경제 생태계의 조건들과 ‘체력’들을 좀더 섬세히 감안하지 않고, 가시적 성과에 조급해했던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불리한 통계에 불만을 가질 것이 아니며, 또한 언론의 비판이 정치적인 공격이라고 물리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정직함과 유연함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정직함이란 경제정책들이 빚은 문제들을 충분히 시인하고 그것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정책의 원래 취지’를 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비판을 하는 이들은 ‘적’이 아닙니다. 현실적 성과를 담보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진리와 국민 전반의 동의(同意)로써 정책을 정착시키려 하지 않고, 권력으로써 성과를 도출하겠다는 강박에 빠져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쥐지 않은 권력에 대해 다석은 경고했습니다. 잃는 것은 시간과 신뢰이며, 얻는 것은 더욱 커지는 부작용이나 오작동일 것입니다.

둘째, 다석은 “이 다섯자 몸뚱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것은 위로 ‘솟나’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조국 법무장관 임명과 사퇴로 빚어진 이 나라의 갈등은 지금에 와서 더욱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주화 세대의 정의로운 표상이었던 조국은 뜻밖에 드러난 부도덕과 편법을 비롯한 언행불일치가 드러남으로써 충격을 줬습니다. 대통령은 이에 대해 적극적인 문제의식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사태를 비대해진 ‘권력적 검찰’의 저항으로 인식했고, 공수처 설치의 당위성을 높이는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다석 류영모 선생(1890~1981)과 부인 김효정.]



진영을 초월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였는가

물론 그런 관점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이 취해야 할 태도는, 그 관점을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조국이 국민에게 준 충격에 대해 성실하고 겸손한 국정책임자의 태도로 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지지자의 대통령으로만 굳어지게 된 까닭은 바로 진영을 초월한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태로 많은 이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은 이 정권의 실세그룹으로 일컬어지는 ‘민주화세대’ 전반의 정치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민주화세대는 전시대의 대한민국을 이만큼 ‘성장’시켜 넘겨주는 역할을 한 세대인 것은 맞지만, 밀레니얼의 격변기와 다양한 국제정치학 속에서 제대로 구실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던져주었습니다.

울산시장 야당후보 하명수사 의혹과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에 대한 청와대 감찰 중단 사건과 관련한 대통령의 태도 또한 많은 국민들이 주목하고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이런 국민의 눈길은 어쩌면 검찰수사로 드러날 진실보다, 그리고 정치검찰의 마지막 생존 몸부림으로 해석하는 일보다도 훨씬 더 중요할지 모릅니다. 촛불혁명 이후 새로운 시대를 이끌, 모두의 대통령을 자임하며 시작했던 권력이 이제 보니 ‘그들만의 대통령’이며, 전시대의 부정한 대통령과 그리 다르지 않구나 하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전투적이고 대결적인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대통령을 향해, 다석은 현실의 자잘한 맥락과 욕망을 박차고 나가지 못한 답답한 ‘몸뚱이의 정치’를 펼치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지는 않을지요. 지금 국민들이 바라는 정치와 촛불이 진정으로 염원하는 나라는 과거 회귀의 진영 정치가 아니라 대동(大同)의 힘으로 ‘솟나’는 선진화 대한민국이 아닐까 합니다. 밀레니얼과 글로벌의 엄청난 격변기에 막 선진국 문턱에서 좌초한 이 나라를 일신할 지도자일 수 있는지를, 대통령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다석은 이렇게 말하는군요. “자기 편이라 옳으니 위해주고 자기 편이 아니면 미워해 없애야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다. 자기 주장만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니까 멸망시키는 자가 대동을 알겠는가. 대동은 예외라는 것 없이 모두가 하나가 되자는 것이다. 대동을 거역하면 자멸이 돌아올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검찰청장.[사진=연합뉴스]



전체적인 판을 끌어올리는 선진화를 꿈꾸는가

극단의 대치상태를 못 벗어나는 국회 필리버스터 사태, 공수처 설치와 선거구제 변경의 패스트트랙 움직임은 민주국가 시스템 하의 어쩔 수 없는 의견대립 구도라고 볼 수도 있고, 사사건건 반대만으로 존재감을 확대하려는 야당의 구태적인 정치행태에 기인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은 지난 정권 교체 과정에서 빚어진 격한 적대감에 기인한 정치 갈등이 기형적으로 깊어졌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은 이 문제를 자신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어야 합니다. 그들 모두를 적폐로 지목해 ‘적’으로 만들 일이 아니라, 건강하고 건전한 상대정파로 이끌어내 전체적인 정치판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오직 내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해 정권을 연장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듯한 인상은 대통령 스스로를, 다석이 비판하는 ‘대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의 영역으로 가둬버린 셈이 되지 않았는지요.

넷째, 통일에 대해 다석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통일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로 통일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통일과 사랑의 평등과 용기의 독립으로 우린 통일을 이뤄야 한다.”
긴장이 높아진 한반도 상황은 북·미 협상을 의식한 일시적인 문제일 수 있습니다. 북한과 관련한 대통령의 굳은 소신은 역대 국가지도자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상대가 있는 ‘게임’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미국이나 중국과 같은 이웃국가들과의 변수들이 작동하는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외교는 '관계'라는 생물을 다루는 일입니다.

대북문제는 포용과 함께 지혜가 필요하다

북한 지도자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 마음속에 들어 있을 어떤 목표와 지향점을 우리의 파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로 바꿀 수 있는지의 문제는 현실적이고도 설득력 있는 계측이 반드시 필요한 사안입니다. 다석이 ‘지혜’를 강조한 것은, 그리고 사랑의 평등과 용기의 문제를 함께 거론한 것은 전폭적인 신념만큼이나 중요한 입체적인 고려(考慮)를 얘기한 것입니다. 일본이나 미·중의 외교에 대한 지혜로움 또한 함께 주문한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험한 준령을 넘어가며 삶의 가치와 신념의 지향점에 대해 깊이 고구(考究)한 위대한 스승, 다석 류영모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난맥 속에서 '진실로 무엇이 중요한가'를 단도직입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땅의 모든 이들이 쳐다보는 자리에 있는 지도자로서 간절히 구하고 행동해야 할 것들의 우선순위를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곰곰이 읽는 일은 남은 882일동안 지난 943일의 허물을 더는 하루하루의 대통령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강건하십시오.

[아주경제는 정치·경제·사회 전반에서 교착에 빠진 이 나라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개를 모색하며 ‘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의 재발견’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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