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의 낱말인문학]냄비받침의 전설과 책의 운명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19-12-06 07:47

 


자취 시절 구석진 자취방에서 라면을 끓여 내놓을 때 마땅한 테이블이 없는지라 책을 꺼내서 냄비받침으로 쓰던 기억이 있다. 냄비바닥의 열기가 전달되면서 책의 모양이 조금 일그러지는 때도 있지만, 이 임시 냄비받침은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다. 비닐장판에 냄비를 놓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를 생각하면, 책이 해낸 이 역할은 탁월하다고도 할 수 있다. 솔직히 그 책의 내용이 했던 일보다, 더 클 때도 있었다.

요즘은 냄비받침이 디자인까지 갖춘 예쁜 생활용품으로 나온다. 나무나 금속제품도 있고 실리콘 같은 것으로 만들어진 제품도 있다. 정규직이 나왔으니 임시직이 발붙일 곳이 없어진 상황인데, 문제는 이 책들이 제 일을 할 기회가 너무나 많이 갑자기 줄어 거의 실업자 신세라는 점이다. 냄비받침 일용직으로도 안 불러주고 그렇다고 독서대 따위에 놓여 진지한 시선 아래서 내면을 뽐낼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다소 조롱 섞인 별칭인 '냄비받침'만 남아, 왕년의 책의 가외 쓸모를 증언하고 있다.
 
사실 냄비받침으로 쓰이는 책이 모두 허접할 필요는 없다. 성서나 불경도 사용이 가능하며 위인전과 법전도 냄비를 앉힐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로 보자면 소장한 책들 중에서 가장 안 읽히면서 두껍기만 한 것들이 차출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심리학 때문에, 콘텐츠에 매력이 없는 책을 가리키는 표현이 됐다.

2016년 한 방송사는 '냄비받침'이란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석달 정도 방영한 프로였는데 이경규와 안재욱 등이 나와 책을 스스로 기획해서 만드는 과정을 방송 예능화한 것이었다. 이때의 냄비받침이란, 독자가 있을지 아직 알 수 없으니, 냄비받침 용도의 제품으로 쓰일 각오를 하고 만든다는 느낌을 담는 말이었을 것이다. 저 프로그램의 풀네임이 '읽어주면 좋고 아니면 냄비받침'이었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란다.

작가들은 가끔 자신의 책을 가리켜 겸손한 말로 냄비받침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목침으로 쓰시라고도 하고, 넓은 책을 내면서 "큰 냄비도 거뜬합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하이든의 아내 안나 켈러는 남편의 악보를 가끔 냄비받침으로 썼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판타지 소설과 게임시나리오를 쓴 작가 오진명(오트슨)은 자기 책을 냄비받침으로 썼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는 읽지 않고 버려두는 책을 '냄비받침'이라고 하지 않고 '장독덮개'라고 불렀다. 당시 집집마다 장독이 있던 생활상의 반영이다. 한자로는 부부(覆瓿) 혹은 복부라고 쓴다. 한나라 유흠이 양웅의 책인 '법언'을 보고, 내용이 너무 심오한지라 후세사람들이 이해부득으로 장독덮개로 쓰기에 딱 좋다고 한 말(한서의 '양웅전')에서 이런 표현이 나왔다.

고려시대 김부식은 '진삼국사기표'에서 "비록 명산에 간직되지는 못할지라도 장독덮개로 쓰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유머를 발휘했고, 조선시대 허균은 자신의 책 이름을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라고 지었는데 이말이 '성소의 장독덮개용 글들'이란 의미다. 성소는 교산 허균의 또다른 호다.

이제 책은 냄비받침으로도, 혹은 안전의 독서물로도 쓰임새를 잃어간다. 책의 신세 전체가 냄비받침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주위에서 열정적으로 부지런히 책을 내는 이들이 많다. 그런 선배나 후배, 동료들을 치어럽하기 위해서라도, 책읽기를 더 부지런히 할 의무가 있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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