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특종 낚은, 히긴스 6.25종군기자 가상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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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원 논설고문
입력 2019-06-26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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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6월29일 수원비행장에서 맥아더 원수와 대화하는 마가렛 히긴스

 미국 워싱턴 DC 알링턴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나, 한국전쟁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를 오늘(6·25) 불러낸 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유엔군 전사자들의 외침이었어요. 전쟁 발발로부터 정전협정 체결까지 3년 1개월 동안 유엔의 깃발 아래 전 세계 21개국에서 총 194만명을 파병해 그중 4만5000명이 사망했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가본 적도 없는 극동의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꽃다운 목숨을 바친 그 젊은이들이 부르짖고 있더군요. 남북간의 섣부른 평화무드에 휩쓸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당신 인터뷰에도 응하게 된 거죠.

김: 대선배이시니 매기 선배로 부르겠습니다. 선배는 수많은 특종과 현장감 넘치는 기사를 통해 전쟁의 참혹한 현실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민들이 겪은 고통과 참상을 전 세계에 알렸습니다. 1951년 귀국 후 6·25전쟁에 관한 최초의 단행본 ‘한국전쟁: 여성 전쟁 특파원 보고서’를 펴내 여성 최초로 풀리처상을 수상했고요. 통영상륙작전에서 한국해병대 1개 중대가 북한군 대대병력을 궤멸시킨 공적을 소개하면서 남긴 ‘귀신 잡는 해병’은 지금까지 한국해병대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별칭이 되었습니다. 한국정부는 2010년 선배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했었지요. 한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매: 1920년 홍콩에서 태어난 뒤 프랑스에서 학교를 다녀 열두살까지는 불어와 중국어만 할 줄 알았어요. 버클리대와 뉴욕컬럼비아대학원을 졸업하고 1942년 뉴욕헤럴드트리뷴의 기자로 입사해서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이던 1944년 런던특파원으로 발령받으면서 종군기자의 길로 들어섰죠. 병원선에 숨어들어 노르망디 상륙작전를 현장 취재했고 악명 높은 독일의 다카우수용소에 최초로 진입했었지요. 1947년부터는 베를린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트리뷴지 극동특파원장에 임명되어 6월 21일에 일본 도쿄에 부임했어요. 4일 만인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한국을 기습 공격해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개전 이틀 뒤인 27일 미 군용기편으로 서울에 잠입했어요.

김: 선배는 시간적으로는 1950년 6월 말부터 12월 말까지, 거리상으로는 부산에서 압록강까지 포연 자욱한 한반도 전역의 전쟁터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전황을 보도했습니다. 서울 함락과 미 지상군 투입 결정, 미군의 첫 교전이었던 스미스 특수부대의 오산전투 패배, 북한군의 압도적 공세에 밀려 후퇴한 낙동강 전선 사수, 부산방어전,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연합군의 반격, 서울 수복, 압록강까지 북진, 미해병 1개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을 격파한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등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선배의 기사를 통해 바깥 세상에 알려졌지요. 저도 특파원 출신입니다만 여성으로서 최전방에서 어떻게 전황을 취재하고 기사를 송고했는지 궁금합니다.

매: 6월 27일 내가 3명의 남성기자들과 함께 미 군용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을 때 불시에 기습을 당한 미 군사고문단들은 본부에서 후퇴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서울 거리는 피난 물결로 아수라장이었고요. 다음날인 28일 새벽 서울과 한국의 남부를 잇는 유일한 다리였던 한강인도교가 폭파돼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군인들과 피난민들이 죽거나 부상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어요. 다행히 나룻배를 구해 한강을 건넜는데 몇 시간을 걸어 수원에 도착했을 때 서울함락 소식을 들었어요. 통신시설이 없어 미 군용기편으로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로 가서 ‘서울 함락’ 기사를 송고하고 다음날인 29일 돌아왔는데 수원비행장에 더글라스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의 전용기가 보이더군요. 기삿거리다 싶어 활주로에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는데 한강 방어선을 직접 시찰한 뒤 비행장에 막 도착한 맥아더 원수가 나를 보더니 도쿄에 갈 거면 같이 가자고 제안하더군요. 쾌재를 불렀죠. 전용기 안에서 그를 단독 인터뷰해 "도쿄에 도착하는 대로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을 파견해달라고 건의하겠다"는 특종을 낚는 데 성공했지요. 도쿄에 있던 AP, UP, 로이터 통신 지국장들의 화난 모습을 상상만 해도 신났어요. 종군기자들은 군의 직통전화를 이용해 기사를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순서 다툼이 치열했어요. 한국전쟁 기간 동안 활동했던 종군기자는 총 450명으로 이 중 18명이 순직했고 윈스턴 처칠 영국총리의 아들은 낙동강 전투 취재 중 발목이 절단되는 부상을 입기도 했지요. 내가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는 아니었지만 최전방에서는 여성은 나 혼자일 때가 많았어요.

김: 모든 것이 열악한 전쟁터에서 서른살 여기자가 일하기가 정말 힘들었을 텐데요. 선배의 사진들을 봐도 늘 헐렁한 군복차림, 전투모를 젖혀 쓰고 화장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생얼에 그을음을 잔뜩 묻힌 모습이더군요. 그럼에도 ‘이브닝 드레스보다 미군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 ‘형제로 삼고 싶은 여자’로 불리며 장교와 사병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나요?

매: ‘여기는 위험한 곳이라 젊은 아가씨가 있을 곳이 못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이곳이 위험하지 않다면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고 응수했어요. 나는 여자가 아니라 기자로서 전쟁에 참가한 것이니 특별대우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고요. 다행히 체력이 좋아 하루 한두 시간만 자도 버틸 수 있었죠. 군복 호주머니에 있는 수첩과 볼펜, 가방에 들어있는 타자기와 손수건, 칫솔, 립스틱, 살충제면 충분했어요.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몸 구석구석에 좀약을 뿌린 뒤에 잠들어 있는 장교와 사병들 사이에서 잠을 청한 적이 많았지요. 한 남성 동료는 "매기와 같이 잤다고 자랑할 수 있는 남자들이 널려 있다"고 농담하곤 했죠. 그런데 초대 미 8군사령관 월튼 워커중장은 “전선에는 여성을 위한 편의시설(화장실)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일본으로 추방해 버렸어요. 즉시 맥아더를 찾아가 “한국에서는 아무데서나 나무덤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죠. 결국 명령은 철회됐고 나는 복귀하자마자 낙동강 전선으로 달려갔죠.

김: 6·25전쟁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 본 목격자로서, 20여년을 전쟁터에서 보낸 종군기자로서 21세기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매: 한국전쟁은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3자가 공모해 공산주의 영향력을 동북아에서 확대하기 위해 일으킨 남침전쟁이면서 세계 평화와 자유민주주의, 인권 수호를 위해 한국과 21개 유엔회원국이 연합하여 이를 물리친 국제전이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북한과 중국은 6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전쟁은 한국과 유엔군의 북침(北侵)전쟁이고 중국을 침공하려는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원조한 항미원조(抗美援助) 전쟁이라는 거짓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 왜곡이 바로잡히지 않는 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어떠한 시도도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나는 한국전쟁 이후 1953~1954년 베트남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를 목격했고 1961년 콩고내전 현장에도 있었습니다. 여러 차례 전쟁을 취재하면서 내가 깨달은 점은 자유는 절대로 공짜로 주어지지 않으며 진정한 평화는 말의 성찬을 통해서가 아니라 힘과 진실의 바탕 위에서만 뿌리내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논설고문 · 건국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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