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눈]'민주화 커플' 김대중-이희호의 사랑과 투쟁

이상국 논설실장입력 : 2019-06-11 10:43

[김대중과 이희호의 1962년 결혼식 사진.]




고 김대중 전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향년 97세)가 10일 별세했다. 이 여사는 미국 유학파 여성운동가로 김 전대통령의 민주화 동지였다. 세 차례 방북으로 남북화해를 위해 애쓰기도 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에게 거울같은 인연이기도 했지만, 한 시대를 나란히 비춘 등불이었다. 소중했던 그 등불들이 가만히 꺼진 날, 그들의 동행을 추억해보는 일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젊은 그분들을 표현하기 위해 경칭을 생략한다.)

# 백금반지를 나눠낀 결혼 

두 사람은 1962년 5월10일 서울 종로구 체부동에 있는 이희호의 외삼촌(이원순)의 집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대중은 38세, 이희호는 40세였다. 부부는 신부 이희호가 산 백금반지 두 개를 나눠 끼었다.  이희호의 하객은 친지와 YWCA 동료 등 100여명이 참석했고, 김대중 쪽에선 동생인 김대의와 김대현만 나왔다. 이들은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결혼 후 그들이 들어간 곳은 김대중이 살던 서대문구 대신동의 전셋집이었다. 거기엔 시어머니와 함께 김대중의 두 아들이 있었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어떻게 만났을까. 이희호의 부친은 의사였고 독실한 감리교 신자였다. 딸에게 아들과 같은 돌림자 '호'를 쓸만큼 양성평등에 대한 소신을 갖고 있었다. 어머니는 딸을 공부시키는데 열성을 보였다. 이희호가 18세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소녀는 어머니의 꿈을 이뤄드리겠다는 생각으로 이화여전(현재 이화여대)과 서울대에서 공부하고 미국 유학(스칼릿대학 사회학 석사)을 다녀왔다. 1951년 한국전쟁이 진행되던 무렵, 피란지 부산에서 29세 이희호는 27세 김대중을 만났다. 당시 해운사업을 했던 김대중은 이희호를 보면서 이지적인 눈매를 가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표현이 시원시원하고 적극적인 여성이었는데, 몇 마디 서로 대화를 해보니 말이 잘 통했다. 그는 그때 이미 유부남이었다. 짧은 만남은 그러나 서로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 사랑이 깊어갔던 그 무렵 

1959년 종로 거리에서 김대중은 문득 이희호와 마주쳤다. 그녀는 명동YWCA연합회 총무로 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스치듯 지나갔다. 1960년 4.19 이후 김대중이 새로 실시되는 민의원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이희호는 신문에서 읽었다. 그의 아내 차용애와 사별했다는 소식도 함께. 1961년 어느날 YWCA 사무실에 김대중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명동에서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며 세상에 관한 이야기와 정치에 관한 생각들을 나눴다. 5.16 쿠데타 직후였기에 당연히 군부세력의 혁명공약에 대한 얘기들이 오갔다. 당시 일부에서는 그 공약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하기도 했으나 김대중은 쿠데타 세력이 정체를 드러낼 것이라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희호는 마음을 열고 말을 들어주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쪽이었다. 그녀는 시국을 읽는 김대중의 눈이 비범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에게 그녀는, 이지적이지만 교만한 기운이 없고 편안한 '누나'같은 사람이었다. 두 살 연상이라는 점이 그런 느낌을 더 키웠을까.

"이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 이희호가 가졌던 감정은 이런 것이었다.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뤄낼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 겨울 김대중은 병을 앓았다. 이희호는 김대중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내내 걱정이었다. 김대중은 자리에 누워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고백을 하고 싶지만, 상대는 당당한 여성계 지도자였고 자신은 생계도 꾸리기 힘겨운 가난뱅이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다. 1962년 3월에야 그는 병석에서 일어나 명동으로 달려왔다. 살이 빠져 야윈 모습으로 그녀 앞에 선 김대중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눈물이 얼핏 비쳤다. "많이 아팠어요. 그리고...보고싶기도 했고..." 이 말에 이희호도 울고 말았다. "저도요. 찾아가 보고 싶었는데...사람들 이목 때문에..." 순간, 김대중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랑합니다. 희호씨."

# 주위에서 뜯어말렸던 결혼 

봄이지만 아직 오슬오슬 추웠던 파고다공원을 걸으며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눴다. 문득 김대중이 청혼을 했다. 그때에도 뛰어난 달변가였던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하지만 내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돌봐주기를 바래요. 내 모든 것을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희호씨."

이희호의 주위에서는 결혼을 뜯어말렸다. 두 아이가 딸린 홀아비에 빈털터리. 전셋집에는 몸이 불편한 홀어머니와 심장판막증을 앓는 여동생. 그런 곳에 미국 유학파 여성계 지도자가 시집을 가겠다니, 모두들 경악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인격과 포부를 아는 이들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으며 격려를 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는 큰 인물이다. 결혼생활에 어려움이야 있겠지만, 사람 하나만 보려무나." 결혼 일주일 전에 그녀는 김대중을 아버지에게 데리고 간다. 아버지는 한참을 바라보다 가만히 말했다. "그래, 잘 살아라."

# 나는 이희호의 남편입니다 

1962년 결혼한 뒤 열흘 만에 신랑 김대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죄목은 '반혁명'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민주화 운동가와의 동행은, 그야 말로 가시밭길이었다. 1972년 미국에서 한국의 독재를 고발하던 남편에게 그는 "더 강하게 투쟁을 하십시오"라고 편지를 쓴다. 옥중의 남편에게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쓰기도 한다. 1977년 김대중이 진주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그녀는 집의 난방을 껐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이 교도소에 있는데 나만 따뜻할 수 없다. 그녀는 냉방에 꿇어 엎드려 기도하다가 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다. 1980년 김대중은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희호는 이렇게 편지를 쓴다. "당신의 생이 평탄하지 않기에 나는 더욱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유난한 강했기에 고난의 상을 받은 것입니다."

1997년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이희호는 '영부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영부인이라 부르지 말고 나이가 든 사람이니 '여사'로만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 부인 호칭이었던 '영부인'이 사라지는 건 이때였다. 김대중은 아내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희호의 남편입니다."

                                    이상국 논설실장 




 
어린이꽃이 피었습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네티즌 의견 0
    0 / 300

    실시간 급상승

    9.9초 더보기

    아주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