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ㆍ유시민ㆍ황교안 대권잠룡 사모곡…"인생의 고비마다 길잡이 돼 주신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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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김도형.박성준 기자
입력 2019-05-24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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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는 하늘로 떠나셨지만, 늘 아스라이 먼 곳에서 빛나고 있는 별 같은 존재다.

여야 잠재적 대권주자들로 꼽히는 인사들의 공통점은 가난과 역경을 견디면서도 자식들을 헌신과 사랑으로 뒷바라지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낙연 국무총리,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어머니는 인생의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길잡이가 돼 주셨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 어머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고스란히 책에 담아내기도 했다.

지난 22일 어머니를 떠나보낸 유 이사장은 장례식장에서 조화와 조의금을 받지 않는 대신 조문객들에게는 고인과 유 이사장 등 6남매가 함께 쓴 ‘남의 눈에 꽃이 되어라’라는 제목의 가족 문집을 나눠줬다.

유 이사장은 기자들에게 “어머니가 2년 반 전에 편찮으시고 나서 언제일진 모르지만 (이런 날이 오면) 조문 오신 분들에게 감사표시로 하나씩 드리면 좋지 않을까 해서 자녀와 손주들이 글을 쓰고 묶고 어머니 구술기록을 받은 것”이라고 가족문집에 대해 설명했다.


◆이낙연 국무총리의 어머니 진소임 여사 -채소 장사하며 7남매 지극정성 뒷바라지

“어렵고 외로운, 누구와도 상의하기 어려운 고민이 생기는 일이 많을 때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었는데 어머니가 이것저것 가르쳐주시는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를 뵙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더라. 어쩌면 ‘마마보이’인지도 모른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가족문집 ‘어머니의 추억’에서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힘은 바로 어머니였다고 고백했다.

‘어머니의 추억’은 지난 2006년 어머니 팔순모임 때 이 총리의 일곱 남매가 자식을 반듯하게 길러주신 어머니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2007년 발간한 책이다. 

가난한 농가로 시집 온 어머니는 농사일과 채소 장사를 하며 자식들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이 총리는 “가난과 우환에 짓눌린 집안에서 어머니는 평생 전쟁 치르듯이 사셨다. 그런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으셨다"고 어머니를 회고했다.

이 총리는 이 책에서 “가을농사를 마치고 어머니는 게를 잡으러 다니셨는데 고향에서 영광군의 6∼7㎞ 백수해변이나 그곳에 게가 없어지면 전북 고창군 심원 해변까지 다니셨는데 왕복 50㎞가 훨씬 넘는 거리를 걸어다니셨다”고 회상했다.

이 총리 위로 형이 두 분이 있었는데 6·25 전쟁통에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장남이 된 이 총리를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돌봤다고 한다. 이 총리는 “제 생일이면 어머니는 작은 시루에 떡을 하셨는데 그 떡시루를 안방 윗목에 모시고 떡 위에 작은 종지를 올려 참기름에 실을 달아 불을 켜고 무엇인가 비시는” 어머니의 모습도 아련히 기억했다.

평생 야당의 지방 당원으로 살아오신 아버지가 민정당으로 합류하려고 하자, 어머니는 “내가 당신을 만나 소박맞은 것도 참고, 시앗 본 것도 참았지만, 자식들을 지조 없는 사람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못 참겄소” 라며 아버지의 여당행을 막았다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민주당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할 때 이 총리에게 동참을 권유했는데, 그런 와중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고 한다. “나다. 신당 가지 마라 잉!” 어머니는 그 말씀만 하시고 전화를 끊으셨다고 한다. 이 총리는 민주당에 남았다.

이 총리는 15년 동안 같은 보좌관과 함께 지내는 등 의리와 지조의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인 2016년 4월 13일 오전 당시 이낙연 전남지사가 어머니 진소임님, 부인 김숙희씨와 무안군 삼향읍 제5투표소(삼향읍 남악출장소)에서 투표하고 있다. [사진=전남도청]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어머니 서동필 여사-  민가협 ‘욕쟁이 아지매’로 자식들과 민주화길 함께..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지난 22일 어머니 고(故) 서동필 여사의 별세 소식을 알리며 “어머니는 병상에 계셨던 지난 2년 반 동안,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감과 자부심을 여러 차례 표현하셨다”며 “다시는 목소리를 듣고 손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은 아쉽지만 저는 어머니의 죽음이 애통하지 않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담담하게 보내드렸다”고 적었다.

어머니의 삶에 대한 아들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유 이사장의 어머니는 전두환 독재정권 당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에서 ‘욕쟁이 아지매’로 통했다. 아들 시민이 1985년 4월 민주화운동으로 징역을 살게 되면서부터다.

가족문집 ‘남의 눈에 꽃이 되어라’에 담긴 어머니의 구술기록. “아이들의 집회와 시위, 농성장에도 빠짐없이 응원해주러 갔다. 경찰들이나 형사들이 우리 엄마들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돌격대’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중략) 아들딸, 남편, 가족들이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 무서울 게 뭐가 있었겠는가? 그저 우리는 죄없는 우리 새끼들, 우리 남편을 돌려달라고 싸운 것이다. 욕도 하도 많이 해서 욕쟁이 소리를 듣기도 했다.”

유 이사장뿐 아니라 장녀 유시춘 EBS 이사장, 4녀 유시주 희망제작소 기획이사도 독재정권 말기 구속됐다. 담뱃가게를 하며 ‘좋은 대학교’에 보낸 자식들이 힘든 길을 걸어갔지만 믿고 함께해준 셈이다.

유 이사장이 가족문집에 쓴 ‘근심, 자부심, 안도감’엔 어머니와의 일화 세 가지가 소개돼 있다.

고무줄총을 사기 위해 어머니 담뱃가게 돈통에 들어있던 10원짜리 지폐 슬쩍했을 때 부모님 얼굴에 드러난 ‘근심’, 서울대에 합격했을 때 대구 칠성시장 거래처 사람들 모두에게 자랑을 했던 어머니의 ‘자부심’, 막내 유시주 기획이사가 서울대에 입학했을 당시 부모님을 모시고 교정을 안내해 드렸을 때 드러난 ‘안도감’이 담겼다.

유 이사장의 이 글에서 “사실 어머니는 내가 두 번 구속된 것보다 두 번 대학에서 제적당한 것을 더 가슴아파하셨다”며 “그리고 아들이 정치를 하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셨다”고 밝혔다.

유 이사장이 대구 수성구에서 낙선한 후 경북대학교에서 경제학 교양 강의를 했던 시기, 어머니는 이렇게 물어봤다고 한다. “내 사는 동안에는 정치 안 하면 안 되겠나? 내 죽고 나면 니 맘대로 해도 되고….”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어머니인 서동필씨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우는 모습. 미디어몽구 영상 캡처[사진=미디어몽구 영상캡쳐]




◆황교안 한국당 대표의 어머니 전칠례 여사 - "너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라" 어머니로부터 받은 헌신적 기독교신앙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의 철학은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어머니인 전칠례 여사는 마흔 셋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황 대표를 낳았다. 황 대표의 가족은 6·25 발발로 연백에서 서울로 피란을 왔다.

어머니 전칠례 여사는 힘든 상황에서도 여섯 남매를 기르며 헌신적 삶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전칠례 여사의 머리는 항상 쪽 진 스타일을 구사했다. 이 때문에 어머니라기보단 할머니에 가까워 보였을 것이라고 황 대표는 자서전에 털어놨다.

황 대표는 많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어머니와 아버지를 골고루 닮았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특히 자식들에게 온유했고 막내를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고 황 대표는 설명했다. 이러한 기도와 헌신적 정신이 지금의 황 대표를 만들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알려진 황 대표는 어머니와 큰누나의 영향을 받아 교회에 간 것이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황 대표가 고등학교 졸업 후 집안 형편을 고려해 대학 진학을 머뭇거리자,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팔아서라도 대학 졸업장을 받는 모습을 보겠다"고 아들을 지지했다. 또 황 대표가 초기 대학에 만족스러워하지 못하고 방황할 때도 늘 기도를 해주시곤 했다고 한다.

황 대표는 검사로 재직할 당시 초기에 검사장과 성격이 맞지 않아 사표를 내려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렸는데, 어머니께서 극구 말리셨다. 당시 사표를 냈더라면 지금의 황교안은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머니는 생전에 “너보다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황 대표가 통영지청장으로 있었던 1995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황 대표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700만원을 발견했고 그 순간 남을 도우며 살라는 말이 떠올라 어머니의 이름을 딴 '전칠례 장학금을 만들었다.

처음엔 자신의 월급에서 120만원을 떼서 불우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았고 그 이후부터는 150만원, 180만원으로 장학금 규모를 계속 늘려왔다. 황 대표에 따르면 장학금은 벌써 20여 년 가까이 이어 오고 있다. 장학금을 수령하는 학생도 처음에는 3명이었던 것이 지금은 50~6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황 대표는 이러한 어머니의 가르침과 영향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하는 자세가 생겼다고 고백했다.
 

황교안 어머니 전칠례 여사 [사진= 황교안의 답 저서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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