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시샘]빈 집 - 기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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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2-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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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의 '빈집'

 
 





"대취한 일용은··· 울면서 춤을 춘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일용의 뺨에 누군가 뽀뽀를 한다. 아빠를 찾으러 온 딸 복길이다. 일용은 복길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그래도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자식들은 흙의 희망이다. 우리는 고향을 떠날 수 없다." 1986년 11월 8일 MBC 드라마 '전원일기'의 '배추편' 방송이 당국의 비위를 거슬러 갑자기 취소된다. 이 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의 일부다.

이 기사는 3년차 기자 기형도가 썼다. 이 파격적인 문장의 기사를 보고, 문화부 데스크가 글을 고쳤다. 그런데 기형도가 이 사실을 알고는 신문 제작 중인 편집부로 달려와 다시 원래대로 고쳤다. 이 ‘사건’으로 이 건방진 기자는 편집부로 발령이 났다. 이후 그는 어느 심야영화관에서 영원히 잠든 채로 발견됐다. 그를 몹시 아꼈던 문학평론가 김현은 “그렇게도 편집부로 가기 싫어하더니···”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의 시 ‘빈집’을 읽으면, 마치 한 시인의 절명시를 읽는 것 같이 기분이 애틋하고 참담해진다. 창가에 겨울 안개가 떠돌고 무심히 촛불이 일렁이는 밤, 씌어지지 않는 글 때문에 유난히 짧았던 밤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은 글을 쓰는 모든 이에게 닥쳐오는 절대고독의 오브제들이다.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자폐(自閉)의 영혼 기형도가 눈에 선하게 보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가엾은 내 사랑.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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