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의눈]새 대통령비서실장 노영민의 첫마디 '춘풍추상'과 권력의 '내로남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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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19-01-0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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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노영민 신임 대통령비서실장.



8일 대통령 비서실장에 임명된 노영민(62)은 "춘풍추상(春風秋霜)이란 글은 비서실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이 새겨야할 성어"라고 말했죠. <춘풍추상>은 작년 2월 문재인 대통령이 각 비서관실에 선물한 액자입니다. 명나라판 명언집인 채근담(홍자성이 편집 저술한 책)에 나오는 글귀, 지기추상 대인춘풍(待人春風 持己秋霜)에서 따온 말입니다. 이 액자의 글씨는 고 신영복선생이 쓴 것이며,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합니다'라고 한글 풀이도 곁들이고 있습니다. 

대인춘풍의 대인(待人)은 '남을 대하기'라는 의미로 쓴다면 대인(對人)이 맞겠으나, 기다릴 대(待)를 굳이 쓴 것은 뒤에 댓구어를 이루는 글자인 지(持, 가질 지)와 형상이 유사한 맛을 살리기 위한 것도 있었겠고, 단순히 남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해 인내하고 포용하는 정신을 '기다림'으로 표현한 것일 겁니다. 즉, 남의 진가를 알기 위해 참고 기다리는 것, 남의 능력 발휘나 성장 시간을 기다려주는 것, 이것이 대인(待人)입니다. 봄바람이 하는 일과 같습니다. 봄바람은 생명을 일시에 깨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훈풍으로 초목의 생장을 돋웁니다. 억지로 권하거나 강제로 일으키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도록 돕습니다. 이 봄바람 정신이 대인춘풍입니다. 
 

[고 신영복 선생이 쓴 '춘풍추상'.]



지기추상의 지기(持己)는 '자신을 지키기'라는 의미로,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과 자신이 했던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가을 서리는 초목을 시들게 하고 잎을 떨어뜨려 낙목으로 남게 합니다. 그러면서 추위 속에서 자신을 냉혹하게 성찰하게 합니다. 물거울에 비친 자기를 돌아보며, 스스로 부족했던 것과 지나쳤던 것들을 살피며 바로잡고자 하는 정신입니다. 가을서리 정신이 바로 지기추상입니다.

신영복 선생이 이 나라 청와대 비서관들을 위해 이 글을 썼을 리는 없고, 다만 모든 사람이 지켜야할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했기에 쓴 글일 것입니다.  봄바람이 어떤 생명도 거부하지 않고 다 키워내듯 포용력과 부드러움과 인내심으로 타인을 살피고 북돋아주는 일을 하자. 가을서리가 한점의 티끌도 허용하지 않고 나뭇잎과 허튼 가지를 쳐내듯 단호함과 냉철함과 투명함으로 자기를 다시 지키고 본연의 업무를 돌아보자. 이런 보편정신을 거기에 담았을 것입니다.

문대통령이 이 액자를 걸고, 노영민 신임 비서실장이 이 글귀를 다시 강조한 것은, 권력이나 권력 주변의 존재가 흔히 잘못 갈 수 있는 對人秋霜 持己春風(대인추상 지기춘풍)의 약점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권력이 남을 대할 땐 추상같지만 자신을 대할 땐 봄바람같이 흐물흐물할 수 있다는 점 말입니다. 권력이 남일 땐 그렇게 잘 보이던 것이 자신이 권력일 땐 안 보이게 되는 비밀. 요즘 흔한 말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채근담 버전입니다. 노영민은 '내로남불'의 이상한 안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엄격한 자기 관리와 성찰로, 권력의 초심을 되찾고 유지하는 서릿발을 기대해보며...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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