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고전문학 산책] “산은 높이가, 물은 깊이가 중요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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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야 청운대 중국학과 교수(고대문학 박사)
입력 2018-07-19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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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나라 문인 류위시의 ‘누실명’으로 본 삶의 가치

[신민야 청운대 중국학과 교수(고대문학 박사)]

“산은 높은 데 있지 않다, 신선이 살면 명성이 있게 된다(山不在高, 有仙則名). 물은 깊은데 있지 않다, 용이 살면 신령스러워진다(水不在深, 有龍則靈).”

중국 당나라 문인 류위시(劉禹錫·유우석)의 글 ‘누실명(陋室銘)’의 첫 부분이다. 산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그 높이가 아니고, 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그 깊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속에 누가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누실(陋室)’은 ‘누추한 집’이란 뜻이다. ‘명(銘)’은 고대에 기물 위에 새겨서 자신을 경계했던 글 혹은 묘비 등에 새겨 그 사람의 공덕을 칭송했던 글을 가리킨다.

자신의 집이 누추하지만 집은 외관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안에 덕과 인품을 갖춘 사람이 살아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덕과 인품을 갖춘 사람은 물론 류위시 자신을 말한다.

류위시는 당시 정치개혁에 참여했다가 실패해 지방관으로 쫓겨났는데 ‘누실명’은 대략 그 시기에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지방관으로 좌천돼 비록 누추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신선처럼, 용처럼 존재감 있는 자신이 살고 있기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인술(仁術)로 명망이 높은 의사 김인권

류위시의 ‘누실명’을 읽다가 문득 몇 년 전 읽었던 신문 인터뷰 기사가 떠올랐다. 서울대 졸업식에서 “너무 좋은 직장 찾지 말라”고 축사를 했다는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 인터뷰였다.

너도나도 좋은 직장을 가지려고 애쓰는 요즘 너무 좋은 직장을 찾지 말라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인터뷰 기사를 다 읽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됐다.

인공관절 수술의 명의인 김인권 원장은 서울의 유명 대학병원들에서 오라고 했지만 가지 않고 여수애양병원의 정형외과 과장으로 부임해 30년 넘게 그곳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고 한다.

다른 병원의 명의들은 한 시간이 걸리는 인공관절 수술을 그는 12분이면 끝낸다. 수술을 많이 할 때는 하루에 30건 넘게 하기도 하는데, 아무리 바빠도 환자가 원하는 날에 수술해준다고 한다. 전국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자신이 바쁘다고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인터뷰 기사를 읽고 여수애양병원이 비록 겉이 화려한 병원은 아니지만 김 원장의 향기로운 인품으로 인해 진정한 일류병원이 됐다는 생각을 했다. 중국 고대 문인 류위시 식으로 말하면 병원은 그 외양의 화려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품과 실력을 겸비한 김 원장 같은 훌륭한 의사가 있을 때 절로 명성이 나는 것이다.

◆'쌀딩크'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박항서

박항서 감독하면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 옆에서 열심히 선수들을 지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잊고 있었던 그 박항서 감독을 최근 TV 보도에서 보게 되었을 때 감회가 새로웠다. 베트남 국가대표 감독으로 부임한 지 3개월 만에 2018년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준우승으로 이끌면서 현지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체격이 작은 베트남 선수들의 단점을 빠르고 순발력 있는 축구를 할 수 있는 장점으로 바꾸고, 선수들의 눈높이에서 가능하면 그들과 많은 것을 함께 하는 따뜻한 리더십으로 베트남 국민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훈훈한 이야기 뒤에는 그가 베트남 국가대표 감독이 되기 전 한국에서 겪었던 힘든 시간이 있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때 동메달에 그치면서 대표팀 감독에서 경질됐다. 이후 소외 계층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기도 하고, 3부 리그 축구단의 감독을 맡기도 하면서 그는 한국 축구계에서 그는 점차 잊혀갔다.

박 감독은 돌파구로 해외 감독 자리를 알아봤고 베트남 축구협회 면접에서 기동력 있는 축구를 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받아들여져 베트남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됐다.

그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그는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축구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최선을 다하려 했다고 한다.

우리는 보통 외적인 환경을 많이 중시한다. 훌륭한 건물, 번듯한 병원, 화려한 직장 등은 류위시 식으로 말하면 ‘높은 산’과 ‘깊은 물’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외적인 것은 결정적인 요소가 되지 않을 것 같다.

어디에 있건 그곳에 있는 사람이 자존감과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면 그가 있는 그곳은 저절로 이름이 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류위시가 ‘누실명’ 마지막에서 인용한 공자의 말이 유독 가슴에 와 닿는다. “군자가 있는 곳에 어찌 누추함이 있으리오(何陋之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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