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김정은이 보낸 소중한 ‘예방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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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8-05-17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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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칼럼]
 

[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남북관계가 풀리면 남남갈등도 완화되는 게 순리일 터. 적(敵)하고도 손을 잡는데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현실은 정반대다. 여야 간에 날 선 공방부터 벌어진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내로남불’이 여기서도 작동하는 걸까. 내가 주도하는 관계개선은 진정한 개선이고, 상대방의 개선 노력은 퍼주기나 기망(欺罔) 당한 결과쯤으로 보기 때문일까. 여야 간에 북한관(觀)이 그만큼 다르고 상호 불신 또한 깊다는 반증일 게다.

북한이 16일 남북 고위급회담을 돌연 취소하자 여권은 기세가 한 풀 꺾인 듯하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정확한 상황이 확인되기까지 (야당은) 억측을 자제해 달라”고 톤을 낮췄다. 야당은 다시 공세의 끈을 죄는 모양새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판문점 선언 하나로 핵도 사라지고 평화가 온 것처럼 무장해제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김정은이 이번엔 자유한국당 손을 들어줬다는 말도 나온다.

대외정책을 위한 협상을 양면게임이론(Two-level game theory)으로 설명한 사람은 하버드대학의 퍼트남(Robert D. Putnam) 교수다. 협상이 성공하려면 상대국(상대방)과의 합의도 중요하지만 그 합의가 국내 유권자들로부터 비준(동의)을 받을 수 있는 합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적·국내적으로 모두 합의가 가능한 '하나의 세트로서의 합의(win-set)'라야 한다는 얘기다. 판문점 선언에 대한 국회비준 문제로 여야가 맞서 있는 우리에겐 시사하는 바가 많다.

메이어(Frederic W. Mayor)는 정권이 국가 간 합의를 자국(自國)의 강경파들에게 팔(설득할) 때에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상대 국가의 강경파들도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쪽 강경파들의 반응이 그쪽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북한의 고위급회담 일방 취소가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비롯한 미 강경파들의 거친 입에 대한 북 군부 중심세력의 반발에서 비롯됐다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고 보면 대단한 통찰력이다.

대외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있어서 국내 변수의 중요성은 늘 강조돼 왔다. 외교정책이 과거엔 국가 간의 힘의 위계에 따라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이른바 외부-내부(outside-in) 접근의 결과였다면, 탈냉전이 시작된 1970년대 이후엔 사회적 요구의 증가 등으로 인해 내부-외부(in-outside) 접근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처럼 국민의 동의와 수용 여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북정책 모색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권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을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물론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지지율은 국정수행 평가조사에서 83%(한국갤럽)가 나올 정도로 높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지율과는 별개다. 야당부터가 짙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지율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매사가 자신의 의지대로만 가는 것도 아니다. 고위급회담 취소와 같은 일이 또 생기면 여론은 순식간에 돌아선다.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가 자기들만의 잔치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역시 배려가 약(藥)이다. 평창올림픽 때 민주당 소속인 최문순 강원지사가 설을 맞아 강릉의 한 호텔에서 북한 응원단과 기자단 250여명에게 떡국을 대접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저런 행사 하나쯤은 간청을 해서라도 야당에 맡겼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들은 널려 있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밥 한 끼 먹는다고 다가 아니다. 늘 마음을 열고 반대편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여야 한다.

야당도 문제가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판문점 선언을 “남북이 합작한 위장 평화공세 쇼”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단순한 사안인가. 칼로 무 자르듯 ‘위장 쇼’라고 규정해 버리는 순간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해진다. 생산적인 논의는 물론이고 야당 입장에선 효과적이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좋은 소재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이성적 판단과 전략이 결여된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대응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거듭 확인한 건 우리 내부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도보다리를 걷고 둘이서만 머리를 맞댔을 때 일부 진보 인사들과 매체가 보여준 득의만면(得意滿面)하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해 하던 표정은 그 상상력과 담대함 때문에 오래 기억될 듯싶다. 서울에서 신의주를 거쳐 베이징까지 고속철도(KTX)가 놓이고, 학생들은 여름이면 개마고원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는 날이 당장에라도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고위급회담 취소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더없이 좋은 예방주사다. 북을 다룬다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주사다. 비핵화 협상이라는 험난한 여정을 앞두고 안 맞았더라면 크게 후회했을 뻔했다. 북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의 고위급회담 취소 담화에서 한·미 양국에 대한 섭섭함과 분노를 마구 쏟아냈다. 속은 시원했을지 몰라도 구절구절에서 그들이 뭘 원하고, 뭘 두려워하는지가 영상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홧김에 저지른 실수겠지만 이 또한 망외의 소득이다. 예방접종과 함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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