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칼럼] 절제(節制)가 회담을 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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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입력 2018-09-1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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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재호 초빙논설위원 · 동신대교수(정치학)]
 


평양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자못 크다. 비핵화 협상에 작은 돌파구라도 만들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흥분과 감동은 1, 2차 회담으로 충분하다. 4·27 합의(판문점 선언)는 역사적이라 할 만했고, 이벤트와 수사(修辭)도 넉넉했다. 이제 필요한 건 실질적 성과다. 적어도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자신의 입으로 비핵화 시한을 포함한 개략적인 일정쯤은 밝혀야 한다. 그래야 군사적 긴장완화 방안과 한반도 신(新)경제구상도 제대로 논의될 수 있다.

그동안 상궤를 벗어난 일들이 적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처음 밝혔다는 ‘비핵화 시한’이 공개된 건 존 볼턴 미 안보보좌관에 의해서였다. 4·27회담에서 김 위원장이 문 대통령에게 ‘2년 이내 비핵화’ 의사를 밝히자 문 대통령이 ‘1년 이내’로 역제의했고, 김 위원장이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 간 대화를 제3국이 이런 식으로 공개하는 건 외교적 결례다. 이처럼 중요한 발언을 볼턴을 통해 들어야 하는 우리 국민 역시 당혹스럽다.

그런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왜 비핵화 시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까. 김 위원장은 평양회담을 앞두고 준비 차 방북한 우리 측 특사단에게도 “트럼트 대통령 첫 임기 내 비핵화가 실현됐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단장인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지난 6일 밝혔다. 비핵화 시한에 대해 또 입을 연 것인데, 이 역시 미국엔 하지 않은 말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에 대고 직접 그런 말을 하면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하는 것이다. 중재자를 자임한 만만한 한국을 통해 슬쩍 흘림으로써 ‘간’만 보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평양회담에서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그의 육성으로 듣고 싶다. 그동안 그가 했다는 ‘비핵화 의지 표명’은 모두 전언(傳言) 수준이다. ‘옆에서 들어 보니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졌다’는 정도다. 김 위원장은 여전히 4·27 판문점 선언 말미에 적힌 한 줄, ‘남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미국에 대해서도 6·12 싱가포르 북·미회담의 공동합의문 제3항, ‘판문점 선언을 재확인하며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기로 서약한다’고 한 게 전부다.

문 대통령의 어깨가 실로 무겁다. 김 위원장으로부터 보다 구체적인 비핵화 약속을 받아내야 한다. 그래야 올가을 김 위원장과 트럼프 간 2차 북·미 정상회담도 순조롭게 열려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정착을 위한 선순환 프로세스가 작동할 수 있게 된다. 잘만 하면 중견국가의 리더십에 관한 선도적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허나 쉽지 않은 일이다. 북·미가 표면적으론 종전선언이 먼저냐, 핵 신고가 먼저냐를 놓고 맞서 있지만 이면엔 깊은 불신이 도사리고 있다. 문 대통령이 과연 김 위원장을 설득할 수 있을까.

평양으로 출발하기 직전까지 우리 측 대표단은 남북 간 군사적대 해소와 신뢰구축이 이번 회담의 핵심 의제 중 하나임을 애써 강조했다. 정 실장은 13일 서울안보대회 기조연설을 통해 “회담에선 상호 신뢰구축과 무력 충돌 방지에 관한 합의가 이뤄지도록 추진할 것”이라면서 “서해 평화수역 설치에 대해서도 구체적 협의가 이뤄지고 있고, ··· (이 모든 게) 사실상 초보적 수준의 운용적 군비통제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군사적 적대 해소도 필요하나 지금과 같은 핵(核) 국면에선 아니다. 역시 비핵화가 관건이다. 우려되는 건 비핵화 논의에 진전이 없다고 군사 분야에서 성과를 내려고 서두르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서해평화수역 설치만 해도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직결돼 있다. 자칫하면 “핵문제 해결하러 간다더니 NLL만 내주고 왔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부디 신중하고 절제했으면 한다.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CBM) 논의가 처음도 아니다. 노태우 정권 이래 늘 거론돼 왔고 몇 차례 국방장관 회담까지 있었지만 의미 있는 진전은 거의 없었다.

경협도 마찬가지다. 이 정권은 남북관계 개선을 역사적 소명, 시대의 당위로 여기지만 국민의 주된 관심은 돈이다. 2007년 노무현 정권 때 북과 합의한 10·4 선언만 해도 이를 실행하려면 153조원이 든다고 금융위원회는 2014년 추산했다. 이 정권이 추진하는 판문점 선언 사업에는 10·4 선언 사업까지 망라돼 있어서 그 비용이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역사적인 평양회담이 퍼주기 논란을 자초해선 곤란하지 않겠는가.

한·미관계가 걱정이다. 미국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비핵화의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남북관계의 과속’에 경고음을 울려왔다. 이대로 가면 한·미동맹이 크게 훼손될 수 있다.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기면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도 불안정성이 증대된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줄고 한국의 대북(對北) 억지력에도 구멍이 뚫린다. 상대적으로 중국의 영향력은 커진다. 러시아엔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주고, 일본엔 군사대국화로 가는 고속도로를 닦아주게 된다.

문 대통령은 평양으로 출발하기 전날 “새로운 걸 내놓기보다는 김 위원장과 흉금을 털어놓고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게 이번 회담의 목표”라고 했다. 의례적인 언사로만 들리지 않았다. 엄혹한 현실에 대한 신중하고도 겸허한 인식과 고민이 느껴졌다. 그런 절제 속에서만 의미 있는 결실이 나오는 게 남북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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