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배철현의 아침묵상] 14. 허영虛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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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입력 2017-09-04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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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배철현 교수]

 
자화자찬
우주 안에 존재하는 만물들은 각자의 고유한 존재 이유를 가진다. 자기 자리를 잡고 서 있는 나무는 나무대로, 산천을 유유히 흐르는 강은 강대로, 하늘을 나는 새는 새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수행한다. 그래서 아름답다.

인간도 원래 그랬다. 인간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발현하면,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된다. 우주는 137억년 전에 빅뱅으로 태어났다. ‘없음’에서 ‘있음’으로 변했다. ‘없음’을 가정하지 않으면 ‘있음’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없음’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라면, 우리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생물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과학자들은 ‘무생물’로부터 생물이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신념체계처럼 들린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여기는 인간이란 종(種)은 겨우 30만년 전에 등장했다. 우주의 장구한 역사 안에서 보면 가장 최근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주를 이해하는 유인원’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여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른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용어엔 인간의 허영(虛榮) 가득한 자화자찬(自畫自讚)이 들어 있다.
 
아미고 데이(imago dei)
서양에서 인간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제공한 구절은 ‘창세기’ 1장 26절에 등장하는 인간에 대한 묘사다. 기원전 6세기 초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왕족, 귀족, 지식인, 예술가, 시인과 문필가들을 모두 바빌론으로 잡아갔다. 창세기 1장을 저술한 작가는 그들 중 한명이다.

그는 인간을 신들의 노예로 묘사한 바빌로니아의 인간창조신화 ‘에누마 엘리쉬’(Emuma Elish)를 읽고 분개해, 인간의 존엄성을 표시할 감동적인 시를 새로 썼다. 그것이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우주창조와 인간창조에 관한 시다. 그는 신이 인간을 ‘신의 형상대로, 신의 모양대로’ 똑같이 창조했다고 서술했다. 서양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묘사한 이 사상을 라틴어로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신의 형상에 담긴 깊은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인간은 신을 대신해 자연을 보호하고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이며, 동물들을 소중한 생명으로 동등하게 돌봐야하는 임무를 부여받는 ‘사육사’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동료인간들을 신처럼 대하라는 명령이다. ‘신의 형상의 창조된 인간’이란 인간이 신이 되어 만물의 영장으로, 자연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동물을 자신의 입맛대로 처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곡해돼 왔다.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망각하고 남용할 때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병이 바로 ‘허영’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두려움
허영은 자기 자신에 몰입해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창조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자신이 열망하는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자신의 습관을 통해 자신으로 만드는 수련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모습을 막연히 부러워하기 시작한다. 허영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응시할 능력이 없어 주위 사람들의 평가에 기생한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남들의 평가에 사로잡혀 있다. 21세기 IT 세계는 이 정신병을 급속하게 전파했다. 우리는 한 순간도 SNS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허영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을 숨기고 사회가 인정하는 그 틀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수정한다. 대한민국이 성형공화국이 된 이유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남들의 기준에 억지로 맞추려는 허영 때문이다.
 
허영은 우리를 쇼 윈도로 만든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계속해서 감추고 다른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자신을 재배열하고 특정한 부분만을 강조한다. 이런 행위는 결국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1887년에 저술한 미간행물 ‘서광’(Daybreak)의 어록 39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허영을 제거하십시오. 열정적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허영을 초월합니다.”
 
헛되다!
고대 이스라엘 지혜의 왕인 솔로몬은 인생을 돌아보며 ‘전도서’ 1장 2절에 다음과 같이 외쳤다. “헛되고 헛되다. 스승이 말했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여기서 스승이란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고 인생을 반추하는 솔로몬이다. 그는 한 문장에서 ‘헛되다’라는 단어를 다섯 번이나 사용했다. 아마도 이 세상 모든 경전과 고전을 포함해, 동일한 단어를 한 문장에 다섯 번 사용한 예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헛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벨’(hebel)이다. 헤벨의 원래 의미는 ‘안개·수증기·연기’이다. ‘안개’가 눈을 가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리지만, 태양 빛이 등장하면,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히브리어 문법에서 최상급은 두 개의 단어를 병렬 반복해 표현한다. 솔로몬의 말을 다시 번역하자면 “정말 헛되다. 스승이 말했다. 정말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이다.
 
세디아 게스타토리아(Sedia gestatoria)
인간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해야 허영에서 벗어날 수 있다. 1409년 알렉산더 5세가 교황으로 취임할 때 시작한 특별한 의례가 있다. 새로 선출된 교황이 성 베드로 성당의 성물안치소에서 ‘세디아 게스타토리아’(Sedia gestatoria)라는 특수한 가마를 타고 교황즉위식을 진행하기 위해 행진한다. 그 행렬은 단숨에 즉위장소로 가지 않고 세 번 멈추고 특별한 통과의식을 거행한다. 이 행렬이 멈출 때마다 행렬주관자는 새로 선택한 교황 앞에 무릎을 꿇는다. 행렬 주관자의 손에는 불타는 아마천이 매달려 있는 동으로 된 지팡이가 들렸다.

그는 새로 선출된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Sancte Pater, sic transit gloria mundi!(오, 거룩한 베드로여! 세상의 영광은 어찌 빨리 사라지는지!)” 그는 이 구절을 세 번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지팡이 위에 매달려 불타고 있는 아마천은 연기와 같이 금세 소진될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고유한 직이 ‘교황’이었고, 교황이라는 막강한 권력도 자신의 순환대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덧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한다. 교황은 이 지팡이를 부여받고 교황직을 수행하게 된다. 이 지팡이의 이름이 바로 ‘식 트란시트 글로리아 문디’, 즉 ‘세상의 영광은 어찌 빨리 사라지는지!’다.
 

[사진=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아람 베르나르트의 유화 '허영'(Vanitas)]


네덜란드인들의 ‘바니타스’
이 그림은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아람 베르나르트의 ‘허영’(Vanitas)이란 유화다. 허영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배니티’(vanity)와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단어다. 이 그림엔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의 관심이 모두 표현돼 있다. 오른편에 펼쳐진 도해서는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이 개척한 동인도회사 지도다. 오른편에 자신들이 개척한 국가 이름들이 나열돼 있고, 그 아래엔 자신들의 날인이 찍혀 있다.

왼쪽 밑에 펼쳐진 책은 네덜란드를 지배한 초기 백작들의 역사가 기록됐다. 책상 위엔 피리, 잉크스탠드 그리고 진주가 놓여졌다. 당시 귀족들의 지적이며 물질적인 허영의 상징들이다. 그림의 위쪽엔 지구본이 두 개 있다. 왼쪽 지구본은 군사·상업적 정복을 위한 지구본이고 다른 쪽 지구본은 동물이나 노예를 착취하기 위한 지구본이다. 그러나 이 지구본들은 왼쪽에 놓인 매정한 모래시계의 지배를 받아 사라질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나 자신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나를 남을 위한 쇼윈도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한 쇼 윈도로 만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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