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칼럼] '수요자 중심' 사고 전환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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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6-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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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영 서민금융진흥원장

"나는 당신이 나를 존중해 주기를 요구합니다. 나는 한 명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4월 직원들과 함께 관람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주인공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40년간 목수로 일하다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일을 그만둬야 했던 그는 경직된 복지시스템 운영 탓에 정부로부터 질병급여를 받지 못해 이 같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사진= 서민금융진흥원 제공]

영화는 다니엘이 질병급여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의 끈질긴 사투에도 복지부동하는 관공서 심사관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요즘 말로 '고구마 100개 먹은 기분'이 든다.

영화 속 그는 한 번의 전화상담을 위해 몇 시간이고 신호대기음만 나오는 수화기를 들고 기다린다. 직접 관청을 찾았지만 수급 요건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전박대 당한다.

허울뿐인 복지시스템에 환멸을 느낀 그는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시도하지만 소송 신청은 온라인으로만 가능했다. '컴맹'인 다니엘은 또다시 좌절했지만 어렵사리 항고 날짜를 잡았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항고 당일 심장병이 악화된 다니엘은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쓰러져 생을 마감한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영국의 복지제도를 통해 아무리 좋은 시스템이라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시스템 바깥에서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서민을 위한 각종 지원제도를 설계하는 정부는 물론 현장에서 수요자를 직접 마주하는 실무진 모두가 수요자 중심으로 사고를 전환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 영화는 말해주고 있다.

영화 속 이야기를 우리나라의 금융 시스템으로 치환해 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수익을 내야 하는 금융사들은 신용과 소득을 기준으로 대출을 심사한다. 그러다 보니 신용등급과 소득이 낮은 서민들은 제도권 금융에서 지속적으로 소외돼 왔다. NICE신용평가정보에 따르면 은행·저축은행 등 제도권 금융 이용이 제한되는 신용등급 6~10등급의 저신용자 수는 지난해 말 기준 약 800만명에 이른다.

정부는 이 같은 서민들의 금융 소외를 방지하고 재기를 지원하기 위해 미소금융, 햇살론, 바꿔드림론 등 여러 서민금융 지원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원제도가 중복되고 유사할 뿐 아니라 각기 다른 기관에서 운영되고 있어 어떤 상품이 적합한 상품인지 이용자들이 직접 찾아야 해 불편이 많았다. 한국에 또 다른 '다니엘'이 있다면 긴급 생활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본인이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난해 9월 23일 서민금융상품을 통합·관리하는 서민금융총괄기구인 서민금융진흥원이 설립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서민금융진흥원은 서민금융의 대상을 상품별로 세밀하게 설계하고 그 대상을 확대해 오고 있다. 서민금융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해왔다. 취약계층 및 청년 대학생 지원제도를 신설해 서민금융상품 지원대상을 확대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좋은 제도가 있어도 수요자들이 이용방법을 모르거나 절차가 복잡하다면 무용지물이다. 다니엘은 복지시스템이 없어 쓸쓸히 죽음에 이른 게 아니다. 실무 담당자들이 다니엘에게 한 번에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을 알려줬다면, 질병급여를 받기 전 긴급히 생활자금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최소한 한국에선 또 다른 다니엘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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