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올해 중국 주요일정, 굴기 커지고 대일압박 거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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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7-01-1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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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중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념일이면 5년, 10년 단위로 성대한 기념식을 진행한다. 기념일이 다가오면 각 언론매체들은 이를 집중조명하며 분위기를 띄우며, 당일에는 문화행사와 기념행사, 포럼 등의 각종 행사들이 진행된다. 행사에는 국가지도자들이 참석해 과거를 기리고 미래비전을 내보이며, 분위기를 한껏 고양시킨다. 주요 기념일을 통해 국가를 통합시키고, 인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셈이다. 특히 올해 가을에는 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가 예정되어 있다. 이들 기념일은 당대회를 앞두고 국가를 통합시키는 작용도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올해 주요 기념일들을 정리해본다.
 

덩샤오핑 추도회.[사진=바이두캡쳐]


◆2월19일 덩샤오핑 사망 20주년

1997년 2월19일 덩샤오핑(鄧小平)이 사망했다. 향년 93세. 덩샤오핑은 1904년 8월22일 쓰촨(四川)성 광안(廣安)현에서 소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9년 공산혁명에 뛰어들었으며, 1934년 비주류였던 마오쩌둥(毛澤東)을 지지하며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해 그의 유력한 참모로 성장했다. 1949년에는 창장(長江) 도하작전과 난징(南京) 점령을 지휘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1952년), 당 중앙 비서장(1954년), 정치국위원(1955년)을 거쳐 1973년 국무원 부총리에 올랐다. 문화대혁명 시기 좌천됐다가 1977년 복귀해 화궈펑(華國鋒)과의 권력투쟁 끝에 1978년 12월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의 기치를 내걸고 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덩은 중국을 개혁개방으로 이끌었고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궜다. 1989년 천안문사태 유혈진압의 최종 결정권자였음에도 그의 타계에 당시 중국의 인민들은 마치 아버지를 잃은 듯이 슬퍼했다.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마오쩌둥이라면 가장 고마워하는 사람은 덩샤오핑이다. 사망 2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행사들이 개최될 예정이다.

◆5월1일 네이멍구 자치구 성립 70주년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는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몽고족의 자치구다. 중국 내에서 몽고족은 약 600만명으로 55개 소수민족 중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2400여만명의 네이멍구 인구 중에서 몽고족의 비중은 약 20%가량 이루고 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한족이다. 몽고족은 위구르족이나 티베트족과 달리 비교적 중국 정부의 통치에 순응하는 편이다. 과거 만주족의 청나라가 대륙을 점령했을때 몽고족은 두갈래로 나뉘었다. 청나라에 협력한 몽고족의 땅은 훗날 네이멍구자치구가 됐다. 결국 청나라에 복속했으나 청나라에 반감을 가졌던 몽고족들의 땅이 현재 몽골국이 된다. 청나라 멸망이후 북부의 몽고족들은 분리독립운동을 벌였으며, 1946년 소련의 지원하에 주민투표를 통해 정식으로 중국에서 분리됐다. 그리고 중국은 그 이듬해인 1947년 5월1일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구인 네이멍구자치구를 설치했다.
 

충칭 해방비 거리.


◆6월18일 충칭 직할시 승격 20주년

쓰촨성은 예로부터 ‘파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파(巴)는 충칭(重慶)지역을 뜻하고 촉(蜀)은 청두(成都)지역을 뜻한다. 충칭은 인구 3200만명의 중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크기가 넓은 직할시다. 중국에는 이 밖에 베이징, 상하이. 톈진(天津) 등 3곳의 직할시가 있다. 충칭은 크기로 따지면 8만2000여㎢에 이르러 한반도 남쪽의 한국 크기에 육박한다. 충칭은 원래는 쓰촨에 속해 있었지만 1997년 6월18일 쓰촨 동쪽 지역을 나눠 충칭직할시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칭은 직할시로 승격된 후 서부대개발의 핵심지역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오고 있다. 지난해에도 충칭은 중국의 지역중 가장 높은 성장률을 거뒀다. 직할시 승격 20주년을 맞게 되는 올해 충칭은 대규모 기념행사를 준비중이다.
 

1997년 홍콩반환 의식.[사진=바이두캡쳐]


◆7월1일 홍콩반환 20주년

1997년 7월1일 자정 0시를 기해 과거 156년 동안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반환됐다. 이로써 홍콩은 중화인민공화국 홍콩특별행정구이자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실험무대로서 첫발을 내딛었다. 지난 2007년 홍콩반환 1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덩샤오핑 동지가 제창한 일국양제가 홍콩의 장기적인 번영과 안정을 보장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라는 사실이 실증됐다"면서 "일국양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광범위한 평가와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홍콩에서는 2014년 우산혁명이 일어나는 등 민주화열기가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우산혁명 주역들이 선거를 통해 입법회에 진출했다. 홍콩 반환 20주년을 앞두고 또다시 홍콩에서 민주화운동이 촉발될 가능성도 있다.

◆7월7일 77사변 80주년

중국 베이징 서남쪽 교외 부근인 허베이(河北)성 완핑(宛平)현 루거우차오(蘆溝橋, 노구교)부근에서 야간 군사훈련을 하던 일본군이 사병 한 명이 실종됐다는 이유로 1937년 7월7일 밤 노구교 지역을 점령했다. 이를 중국은 '77사변'이라고 하며, 일본은 ‘노구교사건’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는 즉각 대일항전을 선언했고, 이로써 8년간의 중일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노구교는 1189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3년만에 완성됐으며 길이는 266.5m, 폭은 7.5m이다. 청나라 초기인 1689년에 중건됐으며 청 건륭제가 다리 근처에 ‘노구효월(蘆溝曉月)’ 이라는 글을 새기고 정자를 세웠다. 중일전쟁의 시발점으로 세계적으로 지명도가 높으며, 서양인들은 이 다리를 ‘마르코폴로 브릿지’로 부른다. 일본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있는 중국은 77사변 80주년을 계기로 더욱 압박의 고삐를 쥘 예정이다.
 

 


◆8월1일 인민해방군 창건 90주년

1927년 8월1일 새벽 2시를 기해 주더(朱德), 저우언라이(周恩來), 허룽(賀龍) 등의 주도로 중국공산당이 장시(江西)성 난창(南昌)에서 난창봉기를 일으켰다. 중국공산당은 난창을 점령했지만, 국민당군의 역습을 맞아 5일만에 도시를 내주고 패주해야 했다. 이때의 무장 세력이 홍군(紅軍), 8로군을 거쳐 인민해방군으로 발전했으며 중국은 난창봉기가 발생한 8월1일을 건군(建軍)기념일로 삼고 있다. 난창봉기 당시 변변한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인민해방군이었지만 이제는 세계적인 강군으로 우뚝섰다. 눈부신 경제발전의 성과를 업고 군사굴기가 급속히 이뤄지고 있다. 육군은 물론 공군, 해군의 실력도 높아졌으며, 우주군, 로켓군의 전투력도 강국과 어깨를 겨눌 수준으로 올라섰다. 특히 시진핑 지도부 등극 이래 중국은 군사굴기와 해방군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관련 기념행사들이 성대하게 개최될 예정이다.

레이펑[사진=바이두캡쳐]


◆8월15일 레이펑 사망 55주년

후난(湖南)성 왕청(望城)현 태생인 레이펑(雷鋒)은 1960년 1월 인민해방군 입대와 11월 공산당 입당을 전후해 공산주의청년단 단원으로서, 그리고 인민해방군 전사로서 랴오닝(遼寧)성 푸순, 안산(鞍山) 등에서 주로 근무했다. 레이펑은 '모범노동자' '선진생산자' '절약표준병' '모범공청단원' 등 수많은 영예 칭호를 받았다. 부대에서 차량병으로 근무하던 레이펑은 1962년 8월15일 군용차량을 타고 부대로 돌아가던 중 차량전복사고로 2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사망 1년 후인 1963년 3월5일 마오쩌둥이 레이펑 따라 배우기를 주창하고부터 일약 유명인으로 떠올랐다. 그간 남긴 일기를 통해 다른 동료 병사를 위해 남모르게 노력했고 당과 인민에게 헌신했던 모습이 알려지면서 영웅으로 추앙됐다. 레이펑은 아직도 중국에서 영웅이다.

◆8월24일 한중수교 25주년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했다. 이로써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된 1949년 10월 1일 이후 43년간 단절 되었던 한반도 남쪽과 중국 대륙은 전면적인 정상적 관계로 들어섰다. 중국 외교부는 여러 차례의 전략회의 끝에 1992년 1월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결정했으며, 중국의 첸지천(錢其琛) 당시 외교부장은 1992년 4월 13일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 회의 참석차 베이징(北京)을 방문한 한국의 이상옥(李相玉) 외무장관에게 중국이 완전한 관계정상화를 위한 협상준비가 완료됐음을 통보했다. 그 후 한중 양국은 3개월 동안 비밀협상을 가진 후 공식수교에 전격 합의했다. 그동안 한중관계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지만 지난해 7월8일 한미 양국의 한반도 사드배치 발표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사진=바이두캡쳐]



◆9월28일 공자탄생 2560주년

중국은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 1913년 9월28일 처음으로 공자 제사를 지냈다. 공자의 탄신일이 언제인지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그때부터 중국인들은 공자 탄생일을 9월 28일로 여겨왔다. 중국에서 공자는 문화대혁명 당시 타도 대상으로 지목돼 중국 전역의 유서 깊은 공자묘들이 불타 사라지고 석상과 비석 등이 다수 훼손되기도 했다. 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기에 들어서면서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적 자산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중국 교육부는 세계 각국의 고등교육기관과 연계하여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공자학원을 설립하고 있다. 중국은 매년 공자탄생일을 맞아 여러가지 문화행사가 개최한다.
 

난징대학살 국가기념식.[사진=신화통신]


◆12월13일 난징대학살 80주년

일본은 77사변 이후 상하이(上海),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등을 차례로 함락시킨 후 1937년 12월13일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南京)마저 점령했다. 이날부터 ‘현대문명사의 최악의 한 페이지’라고 불리는 ‘난징대학살’이 시작되었다. 1946년 도쿄 국제군사재판에 제출된 통계에 따르면 난징 점령 후 6주 동안 조직적이며 집단적으로 학살당한 사람의 수가 19만 명이고 기타 피살된 사람이 15만 명이었다. 학살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일본군들은 누가 먼저 100명의 중국인의 목을 베는지의 시합을 벌였으며, 희생자들의 몸에 휘발류를 끼얹고 총으로 쏘아 불에 태워 죽이고, 어린아이들을 공중에 던져 총검으로 받아 꽂아 죽이는 일이 ‘오락’차원에서 행해졌다. 올해 난징대학살 80주년을 기념해 대일압박은 더욱 강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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