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2]최초 무역선 ‘앵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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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1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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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42)

  • 제3장 재계활동 - (37) 두각 드러내는 실력자들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마카오 무역과 홍콩 무역을 거쳐 공동 수출로 업자들이 홍콩을 드나들게 되면서 업계의 실력자들은 자연 두각을 나타냈다.

공동 수출 산업으로 현지 사정을 파악하게 되자 가장 먼저 화신무역(和信貿易)이 선두주자로 홍콩을 향해 무역선을 띄웠다. 화신무역은 1948년 4월 조선우선(朝鮮郵船) 소속 앵도환(櫻桃丸)을 빌어 홍콩으로 보낸 것이다. 1949년 2월에는 동아상사(東亞商事)가 역시 조선우선 소속 금천호(金泉號)를 홍콩으로 띄웠다. 한국 무역선의 대외 처녀(處女) 개척선(開拓船)이 된 것이다.

대일 항로(對日 航路)는 복잡한 한·일 관계로 별로 진전을 보이지 않았다. 최초의 출항허가를 받은 선박은 선어수출선(鮮魚輸出船) 제2 금길호(金吉號)였으며 1950년 3월의 일이었다. 한편 한국 선박의 대미 취항(對美 就航)은 극동해운(極東海運) 소속 고려호(高麗號)가 1952년 10월에 처음으로 항해를 떠났다. 이들 개척선들은 물론 적지 않은 난관과 싸워야 했으며 희생을 치러야 했다.

화신무역의 앵도환은 50만달러 상당의 물자를 싣고 있었다. 사장 박병교(朴炳敎)와 부사장 이규재(李奎載)는 한발 앞서 현지로 갔을 뿐 아니라 화신무역의 홍콩 대리점 자격의 장우공사(長祐公司)의 중국인 강경파(康鏡波)는 그들대로 선전을 힘써 현지 성도일보(星島日報)는 앵도환의 입항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에 이르렀고 현지 상인들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이윽고 홍콩 빅토리아 부두에 닿은 것은 4월 이었는데 벌써 폭염의 계절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송송 솟아오르는 기후에 선원들의 생활이야 오죽하겠는가.

선원들은 날이 갈수록 고통을 못 이겨 불평이 늘어 가더니 마침내 선상파업(船上罷業)이 단행되었다. 그러나 무료한 선상생활에 진력이 나서 일으킨 파업이었으므로 그 무류한 생활에 변화를 뜻하는 60여 선원 전원에 대한 금일봉씩의 배당으로 파업은 곧 수습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들이 정박하고 있는 사이를 누비고 달리는 정크통선(通船)이 있는가 하면 밤이면 고냥(姑娘, 처녀)들이 닻줄을 타고 배 위로 기어오르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파업은 수습되었지만 여자들을 배로 끌어올리는 것은 방치해 둘 수 없어서 생각다 못 해 인도인을 경비원으로 고용해서 배치하기까지 했습니다.”

하고 귀국 후 무역협회에 들른 박병교 사장은 껄껄 웃으며 목당에게 보고했지만 고충이야 오죽하였겠는가. 하지만 장사는 잘되었던 모양이어서 싣고간 한천(寒天, 우무)은 부르는 것이 값이었고 창연(蒼鉛, 비스무트)도 높은 값을 받았으며 용돈으로나 쓸 작정으로 싣고간 홍미삼(紅尾蔘)도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삼과 건삼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바람에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 남방 사람들의 기호에는 그런 품목들이 안 맞는 것을 그들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어쨌거나 수확이 뜻밖에 크자 귀항선엔 생고무와 신문용지 등속을 만재하고 그들은 돌아왔다. 박병교 사장의 홍콩 체류는, 2월에 나가서 8월에 돌아왔으니 반년 가까이 걸린 장기간의 해외 출장이었다.

첫 무역선의 성공을 확인한 동아상사가 뒤따라 당삼(糖蔘, 설탕을 넣어 가공한 인삼)을 만재한 금천호를 1949년 2월에 띄웠다. 동아상사의 이 처녀 무역선은 그러나 무참한 실패로 돌아가 동아상사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항해 도중에 석탄 공급을 받고자 닻을 내린 것이 잘못이었다면 잘못이랄까. 중국 상인들의 농락으로 배는 무한정 체선(滯船, 배를 항만 등에 정박시키는 것)이 불가피해져서 날이 갈수록 느는 것은 체선료(滯船料) 뿐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홍콩에 입항하여 당삼의 흥정에 들어갔으나 화상들의 담합술(談合術)에 말려들어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동아상사는 앞서 무역시찰단의 일원으로 나갔던 전무 장건식(張健植)이 현지에 눌러 앉아 연락을 취하며 만전을 기한 거사였는데 결과는 속수무책이 되고 만 것이다. 장건식은 상하이(上海)에서 뼈가 굵은 국제인으로 중국 무역에 한하여만은 베테랑이라고들 했는데 그도 화상(華商)의 담합엔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화신무역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앵도환에 2000근의 홍삼(紅蔘)을 싣고 나가서는 화상들의 담합으로 값이 맞지 않아 창고에 보관해 둔 채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재고는 뒷날 대한문화선전사(大韓文化宣傳社, 백낙승(白樂承))에게 인도되었던 것이다.

고려삼(高麗蔘)에 한하여 화상들은 관심이 컸고 필경은 그들은 담합에 말려들게 마련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쓰디쓴 참패였다.

그러나 제1차 무역선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화신무역은 제2의 도전을 시도하고 나섰다. 즉 그것이 소위 앵도환 압류사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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