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40]신탁과 반탁의 갈등 고조 속 친구를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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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7-1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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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장 재계활동 - (35) 설산(雪山)의 죽음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입법의원이 된 이후 주로 입법의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틈틈이 무역협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협회는 강성태(姜聲邰)에 의해 잘 운영되어가고 있어서 목당으로선 큰 부담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1947년 4월 16일의 제2회 정기총회에선 회칙을 개정하여 전무제(專務制)를 두기로 하고 강성태를 전무이사로 승진시키는 조치도 취했다.

목당은 이사로만 남아 종래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협회를 드나들었고,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 회장도 같은 입법의원이어서 협회 일은 자연 강성태가 도맡은 격이 되었던 것이다.

입법의원의 당선의원 45명은 중간파와 임정계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한민당은 상산 한 명이 끼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성립된 입법의원이었으나 1947년 1월에 가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는데, 재개될 공동위원회는 사실상 반탁(反託)을 주장하는 정당·사회단체는 협의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소련측 주장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이런 정세에 접한 입법의원은 마침내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게 되었다.

이즈음 이승만(李承晩)은 대미 외교활동을 위해 미국에 가 있었으므로 다시 일어난 반탁운동은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반탁으로 일어선 민족진영은 1월 16일, 30여 정당·사회단체가 모여 우국단체협의회(優國團體協議會)의 이름으로 좌우합작위원회를 배격하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24일에는 김구를 중심으로 반탁독립투쟁위원회(反託獨立鬪爭委員會)를 구성하여 대대적인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이와 같은 격동 속에 있던 민족진영의 통합을 위해 한민당(韓民黨)과 한독당(韓獨黨)의 합동 공작이 다시 거론되었고, 김구는 2월 26일 한독당 간부들에게 한민당과의 합당을 역설하면서 만일 이번에도 합당이 성공하지 못하면 당 위원장직을 사퇴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였다. 그리하여 한독당을 대표한 김구와 조경한(趙擎韓) 조완구(趙琬九), 한민당을 대표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백남훈(白南薰, 1885~1967년),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등이 회합을 갖고 교섭을 진행시켜 나갔다.

그러나 양당 수뇌들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합당의 가능성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이 무렵 인촌은 명실상부한 한민당 당수로 정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월 5일 안재홍(安在鴻)을 민정장관(民政長官)에 임명한 존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은 6월 3일에 군정청의 조선인 기구를 남조선 과도정부(南朝鮮 過渡政府)라고 개칭하였다. 그리고 그 해 9월 20일자로는 행정권을 한국인에게 이양하고 미국인은 다만 고문으로 거부권만 행사하도록 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국의 대외정책에는 일대 전환이 있었다. 1947년 3월 12일,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은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당시 공산주의 위협을 받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 두 나라에 4억 달러의 군사원조를 제공하고 군사사절단도 파견할 것을 요청함과 동시에,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침략세력에 대항하여 자유제도와 영토보전을 위해 투쟁하는 국가들을 원조’할 것을 표명한,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것은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이 처음으로 공산 진영에 힘으로 대항할 결의를 보인 것이었다.

이 결의를 배경으로 4월 12일,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은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미·소 공동위원회의 재개를 촉구하고 소련이 이에 협조하지 않으면 한국의 독립을 회복하려는 ‘모스크바협정의 목적을 신장할 조치를 남한에서 단독으로 취할 수밖에는 방도가 없다’고 선언하여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하기에 이르렀다.

4월 1일, 미육군 비행기로 미국을 출발한 이승만은 도쿄에 들러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를 만나고 다시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장제스(蔣介石)와 회담한 다음, 앞으로 3개월 이내에 한국에 독립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는 4월 21일 장제스가 제공한 중국 군용기편으로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을 동반하고 개선장군처럼 귀국하였다.

마셜 장관의 언명이 있은 지 한 달 남짓인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1월 16일, 우익 진영은 애국단체협의회(愛國團體協議會)의 이름으로 미·소 공동위 참가에 대한 서명을 취소한 바 있었는데, 미국측이 ‘의사표시(意思表示)의 자유의 원칙을 존중한다’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2차 미·소 공동위에도 참가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시 일어나 보조가 일치되지 않는 형세를 보였다. 즉, 이승만과 김구는 22일 공동성명으로 불참의 뜻을 명백히 하였으나, 반탁투쟁위원회는 몇 차례 논의 끝에 공동위 참가 여부는 각 단체나 개인의 자유위사에 맡기기로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민당은 2차 미·소 공동위를 통일정부 수립의 마지막 기회로 보고 6월 16일, 이에 참가하기로 당론을 결정하고 모든 애국단체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한민당의 이런 참가 결정은 물론 불참을 표명한 측에 의해 격렬한 비난을 받았고, 이승만은 참가파나 불참파나 반탁에 있어서는 일치하니 내외가 호응하여 독립쟁취를 위해 공동 투쟁하자고 하였다.

한민당을 비롯한 공동위 참가파는 ① 남북을 통한 총선거로서 정부를 수립할 것 ②수립되는 정부는 내정간섭을 의미하는 신탁을 반대할 것 ③수립되는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할 것 등을 공동 결의하고 미·소 공동위에 답신서(答申書)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7월 10일, 소련 대표는 마침내 한민당을 비롯한 15개 반탁 정당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2차 공동위도 원점으로 되돌아가 끝내는 10월 18일 무기 휴회로 들어가고, 21일에는 소련 대표가 서울에서 철수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무렵 정국은 고비에 다다른 감이 있었다.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서재필(徐載弼)을 미국에서 초청, 7월 1일 특별의정관(特別議政官)에 임명하였고, 7월 3일 이승만은 하지에게 더 이상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였던 것이다. 7월 19일에는 해방 후 좌우익 사이를 방황하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이 대낮에 흉탄을 맞고 암살되는 참사까지 일어났다.

한편 미·소 공동위에 불참을 선언한 이승만과 김구는 8월 초 자율정부(自律政府) 수립의 방법을 놓고 분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총선거를 주장하고 김구는 임정(臨政)의 법통을 고집하여 서로 양보하지 않은 것이다.

정계가 이렇게 혼미를 거듭하는 가운데 1947년 8월 26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특사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중장이 내한하였다. 그는 이남만의 성거 실시로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를 놓고 정계 지도자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김구와 김규식(金奎植)은 반대하였고 이승만과 인촌은 찬성하였다.

이런 가운데 2차 미·소 공동위도 한국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자 미 국무장관 마셜은 9월 17일 이 문제를 유엔(UN)으로 넘겼고, 이로써 한국 문제는 미·소 공동위의 소관을 떠나 유엔에서 취급하게 되었다. 23일, 유엔총회는 투표 결과 41대 6으로 의제(議題)로 채택하였고, 이어 10월 30일 정치위원회는 소련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특별위원회안(特別委員會案)을 41대 0(기권 7)으로 가결하였으며, 11월 14일 총회는 43대 0(기권 6)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결의안의 요지는 ① 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의 대표로 구성한다 ② 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년 3월 31일 이내에 선거를 실시한다 등이었다.

유엔의 한국 문제에 관한 특별위원단(약칭 유엔한위)의 설치로 한국의 독립은 확정되었으나 문제는 북쪽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의 태도였다. 소련 대표가 이미 이 결의안을 보이코트 하였으므로 남·북을 통한 총선거에는 난관이 예상되었고, 그럴 경우 선거는 이남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이를 환영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김구도 12월 1일 성명을 통해 ‘대체로 유엔 결의안을 지지’하는 태도를 표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엔의 이와 같은 결정을 계기로 이승만과 김구를 포함한 민족 진영은 다시 단합할 기미를 보였다.

이때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의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12월 2일 하오 6시 50분 제기동 자택에 들이닥친 괴한 두 명의 흉탄 3발을 맞고 현장에서 절명하였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이틀 전인 11월 30일 인촌과 설산 등 한민당 간부 암살을 모의한 일당 7명이 체포된 일이 있어서 설산 자신도 경계를 하고 있었으나, 범인이 정복 경찰이었고 그를 따라온 공범 또한 안면이 있는 자인지라 의식 없이 현관에 나갔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설산의 피살은 목당에겐 큰 충격이자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일세의 정치가요 투사로서 독립이 눈앞에 왔다고 그렇게 기뻐하던 설산이었는데 그가 죽다니 비통하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과도한 유혈로 납처럼 흰 시신을 앞에 두고 목당은 할 말을 잃었고 그저 멍하니 그 단정한 얼굴을 들여다볼 뿐이었던 것이다.

설산은 목당에겐 유일한 친구였다. 런던에서 2년 이상 한 하숙에서 지냈던 사이인 것이다. 공부실에서 만난 목당과 설산은 울적하면 길가의 펍(런던시내 선술집)을 돌며 맥주를 마시고 했던 일이 엊그제 일같이 떠오르는 목당이 아니던가.

미국에서 갓 왔을 때의 설산은 술을 잘 못했으나 목당은 위스키 한 병쯤 거뜬히 해치우는 대주가여서 설산은 목당과 어울리는 사이에 어느덧 주량이 늘고 있었다. 목당은 인촌이 런던에 와 있을 때, 세 사람이 같이 어울렸던 일도 상기되었다. 그때 인촌은 판소리를 워낙 좋아하여 유성기판 10여 장을 갖고 왔었다. 집에서 술을 마실 땐 판소리 레코드를 틀어 놓고 “좋구나 좋아” 하며 무릎을 치는가 하면 흥이 나면 덩실덩실 춤을 추던 인촌이었다. 한번은 단골집 쉰동(順東)에서 거나해 나오다가 인촌이 대로에서 춤을 추는 바람에 설산과 목당이 “여기가 어딘줄 알고 그래요”하며 말리던 일도 있었지 않은가.

설산과 인촌, 목당은 뜻이 맞았다. 세 사람 모두 술을 잘하면서도 여자 문제엔 담백했던 점도 공통이었다. 둘이 모두 어찌나 공부에 쫓기었던지 인촌은 아일랜드 여행도 혼자 해야 했다. 그 설산이 지금 이렇게 석고처럼 굳어져 말이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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