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원 논설위원장]
2026년 8월 초, 미국 연방의회 상원 세출위원회는 백악관 행정관리예산국(OMB)이 제출한 보조금 규정 개정안의 발효를 최소 12월 11일까지 연기하는 잠정 예산안을 전격 발표했다. 당초 트럼프 행정부는 10월 1일부터 연간 1조 달러가 넘는 정부 보조금과 연구비 심사 체계를 전면 개편하려 했다.
개정안의 핵심은 명확했다. 수십 년간 미국 과학기술의 정통성을 떠받쳐온 전문가들의 ‘동료평가(Peer Review)’를 단순 조언으로 격하시키고, 대통령이 지명한 정권 담당자가 정책 우선순위와 국익 부합성을 직접 검증하여 연구비 지급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전문가 심사의 무력화, 정치적 검증의 제도화, 이에 따른 연구비 지급 중단 사태는 현장 연구자들을 거센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미국의 전후 80년을 지탱해온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가 제시한 『과학, 그 끝없는 국경(Science, the Endless Frontier)』의 철학, 즉 정부의 차별 없는 공공 기초과학 투자와 학문의 자율성이었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는 정치적 진영 논리와 단기 성과주의가 그 뿌리를 흔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과학경시’ 정책은 단순한 자국 내 행정 개혁을 넘어, 미국이 지닌 지정학적 패권의 기초를 스스로 허무는 자해가 되고 있다.
‘개혁’이라는 수사(Rhetoric)와 ‘자해’라는 현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국(OSTP)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 『Science: A New Golden Age』를 통해 이번 정책이 낡은 대학 기득권 체제를 해체하고 AI 중심의 국가 미션을 유연하게 추진할 ‘80년 만의 대개혁’이라 강변한다. 관료화된 대학과 지루한 절차를 뛰어넘어 혁신적 개인 연구자에게 직접지원(direct-funding)을 제공하고 벤처 캐피털 방식의 파격 투자를 단행하겠다는 수사다. 그러나 비전과 현장의 실제 간극은 참담할 정도로 벌어져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글로벌 과학계가 경고하듯, 현 행정부의 행보는 ‘과학의 해체’에 가깝다. 첫째, 장기적 원천기술의 씨앗이 되는 순수 기초과학 연구비가 대폭 삭감되고 있다. 당장 수익이 나는 응용 분야나 정치적 치적이 되는 첨단 산업에만 자금이 쏠리면서 10~20년 뒤의 기술 혁신을 책임질 기초 연구 생태계가 말라붙고 있다. 둘째, 과학 연구의 급격한 정치화다. 연구비 신청서에서 ‘기후변화’나 ‘다양성’ 같은 단어를 스스로 검열하고 삭제하는 기괴한 현상이 미국 주요 대학 연구실에서 일상화되었다. 정권의 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연구가 정치 임명권자에 의해 잘려 나갈 수 있다는 공포는 학문의 자율성과 객관적 신뢰성을 사장시킨다. 셋째, 인재 안보의 자발적 포기다. 외국인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유학생과 연구자에 대한 비자 문턱을 높이고 국제 공동연구에 정치적 잣대를 대면서, 전 세계의 유능한 두뇌를 흡수하던 미국의 가장 강력한 자석(Magnet) 효과가 파괴되고 있다. 씨앗을 심지 않으면서 농부마저 쫓아내는 격이다.
데이터가 증명하는 냉혹한 결과
중국의 역전 우려는 이미 가시화된 데이터로 입증되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발표한 『과학기술 지표 2026』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중국의 연구개발비 총액은 전년 대비 13.1% 급증한 97.1조 엔(1엔은 10원) 으로, 미국(95.3조 엔)을 제치고 마침내 세계 1위에 등극했다. 중국은 이미 전체 논문 수(2017년), 상위 10% 고품질 논문 수(2018년), 상위 1% 최우수 논문 수(2019년)에서 미국을 연이어 추월한 바 있다. 이제 연구비 투자 총액마저 미국을 앞지름으로써, 명실상부한 글로벌 과학기술 1위국으로 올라섰다.
역설적이게도 미국의 대중 첨단기술 제재와 규제는 중국 제조업 기업들의 사활을 건 독자 R&D 투자를 폭발시킨 촉매가 되었다. 중국 기업 R&D(75.4조 엔)는 컴퓨터, 전자, 광학 등 첨단 제조업에 집중되며 독자적인 기술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반면 미국 기업 R&D의 절반은 플랫폼과 소프트웨어 등 비제조업에 쏠려 있다. 미국이 정치적 이념 논쟁과 예산 삭감, 연구비 지급 지연이라는 내부 진통에 발이 묶여 있는 사이, 중국은 국가 주도의 압도적 물량 공세로 기술 패권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기술강국(한·일)에 던진 실전적 과제
미중 격돌과 미국의 시스템 파행은 한국과 일본 같은 민주주의·자유시장경제 기반 기술강국에 심각한 화두를 던진다. 이번 지표에서 일본은 22.1조 엔으로 3위, 한국은 15.3조 엔으로 5위를 기록했다. 양적으로는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으나, 두 나라 역시 R&D 시스템의 근본적 재편이라는 피할 수 없는 논쟁에 직면했다.
우선, ‘전략기술(미션형)’과 ‘기초연구’ 간의 예산 포트폴리오 정립이다. 미중 기술 전쟁 속에서 국가전략기술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트럼프 행정부처럼 기초과학을 외면한 채 단기 산업 성과에만 매몰되면 장기적인 기술 체력이 고갈된다. 또한, 관료주의적 연구 관리 시스템의 개혁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낡은 평가 체계나 과제수주제(PBS)를 허물고,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 고위험·고수익(High-risk, High-reward) 연구 지원 모델을 어떻게 안착시킬 것인가가 관건이다. 아울러 저출생으로 인한 이공계 인력 부족 상황에서 미국이 폐쇄적 자국 우선주의로 밀어내는 글로벌 우수 인재들을 끌어안을 유연한 ‘친화적 인재 안보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도 시급하다.
한국의 생존 전략, 제3의 R&D 혁신 모델을 향하여
미국의 정치적 자해와 중국의 국가주도형 질주 사이에서 한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율성과 전략성이 조화를 이루는 고도화된 3세대 R&D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첫째, 정치와 정권으로부터 독립된 ‘장기 기초연구 방화벽(Firewall)’을 구축해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R&D 예산이 흔들리고 연구 현장이 겪는 파행은 국가적 비극이다. 국가 미션형 전략기술 투자는 신속하고 과감하게 진행하되, 순수 기초과학과 원천 연구는 정치적 잣대나 단기 시장 논리로부터 완벽히 보호받는 장기 지원 시스템을 제도화해야 한다.
둘째, 세계 우수 인재를 흡수하는 ‘글로벌 R&D 블랙홀’로 거듭나야 한다. 미국이 비자 장벽과 정치적 검증으로 우수한 외국인 연구자들을 머뭇거리게 만들 때, 한국은 파격적인 연구 환경, 신분 보장, 정주 여건을 제공하여 이들을 적극 유치해야 한다. 인재 유입의 폐쇄성을 깨는 나라가 차세대 기술 전쟁의 승자가 될 것이다.
셋째, 에너지, 데이터, 지역 거점이 결합된 제조업 기반의 독자적 초격차를 확보해야 한다. 소프트웨어에 편중되는 미국이나 규격화된 물량 공세를 퍼붓는 중국과 달리 한국은 전력 공급(Watt)과 AI 데이터 인프라(Bit), 그리고 지역 산학연을 연계한 고도화된 제조업 R&D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체 불가능한 핵심 기술 마이크로 거점을 전국 단위로 배치하는 전략이다.
트럼프의 과학경시는 전 세계 기술 지형을 흔드는 거대한 위기다. 그러나 역사는 시스템이 휘청일 때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스스로를 혁신한 자에게 새로운 패권을 허락했다. 정치적 파행을 넘어서는 학문의 자유, 그리고 정교한 국가 전략이 어우러진 R&D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 그것이 미중 격돌이라는 격랑 속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가장 확실한 생존법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광주과기원 AI정책전략대학원 특임 교수, 가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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