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환 전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인류 역사상 최대 영역을 경영했던 몽골제국은 13세기에 베트남을 3차례 침략했고, 모두 패퇴했다. 영토나 인구, 군사력 면에서 비교가 안 되는 베트남이 세계 최강의 제국과 싸워 승리한 저력은 무엇인가? 베트남에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같은 성웅 쩐흥다오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쩐흥다오 장군을 소개하는 영화와 드라마가 125부 작으로 한국 베트남공동으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있다. 한국과 베트남 문화 교류에 큰 징검다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은 베트남 쩐(陣) 왕조(1225~ 1400) 다이비엣(大越)국의 장군으로 몽골의 3차례 침략 가운데 제2차와 제3차 침략을 총지휘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장군의 본명은 쩐꾸옥뚜언(陳國峻)이며 출생연도는 자료마다 1226년, 1228년, 1230년 또는 1232년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출생연도가 불분명하다. 그는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국 영웅이다.
1285년 초 50만 몽골군이 2차 침략하여 탕롱(하노이의 옛 이름)이 함락되자, 조정은 찌랑(Chi Lăng)으로 피난했다. 당시 인종(1278~1293년)은 쩐꾸옥뚜언에게 적이 흉악하니 백성의 생명을 우선 구하도록 항복함이 어떤지를 물었다. 이에, 쩐꾸옥뚜언은, "폐하의 말씀은 자애로운 말씀이오나, 종묘사직은 어찌하시렵니까? 만약, 폐하께서 항복하시려면 저의 목을 먼저 베어 달라"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다이비엣은 쩐꾸옥뚜언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몽골군을 물리치고 탕롱을 수복하였다. 패전에 격노한 원(元) 세조, 쿠빌라이는 1287년 수륙 양군 30만을 동원하여 제3차 침략을 감행했다. 쩐꾸옥뚜언은 하이퐁 근처 박당(白藤)강 바닥에 용치를 박아 놓고 만조 때 수로로 침입해오는 원(元)의 보급 선단을 유인, 간조때 용치에 걸려 꼼짝 못하는 적선을 대파했다. 패퇴해 도주하는 육군도 괴멸시켰다. 몽골과 싸워서 승리한 세계 유일한 나라가 다이비엣이다. 베트남은 박당강 대첩을 기려 쩐흥다오 장군을 '베트남 해군의 아버지'라고 한다.
쩐꾸옥뚜언은 누구인가?
출생연도가 불분명한 쩐꾸옥뚜언이 태어난 시기는 리(李) 왕조(1009~1225) 말이었다. 216년간 존속했던 베트남 최초의 장기 왕조 리(李) 왕조는 무혈혁명으로 망하고 쩐(陳) 왕조가 뒤를 이었다. 1209년 리(李) 왕조 7대 고종(高宗) 때, 꽉복(Quách Bốc, 郭卜)이 난을 일으켜 왕은 푸토(Phú Thọ) 지방으로, 태자는 쩐리(陳李)가 세력을 잡고 있던 타이빈(현재의 흥옌성)으로 피신하였다. 이때를 기회로 삼아 쩐리는 자신의 딸 쩐티중(Trần Thị Dung)과 태자를 결혼시켰다. 쩐리는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하고 고종을 궁으로 모셨다. 환궁한 고종이 얼마 후 서거하자 16세의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왕위에 오른 8대 혜종(1211~1224)은 병약했고, 즉위 14년 만에 7세의 둘째 딸 펏낌(佛金)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불문에 들어가 혜광선사가 되었다가 33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펏낌이 마지막 9대 왕 찌에우호앙(昭皇)으로, 당시 실권은 쩐리(陳李)의 4촌 동생 쩐투후이(陳守輝)의 아들인 쩐투도(陳守度)가 잡고 있었다. 쩐투도는 찌에우호앙을 자신의 재종질로 쩐리의 손자인 8세 쩐까인(陳煚)과 결혼시키고, 1225년 12월 11일, 왕위를 남편 쩐까인에게 넘기라는 조서(詔書)를 내리게 하였다. 이로써 베트남 역사상 전무후무한 무혈 역성혁명으로 쩐(陳) 왕조가 시작되었다.
찌에우호앙은 리(李)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쩐 태종(太宗)의 비(妃)가 되었다. 찌에우호앙이 첫아들을 잃고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하자, 쩐투도는 1237년, 찌에우호앙의 친언니로 임신 3개월의 태종(太宗)의 형수 즉, 쩐리에우(陳柳)의 부인 투언티엔(順天) 공주를 왕비로 삼고, 찌에우호앙을 폐비시켰다. 쩐리에우는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면서, 아들 쩐꾸옥뚜언에게 나라를 빼앗으라고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쩐꾸옥뚜언은 부친의 유언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대신 총사령관으로 몽골군을 두 번이나 격퇴하여 나라를 지켰다. 쩐꾸옥뚜언은 태종(太宗)의 조카로 2대 성종(聖宗)의 사촌형이자 처남으로 이부동모(異父同母) 관계였다. 3대 인종(仁宗)의 5촌 당숙이자 장인, 4대 영종(英宗)의 외조부로서 종실의 핵심인물이었다. 성종은 쩐꾸옥뚜언의 누이를 왕비로, 인종은 쩐꾸옥뚜언의 딸을, 영종(英宗)은 쩐꾸옥뚜언의 손녀를 왕비로 맞이했다. 쩐꾸옥뚜언의 아내와 며느리는 모두 공주였다. 쩐꾸옥뚜언은 몽골의 3차 침략을 물리친 다음 해인 1289년 음력 4월 '인무흥도대왕(仁武興道大王)'으로 봉해졌고, 식읍(食邑)으로 받은 하이즈엉성-현재의 하이퐁시, 찌린, 반끼엡(萬劫)에서 음력 1300년 8월 20일 사망하였다. 베트남은 그곳에 끼엡박 사당을 건립해 흥도대왕(興道大王)을 추모하고, 전국적으로 사당을 건립해 그의 공을 기리고 있다.
몽골의 1차 침략: 정송가도(征宋假道) 거절이 원인
몽골의 베트남 공략은 제4대 원(元) 효종 몽카(蒙哥) 시기에 1차례, 제5대 세조 쿠빌라이(忽必列)시기에 2차례 있었다. 13세기 세계 최강 몽골은 고려와 북송(北宋)을 차례로 굴복시켰고, 동남아로 진출을 위해서 남송(南宋)정벌이 필요했다. 1257년 8월 몽골은 사신을 보내 남송과 조공,책봉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다이비엣에 정송가도(征宋假道)를 요구하였다. 쩐 태종은 남송이 멸망하면 몽골과 직접 국경을 마주하게 됨에 따라, 몽골 사신을 억류하고, 변경 수비를 철저히 하도록 하였다. 이에, 몽골은 쿠빌라이가 운남의 대리국을 정벌하고 귀환한 뒤 잔류해 있던 우량카다이(兀良合台)로 하여금 3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이비엣을 침략하도록 하여 음력 1257년 12월 15일 탕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몽골군은 고온 다습한 베트남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질병에 시달렸고, 몽골군에 편입된 소수민족 출신 병사들의 기강해이가 심했다. 게다가 쩐 태종과 태자가 앞장서 싸우고, "청야(淸野)작전"으로 몽골군은 식량을 구하지 못해 전쟁 수행이 어려웠다. 이에, 쩐 왕조는 군의 전열을 재정비하여 퇴각하는 몽골군을 급습하여 하노이 인근의 동보더우(東步頭)전투에서 승리하고 음력 1257년 12월 24일 탕롱을 수복하였다. 탕롱 점령 9일 만에 몽골군은 퇴각하였다.
몽골과의 제1차 전쟁이 종료된 후 몽골이 남송을 멸망시키자, 쩐 태종(太宗)은 레푸쩐(黎輔陣 )장군을 몽골에 보내 3년1공(3年1貢)의 조공관계를 맺어 화친하였다.
태종은 몽골과의 1차 전쟁에서 승리하자 1258년 구정에 큰 연회를 베풀고, 폐비가 된 자신의 첫 부인을 레푸쩐 장군과 결혼하도록 명하였다. 찌에우호앙은 공주로 태어나 여왕이 되었다가 태종의 왕비에서 폐비되어 홀로 살다가 레푸쩐 장군의 아내가 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계속)
필자 주요 이력
▷조선대학교 특임교수 ▷전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전 베트남학회 회장 ▷전 KGS국제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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