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韓-EU 협력, 방산을 넘어 안보 전략으로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사진한국국방연구원
유지훈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 [사진=한국국방연구원]
 
 
국제 안보 현안의 초국가적 성격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군사력과 기술, 공급망, 에너지, 정보가 결합된 복합 안보 위협은 더 이상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러·북 군사협력이 보여주듯 유럽과 인도태평양의 안보는 이미 하나의 전략적 공간 속에서 연결되고 있다. 국제 안보의 상호연결성이 커질수록 한-EU 협력도 경제협력의 연장선을 넘어 국가안보 전략의 중요한 축으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EU 관계의 중심축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을 기반으로 한 경제협력과 문화 교류였다. 그러나 최근 협력 범위는 방위산업, 첨단기술, 해양안보, 사이버안보 등 안보 영역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제11차 한-EU 정상회담은 이러한 흐름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비밀정보보호협정 협상 착수는 양측 협력이 방산 거래를 넘어 전략적 신뢰를 구축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밀정보보호협정은 민감한 군사정보와 방산기술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공유하기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기반이다. 이러한 기반이 마련돼야 공동 연구개발과 상호운용성 확보뿐 아니라 사이버안보, 해양안보, 핵심 인프라 보호와 관련한 정보 협력도 안정적으로 추진될 수 있다.
 
특히 첨단기술과 군사정보가 결합되는 미래 안보 환경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보호 체계가 협력의 출발점이 된다. 결국, 안보협력은 선언이나 일회성 거래가 아니라, 신뢰를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지속성을 갖게 된다.

러·북 군사협력의 심화는 이러한 협력의 필요성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북한의 대러 무기 지원은 유럽의 전쟁 수행 환경을 변화시키고, 러시아 군사기술의 대북 이전 가능성은 한반도 안보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는 인도태평양과 유럽·대서양 안보를 별개의 공간으로 바라보던 기존 인식을 재검토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EU 협력의 핵심은 무기 거래가 아니라 전략적 연계성에 있다. 유럽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전력 지속성, 방산 공급망, 사이버·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확인했다. 한국도 북한 핵·미사일 위협, 러·북 군사협력, 해양교통로 불안정에 직면해 있다. 위협의 지역은 다르지만 군사·기술·공급망·정보가 결합된 복합 위협이라는 점은 같다. 한-EU 협력도 무기체계 판매를 넘어 정보 공유, 기술 보호, 공급망 회복력, 위기 대응 능력을 함께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적 협력은 방산을 넘어 사이버안보, 우주·위성, 인공지능, 해양안보 등 미래 안보 영역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
 
특히 해양안보 분야에서 한국과 EU는 해상교통로 보호, 해양상황인식(MDA), 해저케이블과 항만 등 핵심 인프라 보호, 불법 해상활동 대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다. 또한 인공지능과 무인체계, 반도체와 핵심 광물 공급망 보호는 앞으로 양측이 함께 대응해야 할 새로운 전략 과제가 될 것이다.
 
물론 방위산업 협력은 이러한 전략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은 재무장과 방위력 증강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장기간의 군축과 제한적 국방투자로 인해 생산 역량과 즉응 공급 능력이 충분하지 않다.
 
반면 한국은 높은 생산 역량과 안정적인 공급 체계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입증해 왔다. 유럽이 한국 방산에 주목하는 이유도 단순한 가격 경쟁력이 아니라 필요한 시기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신뢰성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방산이 유럽에서 지속 가능한 협력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완제품 수출 중심의 접근을 넘어야 한다. EU는 역내 방위산업 기반 강화를 위해 공동조달과 공동생산, 기술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에 맞춰 한국도 현지 생산, 공동 연구개발, 부품 공급망 연계, 정비·후속지원까지 포함하는 협력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방산협력을 단기 수출 성과로 소비하지 않고, 한-EU 안보협력을 제도화하는 지속 가능한 기반으로 발전시키는 일이다.
 
방산협력은 한-EU 안보협력을 구체화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무기체계 판매나 생산협력에 머물지 않는다. 방산협력은 정보 공유, 기술 보호, 공동 연구개발, 상호운용성 확대를 통해 양측의 전략적 신뢰를 축적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한-EU 안보협력은 선택이 아니라 전략적 필수 과제다.
 
한국은 한-EU 협력을 제도적 신뢰, 정보 공유, 산업 협력, 첨단기술, 해양안보를 아우르는 국가전략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결국 한-EU 협력의 성패는 한국이 단순한 무기 공급국을 넘어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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