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의 베이징은 오랜만에 세계의 중심이었다. 붉은 담장과 회색 기와, 그리고 초여름 비가 스친 천단공원의 돌길 위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나란히 걸었다. 냉전 시대의 정상회담처럼 군사적 긴장감이 흐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한 화해의 미소가 넘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장면에는 21세기 세계질서를 떠받치고 있는 두 거대한 힘의 조심스러운 탐색과 경계, 그리고 계산된 절제가 함께 담겨 있었다.
그날 저녁 인민대회당 국빈만찬에서 시진핑 주석은 의미심장한 표현을 남겼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마가는 양립할 수 있다"는 짧은 문장이었지만 세계는 그 발언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의 미중 관계는 단순한 무역 분쟁이나 외교 갈등 차원을 넘어, 세계 패권의 이동과 충돌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다시 소환되는 개념이 바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전쟁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아테네의 성장과 그것이 스파르타에 안겨준 두려움이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그 통찰은 2500년이 지난 오늘에도 국제정치의 본질을 꿰뚫는다.
문제는 단순한 군사력 경쟁이 아니다. 신흥 강대국의 부상이 기존 패권국 내부에 만들어내는 구조적 공포다. 하버드대학교의 국제정치학자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는 이를 현대적으로 정리하며, 역사 속 패권 경쟁의 상당수가 실제 전쟁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오늘의 세계에서 기존 패권국은 미국이고, 신흥 강대국은 중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달러 체제와 해군력, 첨단기술, 금융 시스템, 동맹 구조를 바탕으로 세계질서를 설계해온 나라다. 반면 중국은 지난 40여 년 동안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성장하며 제조업과 무역, 공급망, 인공지능, 반도체, 전기차, 희토류 산업까지 세계 중심부로 치고 올라왔다. 미국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단순히 중국 경제 규모의 확대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두려움은 중국이 미국 중심 질서 없이도 작동하는 새로운 문명권과 경제권, 기술권을 만들 가능성이다.
중국 역시 미국의 움직임을 단순한 경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미국의 반도체 수출 통제와 인공지능 칩 규제, 공급망 재편, 동맹 강화 전략을 중국은 사실상의 봉쇄로 인식한다. 여기에 대만 문제와 남중국해, 인도·태평양 전략이 겹치며 양국의 불신은 점점 깊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양국은 서로를 완전히 끊어낼 수도 없다. 미국 소비시장은 중국 제조업과 깊이 연결돼 있고, 중국 경제 역시 달러 시스템과 글로벌 금융시장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중국 시장을 포기하기 어렵고, 중국 역시 미국의 첨단기술과 금융 네트워크를 무시할 수 없다. 인공지능 시대의 반도체 공급망은 미국, 한국, 대만, 일본, 중국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패권전쟁은 상대를 무너뜨리면 끝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미중 전쟁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순간 자신도 함께 무너진다. 핵무기와 세계 금융, 글로벌 공급망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투키디데스 함정은 전면전보다 더 복합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반도체 전쟁, 인공지능 경쟁, 금융 제재, 공급망 분리, 해양 패권 경쟁, 에너지 통로 장악, 환율과 관세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진핑이 언급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과 트럼프의 '마가'는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각각 중국과 미국이 꿈꾸는 국가 생존 전략의 선언이다. 마가는 쇠락한 미국 제조업과 중산층의 복원, 에너지 자립, 국경 통제, 자국 산업 보호를 핵심으로 한다. 반면 중화부흥은 아편전쟁 이후의 '백년국치'를 끝내고 중국이 다시 세계 중심 문명국가로 복귀하겠다는 역사적 선언에 가깝다.
문제는 두 비전 모두 자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 하고, 중국은 기술 자립과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한다. 미국은 동맹 체제를 강화하고, 중국은 브릭스와 글로벌 사우스를 확대하며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그렇다면 양립의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 완전한 화합은 어렵더라도, 충돌을 관리하는 공존은 가능할 수 있다. 첫째, 양국은 경제와 안보를 일정 부분 분리해 관리할 필요가 있다. 대만과 남중국해 문제에서는 군사적 우발 충돌을 막는 안전장치를 강화하고, 경제 분야에서는 최소한의 협력 구조를 유지해야 한다.
둘째, 반도체와 인공지능 분야에서 완전한 단절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지나친 봉쇄와 보복은 결국 세계경제 전체를 침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양국 지도자 모두 국내 정치용 강경 발언과 실제 전략 사이에서 냉정한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강한 지도자의 이미지는 필요하지만, 정치적 수사가 군사적 오판으로 이어지는 순간 세계는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번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어쩌면 공동성명보다 천단공원 산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천단은 과거 중국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장소다. 그곳을 미국 대통령과 중국 국가주석이 함께 걸었다는 사실은, 양국이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는 시대에 들어왔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계경제도 이 회담을 예민하게 바라보고 있다. 미중 갈등이 완화되면 글로벌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고 반도체·인공지능·물류·에너지 시장 역시 숨통이 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갈등이 다시 격화될 경우 공급망 분절과 인플레이션 압력은 세계경제를 다시 흔들 수 있다. 특히 대만해협의 긴장은 세계 반도체 산업 전체의 리스크로 직결된다.
대한민국의 입장은 더욱 어렵다. 한국은 안보에서는 미국 동맹에 의존하지만, 경제에서는 중국과 깊게 연결돼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조선, 인공지능 산업 모두 미중 경쟁의 한가운데 서 있다. 따라서 한국은 어느 한쪽의 단순한 하위 파트너가 아니라, 전략적 균형 감각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갖춘 중견국 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두려움은 반복된다. 투키디데스가 본 것은 군사력 이동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심리의 이동이었다. 패권국의 불안과 신흥국의 자신감이 충돌할 때 세계질서는 흔들린다. 그럼에도 오늘의 인류는 고대 그리스보다 훨씬 복잡한 문명을 가지고 있다. 핵무기와 인공지능, 글로벌 금융과 공급망으로 연결된 세계에서 전면전은 곧 공동 파멸이다.
결국 미중 관계의 미래는 누가 더 강한가보다, 누가 더 절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트럼프의 마가와 시진핑의 중화부흥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 공존의 질서는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21세기 세계가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넘어설 수 있는 마지막 지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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