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뷰] 중동전쟁으로 부각된 외교의 중요성

 
중동 전쟁이 전 세계를 흔들고 있다. 전쟁이 세계 경제와 안보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에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조건부 통항 재개와 재봉쇄가 반복되면서 불확실성은 점점 커졌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미국과 이란 측 대표가 마주 앉는 협상 테이블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총성을 멈추게 하는 것은 전쟁터가 아닌 협상 테이블이었다. 그만큼 외교는 중요하다.
 
외교의 중요성은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린 것은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서 최초의 외교 활동이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정세를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본격적인 외교 활동을 시작한 임시정부는 파리 한국민대표관 설치와 사료집 발간, 워싱턴회의를 둘러싼 외교 활동, 중국 호법정부와의 협력 등을 통해 독립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4년 4월 대외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외무행서규정’을 공포했다. 외무행서는 임시정부 외무부 산하로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대리해 외교사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임시정부는 고려통신사의 서영해를 임시정부 주불외무행서로 임명했다. 서영해는 유럽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가해 일제의 침략전쟁을 비판하고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고려통신사 설립과 여러 국제회의 참여 등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카이로 선언에 대응해 즉각 독립의 원칙을 천명하고, 샌프란시스코 회의를 앞두고 연합국과 함께 항전하고 있음을 알리는 등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백범 김구는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를 벗어나 독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일제와 혈전을 벌인 결과이고 또 임시정부의 성공적인 외교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도산 안창호는 “외교를 중시하는 이유는 독립전쟁의 준비를 위함이오. 평시에도 그러하지마는 전시에는 비록 일국(一國)이라도 내 편에 더 넣으려 하오”라고 말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과 5위권의 군사력을 갖춘 국가로 성장했다. ‘높은 문화의 힘’을 갖춘 대한민국의 ‘소프트파워’는 점점 커지고 있다.
 
나라의 품격에 맞는 외교는 중요하다. 정부는 지난 14일 이란에 총 50만 달러(약 7억4000만원) 규모의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중동 정세 관련 인도적 지원은 지난달 레바논(200만 달러 규모) 이후 두 번째다.
 
이후 일각에서는 대(對)이란 인도적 지원이 다른 용도로 쓰이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됐다. 외교부는 “정부의 대이란 인도적 지원은 국제사회의 확립된 인도주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 지원 활동을 시행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를 통해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ICRC는 국제인도법에 기반해 중립성·공정성·독립성 원칙을 엄격히 적용하는 국제기구로, 이란에서는 1977년부터 활동해왔다. 이란 내 인도적 대응의 최전선에 있는 이란적신월사(IRCS)와도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한국뿐 아니라 스위스, 유럽연합(EU), 독일 등도 전문성 있는 국제기구를 통해 이란에 대한 긴급 인도적 지원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정부는 지난 3월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으로 중동에 고립된 국민 204명을 군 수송기로 귀환시키는 ‘사막의 빛’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외교가 가장 빛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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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아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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