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핫이슈] 국제학술서에 실린 '증도가자'… 국내선 9년째 보물 지정 심의 논란

  •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에 남권희 교수 논문 2편 수록

  • 고려 금속활자라는 과학적 연구성과 세계 학계에 소개

  • 국제 공동전시 추진… 한국선 심의자료 정확성 논란 여전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 표지 자료오크 놀 북스Oak Knoll Books 홈페이지 캡처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 표지 [자료=오크 놀 북스(Oak Knoll Books) 홈페이지 캡처]
[경제일보]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證道歌字)'에 관한 남권희 경북대 명예교수의 연구 논문 2편이 미국에서 출간된 국제 공동학술서에 수록됐다. 2014년 당시 문화재청 소속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의뢰한 학술조사와 이후 과학적 분석을 통해 축적한 연구 성과가 세계 인쇄술의 기원을 다룬 학술서에 소개된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2017년 보물 지정 부결 이후 9년이 지나도록 당시 심의자료의 정확성을 둘러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5일 미국 출판사 더 레거시 프레스와 유타대학교에 따르면 지난 5월 출간된 국제 공동학술서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From Jikji to Gutenberg)』에 남 교수의 증도가자 관련 논문 2편이 실렸다. 672쪽 분량의 이 책은 고려 금속활자부터 구텐베르크 성경까지 동서양 인쇄술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다루고 있다. 국내에서 오랜 기간 진위 논란을 겪어 온 증도가자가 세계 인쇄사의 흐름 속에서 연구 대상으로 소개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남 교수는 지난달 2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종합국정감사에서도 해당 학술서를 소개했다. 당시 국회에서는 증도가자 보물 지정 부결 과정의 심의자료 누락·변경 의혹이 다시 제기됐고,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과거 심의 참여자를 배제한 새로운 위원회를 구성해 신청 활자 101점을 재검증하겠다고 약속했다.


◆ 美 국제학술서에 증도가자 논문 2편…고려 금속활자 연구 성과 소개


『직지에서 구텐베르크까지』는 미국 유타대학교와 청주 유네스코 국제기록유산센터(ICDH)가 함께 추진한 국제 공동연구의 성과물이다. 유타대학교 메리어트 도서관의 랜디 실버먼과 국제기록유산센터의 이승철 박사가 연구를 이끌었으며, 미국 의회도서관과 프린스턴대학교,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미술관 등 주요 연구기관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남 교수는 이번 학술서에 '남명천화상송증도가 판본의 서지학적 분석'과 '고려 금속활자 증도가자의 발견과 과학적 분석' 등 논문 2편을 수록했다. 고려시대 문헌에 기록된 금속활자 인쇄의 역사와 발견된 활자의 서체·주조 방식, 과학적 분석 결과를 종합해 증도가자가 13세기 고려시대 금속활자라는 연구 성과를 제시했다.


책에는 1377년 간행된 직지와 조선 초기 금속활자 기술, 한국의 목판인쇄술 등을 다룬 논문도 함께 실렸다. 한국에서는 남 교수를 비롯해 이승철 박사와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등이 집필에 참여했다. 고려에서 시작된 금속활자 인쇄술의 발전 과정을 서양의 구텐베르크 성경과 비교하며 세계 인쇄사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번 국제 공동연구는 미국 연방정부의 인문학 지원기관인 국립인문기금(NEH)의 지원도 받았다. 국립인문기금은 2022년 직지 간행 65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공동전시 기획 사업에 연구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학술서 출간과 연계해 고려 금속활자와 서양 초기 인쇄술을 세계에 소개하려는 계획이다.


연구진은 2027년 미국을 비롯한 세계 43개 연구도서관을 대상으로 동시 전시를 개최한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고려의 초기 금속활자 인쇄본과 구텐베르크 성경 등을 함께 조명해 동서양 인쇄술의 발전 과정을 알린다는 취지다. 국내에서 축적된 고려 금속활자 연구가 국제 공동학술서 출간에 이어 전시 사업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증도가자 사진다보성갤러리
증도가자 [사진=다보성갤러리]

◆ 1239년 최이의 기록부터 109점 조사까지…고려 금속활자 연구의 근거


증도가자의 역사적 가치를 판단하는 출발점은 1239년의 기록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 인쇄본인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 간행됐다. 그러나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는 고려 고종 때 무신정권을 이끌었던 최고 권력자 최이(崔怡)가 1239년에 남긴 발문이 있다.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을 바탕으로 목판을 다시 새겼다는 내용으로, 고려에서 직지보다 최소 138년 앞서 금속활자 인쇄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직지가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면 증도가자는 그보다 앞선 시기에 책을 인쇄하는 데 사용됐다는 금속활자 실물이다. 남 교수의 연구대로 제작 시기가 확인된다면 고려가 직지보다 앞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활용했다는 사실을 유물로도 뒷받침하게 된다.


남 교수는 최이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발견된 금속활자의 서체와 글자 형태를 비교해 왔다. 당시 인쇄에 사용된 활자를 찾기 위한 연구는 2014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의뢰한 학술조사로 이어졌다.


경북대 산학협력단이 수행한 이 조사에서는 다보성갤러리 소장 101점을 비롯해 청주고인쇄박물관 소장 7점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점 등 모두 109점의 금속활자를 살펴봤다. 남 교수 연구진은 서체와 형태, 주조 흔적 등을 비교해 62점을 증도가자로 분류했고, 나머지 47점도 다른 고려시대 금속활자로 판단했다.


연구 과정에서는 발견된 활자와 현존하는 목판본의 글자 크기가 서로 다른 이유도 검토했다. 남 교수는 금속활자본을 목판에 다시 새기는 과정에서 목재의 수축과 판각 기술자의 작업 방식에 따라 글자의 크기와 획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제시했다. 목판본의 글자와 금속활자를 그대로 겹쳐 비교하는 방식만으로 원래 인쇄에 사용된 활자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과학적 조사에서도 고려시대 금속활자라는 연구를 뒷받침할 결과가 나왔다. 2015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홍완 박사 등이 참여한 연구진은 금속활자 34점에서 채취한 먹 시료를 분석해 27개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를 확보하고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신뢰도가 낮은 측정값을 제외한 분석 결과, 먹의 연대가 직지가 간행된 1377년보다 약 300년 앞선 시기를 가리킨다고 밝혔다.


이처럼 문헌 기록과 서체 비교, 과학적 분석을 통해 고려 금속활자라는 연구 결과가 제시됐지만, 2017년 문화재위원회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의뢰한 학술조사가 마무리된 지 약 3년 만이었다.


◆ 2017년 보물 지정 부결 이후 심의자료 논란…국감서 재검증 약속


문화재위원회는 지난 2017년 다보성갤러리가 신청한 금속활자 101점의 보물 지정을 부결했다. 출토 경위가 불분명하고, 서체 비교와 조판 실험에서도 증도가 인쇄에 사용된 활자로 인정할 만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문화재청은 먹의 탄소연대 측정 결과를 인정하면서도 해당 결과만으로 금속활자의 제작 시기를 확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존하는 번각목판본과 금속활자의 서체·자형 차이, 조판 가능성 등도 부결 판단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후 심의자료의 정확성을 둘러싼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김종춘 다보성갤러리 회장은 원 조사보고서에 기록된 금속활자와 번각목판본의 크기 차이에 관한 핵심 수치가 심의자료에서 누락되고, 연구자의 판단을 나타낸 일부 표현도 변경됐다고 주장해 왔다. 김 회장은 이러한 자료의 누락·변경 경위와 당시 부결 결정에 미친 영향을 확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문제는 감사원 이첩과 국가유산청 자체감사를 거쳐 지난달 국정감사에서도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다. 더불어민주당 임오경·조계원 의원은 2017년 심의자료의 정확성을 따져 묻는 한편, 과거 심의에 참여했던 위원과 전문위원이 새로운 검증에 다시 관여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참고인으로 출석한 남 교수도 당시 조사에 참여한 연구자들의 의견과 과학적 분석 결과가 심의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기존 신청 활자 101점에 대한 판단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전국의 금속활자를 추가 공모하는 방침에도 반대했다.


이에 허민 국가유산청장은 출토 경위가 불분명하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활자가 섞여 있을 가능성도 있어 폭넓은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기존 심의 참여자를 배제한 새로운 위원회 구성에 동의하면서 신청 활자 101점을 철저하게 재검증하겠다고 밝혔다.


증도가자가 학계에 처음 공개된 지 16년, 보물 지정이 부결된 지 9년이 지났다. 미국에서는 남 교수의 연구 성과를 담은 국제 공동학술서가 출간됐고, 해외 연구진은 내년 직지 간행 650주년을 맞아 세계 43개 연구도서관을 대상으로 대규모 국제 공동전시도 추진하고 있다. 고려 금속활자의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려는 연구와 전시가 해외에서 이어지는 동안 국내에서는 9년 전 보물 지정 심의자료의 정확성을 둘러싼 논란조차 매듭짓지 못하고 있다.

[아주경제 2026년 11월 5일자 14면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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