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국민 배우' '국민 아버지' 익숙한데 '국민 대통령'은?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언어는 그 사회의 거울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부르는지 살펴보면 그 사회가 어떤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지가 드러난다. 한국 식당에서 사람들은 처음 보는 중년 여성 종업원을 ‘이모’라고 부른다. 친척도 아니고 이름조차 모르지만 가족의 호칭을 빌려 말을 건넨다. 그 부름에 살가운 대답이 돌아오면 밥을 파는 사람과 사 먹는 사람 사이에도 잠시 온기가 흐른다. 낯선 사람을 가족의 이름으로 부르는 이 사회에는 아직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
 
베트남어에서는 가족의 언어가 더욱 폭넓게 쓰인다. 가족 밖에서도 형이고 누나이고 동생이다. 형이나 오빠를 뜻하는 ‘아인(anh)’, 누나나 언니를 뜻하는 ‘찌(chị)’, 동생을 뜻하는 ‘엠(em)’이 일상의 대화에서 상대를 부르고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나이와 관계를 헤아려 호칭을 고르는 과정에서 낯선 사람도 가족관계를 빌린 언어 안으로 들어온다. 한국에서도 그 친밀함은 식당에만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배우에게 ‘국민 배우’라는 이름을 붙이고 다시 ‘국민 아버지’ ‘국민 어머니’ ‘국민 누나’ ‘국민 여동생’이라고 부른다. 한 번도 마주 앉아 밥을 먹은 적 없는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낸 가족처럼 받아들인다. 연기력과 인기에 대한 평가에 관계의 정서까지 더하는 것이다.
 
고 최불암의 얼굴이 그러했다. 1970년대 드라마 ‘수사반장’의 박 반장에서 ‘전원일기’의 김 회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얼굴에는 잘못을 바로잡는 사람과 가족이나 이웃의 사정을 헤아리는 사람이 겹쳐 있었다. 시청자들은 그에게서 단호함과 인정이 함께 있는 어른을 보았다.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도 끝까지 들어 줄 것 같고, 일이 잘못되어도 혼자 빠져나가지는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어른의 모습도 거기에 있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이 피하고 싶은 일을 맡고,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감당하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 곁에 남아 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어른으로 받아들인다. 어른의 권위는 자신이 감당해 온 책임에서 나온다.
 
전통적인 씨족과 마을 공동체에서는 그런 역할이 여러 사람에게 나뉘어 있었다. 아이는 부모한테서만 배우지 않았다. 친척과 이웃이 아이의 이름을 알았고, 누구네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대충은 알고 살았다. 더불어 사는 삶에서 사람 사이의 도리를 익혔다. 마을의 생활 자체가 공동체 교육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을 따뜻하게만 기억할 수는 없다. 관심이 간섭으로 흐르고 서열이 부당한 복종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폐습을 돌아보면서도 이어 가야 할 태도는 있다. 다른 집 아이의 위험을 외면하지 않고, 이웃의 어려움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만 여기지 않던 마음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서로의 삶에 조금씩 책임을 나누어 지는 일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는 사람들을 고향에서 떼어 놓았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향한 사람들은 새로운 기회를 얻었지만 자신을 어릴 때부터 알아 온 얼굴들과 멀어졌다. 그 무렵 집집에 들어온 텔레비전은 흩어진 사람들에게 함께 바라볼 얼굴을 제공했다. 서로 다른 방에서 같은 드라마를 보고, 다음 날 직장과 학교에서 같은 인물을 이야기했다.
 
‘수사반장’과 ‘전원일기’는 그렇게 하나의 넓은 동네가 되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화면에서 익숙한 말투와 관계를 만났고,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안에서 마을과 어른의 모습을 배웠다. 텔레비전이 실제 공동체를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공동체를 향한 기억과 기대가 머무는 자리는 될 수 있었다. ‘국민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그 시대의 마음도 배어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동네에 어른이 없다’고 탄식하게 되었다. 나이 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다. 다른 집 아이의 안부를 묻고, 혼자 사는 이웃의 인기척을 살피며, 공동의 문제가 생겼을 때 먼저 시간을 내는 사람이 그립다는 뜻이다. 우리는 화면 속 어른을 그리워하는 만큼 생활 속에서 누군가에게 기댈 자리를 내주고 있는가.
 
공동체 교육은 그 빈자리를 채우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학교와 지역사회는 여러 세대가 만나 함께 일하고 서로를 알아 갈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어른들은 아이에게 예의를 요구하기 전에 자신이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식당에서 ‘이모’라고 불렀다면 그 친근한 말에 걸맞은 존중이 따라야 한다. 가족의 언어를 쓰는 사회라면 그 말에 담긴 책임도 나누어야 한다.
 
정치에서 가족의 호칭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친밀함은 국민의 비판을 듣고 권한의 행사에 책임지는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 시민에게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정치인에게는 국민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을 더 큰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임은 아래로 미루면서 존경은 위로 모으는 사회에서 믿을 만한 어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언어에는 함께 쓰일 때 자연스러운 말의 짝이 있다. 이를 연어(連語)라고 한다. ‘국민 배우’ ‘국민 아버지’ ‘국민 누나’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이때 ‘국민’은 단순히 나라의 구성원을 뜻하는 말을 넘어 폭넓은 사랑과 신뢰를 담는 수식어가 된다.
 
그런데 ‘국민 국회의원’이라는 말 앞에서는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는가. 오히려 화부터 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국개의원(!)’이라는 모욕적인 표현까지 생겨났겠는가. 그 비하를 따르지는 않더라도 거기에 쌓인 정치 불신은 돌아보아야 한다. ‘국민’과 ‘국회의원’의 어울림을 가로막는 것은 문법보다 현실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직함과 국민이 체감하는 정치 사이의 거리가 두 단어를 어색하게 만든다.
 
‘국민 대통령’이라는 말의 어울림도 대통령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당선증만으로 국민의 마음속 이름까지 얻을 수는 없다.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힘없는 사람의 사정을 살피며, 잘못된 결과 앞에서 책임을 피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기는 어려워도 어느 국민도 자신의 책임 밖에 두어서는 안 된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호 아저씨’, 곧 ‘박 호(Bác Hồ)’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여기서 박은 우리나라 말, 큰아버지를 가리키는 백부(伯父)의 백이다. 역시 가족 구성원이다. 그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별개로 국가 지도자를 부르는 말에 가족 어른의 호칭이 들어 있다는 사실은 눈길을 끈다. 지도자의 공식 직함과 사람들이 느끼는 심리적 거리는 서로 다른 문제이다.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저절로 가까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대통령이 있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대통령 아저씨’라고 부를 때 곁의 어른들도 미소 지을 수 있는 대통령, 퇴임 뒤에도 그 부름이 따뜻하게 남는 대통령을 기대한다. ‘국민 대통령’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리려면 국민의 삶을 대하는 대통령의 행동이 두 단어 사이를 채워야 한다. 국민 배우라는 이름은 배우가 스스로 붙이지 않았다. 국민 아버지라는 호칭도 누군가 임명해 준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보여 준 모습에 사람들이 마음으로 답한 것이다. 국민 대통령이라는 이름도 그렇게 얻어야 한다. 언어를 보면 사회가 보인다. 언젠가 ‘국민 대통령’이라는 말을 듣고 냉소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오랜 세월 화면 너머에서 우리 곁을 지켜 준 국민 아버지, 고 최불암 님의 명복을 빈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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