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일본 반도체 생태계와의 협력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삼성전자는 현지 연구개발(R&D) 거점을 중심으로 차세대 기술 확보에 집중하는 반면 SK하이닉스는 핵심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며 공급망 선점에 무게를 두고 있다.
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일본 요코하마에 구축한 첨단 패키징 연구거점 '어드밴스드 패키징 랩(APL)'을 중심으로 현지 소부장 기업들과 기술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APL은 반도체 성능을 높이기 위한 첨단 패키징 소재와 공정 기술을 개발·검증하는 연구시설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1일 APL을 찾아 기술 개발 현황을 직접 점검했다.
삼성전자는 2024년부터 5년간 400억엔(약 3500억원)을 투자해 현지 연구 기반을 구축한다. 이미 100여 명의 현지 인력을 채용했으며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최대 225억엔을 지원받을 수 있다. 전체 투자액의 약 56%에 달하는 규모다. 일본 소부장 기업들과 차세대 패키징 기술을 공동 개발해 자체 반도체 경쟁력을 높인다는 구상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일본 소부장 기업과의 협력을 통해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에 나섰다. 지난달 29일 일본에서 처음 개최한 '파트너스데이'에는 도쿄일렉트론(TEL), 신에쓰화학, JSR 등 주요 협력사 20여 곳이 참석했다. SK하이닉스는 중장기 기술 개발 계획과 수요 전망을 공유하며 협력사들의 선제적인 설비투자와 생산능력 확대를 유도했다.
이는 AI 메모리 수요 급증에 대응해 핵심 소재와 장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시설을 확대하더라도 소재·장비 공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생산량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일본 현지 생산시설 투자 가능성도 열어뒀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일본 낸드플래시 업체 키옥시아와의 공동 생산을 협력 방안 중 하나로 거론했다. SK하이닉스는 과거 키옥시아에 약 4조원을 투자한 바 있다. 기존 투자 관계를 바탕으로 현지 생산거점과 공급망 협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양사가 일본으로 향하는 이유는 세계적인 소부장 경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은 세계 반도체 제조장비 시장의 약 31%, 소재 시장의 약 48%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도쿄일렉트론은 반도체 미세회로 형성에 필수적인 감광액 도포·현상 장비 시장에서 9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했다. 반도체 핵심 소재인 실리콘 웨이퍼 시장도 신에쓰화학과 섬코가 주도하고 있다.
AI 반도체 고도화로 일본 소부장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연결하는 구조로, 적층 수가 늘어날수록 제조공정의 정밀도가 중요해진다. 소재의 미세한 결함과 장비 성능이 수율과 생산비용을 좌우하는 만큼 소부장 기업과의 협력이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 기업들의 기술 추격이 빨라지는 상황에서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경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차세대 기술 개발뿐 아니라 안정적인 공급망 확보도 중요해졌다"며 "일본은 핵심 소재와 장비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춘 만큼 국내 기업들과의 협력이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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