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의 영성(Spiritual Asia)㉞ | 유대교 이야기 ③] 지식과 부와 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 아인슈타인에서 노벨상·금융·기업·AI까지

  • 질문의 민족이 세계의 지식과 부를 얻은 뒤 다시 마주한 오래된 질문

한 민족이 오랫동안 공부하고 질문하면 무엇을 얻게 되는가. 아마도 지식일 것이다. 지식은 기술을 만들고 기술은 산업을 낳으며 산업은 부를 만든다. 부는 다시 기업과 자본을 낳고, 자본과 기술이 결합하면 어느 순간 거대한 힘이 된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그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유대교 이야기 1편에서는 아브라함과 모세를 따라 떠남과 해방, 계약의 길을 걸었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땅을 떠났고 모세는 노예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났다. 그 긴 여정의 끝에서 인간은 자유를 얻었지만,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도 배웠다. 2편에서는 그 계약이 어떻게 토라와 탈무드, 안식일과 가정교육, 질문과 토론의 문화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보았다. 성전이 무너진 뒤 유대인은 돌로 된 성전을 대신해 말씀의 성전을 세웠고, 나라를 잃어도 책을 읽었으며 책을 빼앗겨도 기억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르치고 자식은 다시 그 자식에게 전했다.
 
떠남이 자유를 낳았고 자유가 계약을 낳았으며 계약이 공부를 낳았다. 그리고 수천 년의 공부는 마침내 지식이 되었고, 지식은 부와 힘을 낳았다.
 
유대교 이야기 3편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지식과 부와 힘을 얻은 인간은 그것을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가.
 
◆아인슈타인, 우주의 질서를 다시 묻다
 
20세기의 문을 연 위대한 과학자 가운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빼놓을 수 없다. 1879년 독일 울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기존 물리학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간과 공간부터 다시 물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가. 공간은 절대적인가. 빛은 무엇인가. 중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남들이 이미 답이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다시 질문했다.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인류가 우주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받은 1921년 노벨물리학상의 직접적인 공로는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광전효과 법칙의 발견이었다. 과학의 혁명은 때때로 새로운 답보다 새로운 질문에서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의 삶은 유대교의 오랜 질문 문화와 현대 과학정신이 만나는 하나의 상징처럼 보인다. 물론 그의 천재성을 유대교 교육 하나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무리다. 한 과학자의 위대한 성취에는 개인의 재능과 시대적 조건, 유럽 과학의 오랜 축적, 대학과 연구기관이라는 제도가 함께 작동했다.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그런가.
 
이 짧은 질문이 우주의 모습을 바꾸었다. 탈무드의 공부방에서 수없이 반복되던 질문 역시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왜 그런가. 다르게 볼 수는 없는가. 지금까지의 설명이 틀렸다면 어떻게 되는가.
 
질문하는 인간이 세상을 바꾼다.
 
◆노벨상과 유대인의 놀라운 숫자
 
노벨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현상을 만나게 된다. 유대인 또는 유대계 인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세계 인구에서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에 견주어 매우 높다는 사실이다. 여러 통계와 연구에서 역대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유대계 인물의 비중을 약 20% 안팎으로 추산한다. 세계 유대인 인구가 인류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놀라운 현상이다.
 
물리학에서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닐스 보어와 리처드 파인먼 같은 인물이 나왔고 의학·화학·경제학·문학에서도 많은 유대계 수상자가 배출됐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이를 혈통의 우월성으로 설명해서는 안 된다.
 
어떤 민족이 생물학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식의 주장은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어렵고, 인류는 이미 20세기의 참혹한 역사 속에서 그러한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낳는지 경험했다. 유대인의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해하려면 유전적 신화가 아니라 역사와 문화, 교육과 제도를 함께 보아야 한다.
 
수천 년 동안 이어진 문자교육, 토라를 읽기 위한 문해력, 부모가 자녀교육을 종교적 책임으로 받아들인 전통, 질문과 토론을 권장한 학습문화, 디아스포라의 삶 속에서 교육을 가장 안전한 이동 자산으로 보았던 현실적 필요, 도시와 상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광범위한 네트워크, 그리고 근대 이후 유럽과 미국의 대학·과학 제도와 결합한 역사적 조건이 함께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천재는 어느 날 하늘에서 홀로 떨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한 사람의 재능 뒤에는 그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며 질문하게 하는 문화가 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사례가 인류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유대인은 특별하다’가 아니다.
 
교육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가 인간의 가능성을 키운다.
 
◆지식은 국경을 넘는다
 
디아스포라는 유대인에게 비극이었다. 고향을 떠나야 했고, 새로운 땅에 정착하면 다시 추방당하는 일이 반복됐다. 종교적 박해와 사회적 차별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에는 역설이 있다.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움직일 수 있는 자산을 갖게 된다.
 
토지는 움직이지 못한다. 건물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지식은 움직인다. 언어도 움직이고 수학도 움직이며 의학도 움직인다. 계산과 계약의 기술도 국경을 넘어간다. 그래서 디아스포라의 삶은 결과적으로 지식과 인간관계, 신뢰와 네트워크라는 ‘보이지 않는 자산’의 가치를 높였다.
 
중세 이슬람권과 유럽 여러 지역의 유대인들은 상업과 수공업, 의학과 번역, 행정과 금융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오가며 살았기에 서로 다른 문명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이 역사 또한 낭만적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한 경우도 있었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토지 소유나 길드 가입, 특정 직업 진출이 제한됐다. 금융업 역시 단순히 ‘유대인은 돈을 잘 다룬다’는 식으로 설명할 일이 아니다. 중세 기독교 사회의 이자에 관한 종교적 규범, 유대인의 상업 네트워크와 문해력, 계약 관습, 정치권력의 자금 수요와 직업 제한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과 금융을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도 아니고 상식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오랜 반유대주의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을 되풀이할 위험이 있다.
 
역사는 언제나 신화보다 복잡하다.
 
◆금융의 힘, 신뢰의 기술
 
그럼에도 근대 금융사에서 여러 유대계 금융가와 가문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사실이다. 유럽 금융사에서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대표적이다. 유럽 여러 도시에 가족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빠르게 정보를 주고받으며 국가와 기업에 자본을 공급했다. 현대 미국의 금융과 투자, 기업 경영에서도 많은 유대계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금융의 본질을 돈으로만 이해하면 더 중요한 것을 놓친다.
 
금융은 본래 신뢰를 시간으로 바꾸는 기술이다. 오늘 가진 사람이 내일 필요한 사람에게 자본을 제공한다. 그 사이에 계약이 있고 약속이 있으며 신용이 있다.
 
돈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렇기에 금융이 정의를 잃으면 가장 위험한 힘으로 변할 수도 있다. 돈이 인간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돈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금융은 공동체를 살리는 혈액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이 된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인류에게 남긴 경고도 결국 이 문제와 맞닿아 있다.
 
금융기술의 수준이 높다고 금융문명의 수준까지 높은 것은 아니다.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가보다 그 돈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기업가 정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 경제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지식과 기술로 이동하면서 유대계 기업가와 창업자들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졌다. 미국의 정보기술과 인터넷 산업,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바이오와 금융, 벤처투자 분야에서 많은 유대계 인물이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냈다.
 
구글 공동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소련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계 가정 출신이고,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와 오픈AI의 샘 올트먼도 유대계 배경을 가진 세계 기술산업의 대표적 인물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혈통보다 환경을 보아야 한다. 질문을 장려하고 권위에 대한 질문을 반드시 무례로만 받아들이지 않으며 실패를 인생의 끝으로 여기지 않는 문화와 제도가 중요하다. 토론하고 다시 시도하고,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나며, 자본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 움직인다. 그런 환경이 혁신을 만든다.
 
유대인의 오랜 질문 전통과 현대 벤처 생태계 사이에 하나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기존 질서에 질문하고 새로운 해답을 찾아가는 태도에서는 분명 문화적 울림을 발견할 수 있다.
 
기업가란 어쩌면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질문을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다.
 
왜 꼭 이렇게 해야 하는가.
 
그 질문 하나에서 새로운 기업이 태어난다.
 
이미지챗GPT 생성
이미지=챗GPT 생성


◆사막에서 ‘스타트업 네이션’으로
 
1948년 건국된 이스라엘은 국토와 인구가 큰 나라가 아니다. 천연자원만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에 설 조건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건국 이후 여러 차례 전쟁을 겪었고 지금까지도 심각한 안보 갈등과 지정학적 불안 속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세계적인 기술혁신 국가 가운데 하나로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높은 연구개발 투자와 대학·연구기관, 군에서 축적된 기술과 민간산업의 연결, 벤처캐피털, 세계 각지의 디아스포라 네트워크, 이민자들의 경험, 정부의 기술정책,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 거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이스라엘은 오늘날에도 국내총생산 대비 연구개발 투자가 세계 최고 수준인 국가 가운데 하나다. 텔아비브와 하이파를 중심으로 정보기술·반도체·사이버보안·바이오·의료기술·농업기술·물관리 기술 생태계가 성장했고, 인텔·마이크로소프트·구글·엔비디아 등 세계적인 기술기업들도 이스라엘 연구개발 생태계와 관계를 맺어왔다.
 
사막에서 물이 부족한 나라는 물을 연구했고, 안보가 불안한 나라는 보안을 연구했으며, 국내시장이 작은 나라는 처음부터 세계를 시장으로 바라보았다.
 
위기가 저절로 혁신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기를 질문으로 바꾸는 사회에는 혁신의 가능성이 생긴다.
 
없는 것을 한탄하기보다 물었다.
 
없는 것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AI 시대의 이스라엘
 
이제 이스라엘의 혁신 생태계는 AI와 딥테크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머신러닝, 컴퓨터비전, 자율주행, 사이버보안, 의료AI와 국방기술 분야에서 기업과 연구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생태계에는 대학의 연구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군과 산업의 기술 연결, 창업 경험자들의 재창업, 글로벌 자본, 미국 실리콘밸리와의 네트워크, 실패한 기업에서 나온 인력이 다시 다른 기업으로 이동하는 구조가 함께 존재한다.
 
실패가 경험으로 축적되고 사람이 이동하면서 지식도 이동한다. 그 지식이 다시 기업을 만든다.
 
바로 이것이 생태계다.
 
그러나 AI가 강해질수록 더 어려운 질문이 따라온다. AI를 군사기술에 사용할 것인가,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시민을 보호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과도한 감시에 사용할 것인가. 진실을 찾는 데 사용할 것인가, 가짜뉴스와 선전을 만드는 데 사용할 것인가. 인간의 자유를 넓히는 데 사용할 것인가, 인간을 더욱 정교하게 통제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기술에는 스스로 목적을 정하는 양심이 없다.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과학의 힘은 누구의 것인가
 
아인슈타인의 삶은 여기에서 다시 의미를 갖는다. 그의 이론은 20세기 물리학의 중요한 토대가 됐고, 현대 물리학의 발전은 원자력 시대와도 이어졌다. 그는 나치 독일이 핵무기를 먼저 개발할 가능성을 우려해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에게 핵 연구의 필요성을 알리는 편지에 이름을 올렸지만, 이후 핵무기가 실제 인간에게 사용되는 시대까지 살아야 했다.
 
과학의 발견은 한 과학자의 손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식은 기술이 되고 기술은 힘이 된다. 그 힘이 과학자의 연구실을 떠나 국가와 군대와 기업의 손으로 들어가는 순간 새로운 윤리의 문제가 시작된다.
 
내가 발견할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만들어도 되는가. 만들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사용해도 되는가. 기술적 가능성이 곧 윤리적 정당성을 의미하는가.
 
오늘 AI 연구자들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오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지능을 만들 수 있다면 어디까지 만들어야 하는가. 그 지능의 결정권은 누가 가져야 하는가. 누가 통제하고 누가 책임질 것인가.
 
과학의 마지막 질문은 결국 과학의 바깥에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공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유대교는 처음부터 우상을 경계했다. 출애굽기의 금송아지는 단순히 금으로 만든 동상 하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는 힘을 신으로 만들고 싶은 오래된 욕망이 있다.
 
돈도 우상이 될 수 있고 지식도 우상이 될 수 있다. 국가도 우상이 될 수 있고 민족도 우상이 될 수 있으며 기술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심지어 종교 자신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성공 역시 마찬가지다.
 
노벨상 수상자가 많다는 사실이 한 공동체의 도덕적 우월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한 기업가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졌다고 해서 그 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방식까지 옳아지는 것도 아니다.
 
힘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강하다는 것과 옳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유대교의 오래된 예언자 정신이 다시 등장한다.
 
◆왕보다 정의를 말한 예언자들
 
히브리 성서의 예언자들은 권력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 앞에서 불편한 진실을 말했다. 왕이 잘못하면 왕을 꾸짖었고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짓밟으면 정의를 요구했다.
 
아모스는 제사와 찬양이 넘쳐도 정의가 없다면 그것만으로 신앙이 완성될 수 없음을 외쳤다.
 
정의가 없는 종교는 종교의 본뜻을 잃는다.
 
예언자 미가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삶을 정의와 인애, 겸손이라는 언어로 압축했다. 종교의 깊이는 성전의 크기로만 판단되지 않고 국가의 위대함도 군사력으로만 판단되지 않는다. 기업의 위대함 역시 시가총액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적에게도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는가. 힘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가.
 
그것이 문명의 수준을 결정한다.
 
유대교와 이스라엘은 같은 말이 아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유대교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종교이고, 유대인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살아온 다양한 공동체이며, 현대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된 하나의 국가다. 세 가지는 서로 깊은 관련이 있지만 동일하지 않다.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 정부의 모든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정부의 구체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곧 유대교나 세계의 유대인 전체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을 명분으로 유대인 전체를 증오하거나 공격한다면 그것은 정책 비판의 범위를 벗어나 반유대주의로 향한다.
 
이 구분은 오늘 더욱 중요하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과 그 뒤 이어진 가자 전쟁 및 무력 충돌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쪽의 수많은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2026년 현재까지도 가자의 민간인들은 심각한 인도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유대인이 수천 년 동안 박해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 한 국가의 모든 행위를 자동으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현대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과 군사행동에 대한 비판이 유대인 전체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원칙이다.
 
민간인의 생명은 어느 민족이든 존엄하다. 아이의 목숨에는 국적이 없고 고통에는 종교가 없다.
 
정의란 내가 지지하는 편에 유리한 기준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다석 유영모가 다시 묻는다
 
유대교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다시 다석 유영모에게 돌아간다. 다석은 많이 공부한 사람이었다. 성경과 불경, 논어와 맹자, 노자와 장자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인 관심은 지식 자체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바라본 것은 ‘하나’였다.
 
다석에게 하나는 단순한 숫자 1이 아니다. 존재의 근원이며 인간이 자신을 낮추고 비우면서 찾아가야 할 궁극의 자리였다. 그가 말한 ‘얼나’ 역시 돈을 많이 가진 나도, 높은 자리에 오른 나도 아니다. 남보다 많이 알고 강한 힘을 가진 나조차 아니다.
 
욕망과 자아의 껍질을 넘어 참된 자신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얼나의 길이었다.
 
유대교의 하나님과 다석의 ‘하나’를 신학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역사와 신앙의 세계를 함부로 하나로 섞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을 향해 던지는 궁극의 질문에서는 서로 만날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지식 다음에는 지혜가 와야 한다
인류는 지금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많은 지식을 손에 쥐고 있다. AI는 한 인간이 평생 읽기 어려운 양의 문서를 순식간에 처리하고, 인간은 유전자를 편집하며 우주에 탐사선을 보내고 원자보다 작은 세계까지 들여다본다.
 
그러나 지식이 늘어난 만큼 인간이 지혜로워졌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기는 오히려 어려워졌고, 세계의 부는 커졌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무기는 상상을 넘어 정교해졌지만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연결 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인간의 고독은 끝나지 않았고, AI는 날마다 똑똑해지는데 인간은 여전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그래서 지식 다음에는 지혜가 와야 한다.
 
기술 다음에는 윤리가 와야 하고, 성장 다음에는 책임이 와야 하며, 부 다음에는 나눔이 와야 한다. 권력 다음에는 절제가 와야 한다.
 
그리고 지능 다음에는 영성이 와야 한다.
 
◆HAI에서 SAI로
 
AI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질문도 결국 인간에 관한 것이다. 처음에는 기술 중심의 AI가 앞섰고, 그 뒤 기술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Human-centered AI, 즉 HAI의 논의가 확산됐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인간의 편리와 효율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생명, 문화와 자연, 지구와 우주의 조화까지 생각하는 Spirituality-centered AI, SAI, 즉 영성 중심 AI를 생각할 때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성은 특정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보다 더 큰 존재와 세계를 의식하며 자신의 욕망과 힘을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능력이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두 하지 않는 것, 가질 수 있다고 해서 모두 갖지 않는 것, 이길 수 있다고 해서 상대를 반드시 파괴하지 않는 것.
 
절제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영성의 시작이다.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시대라면 인간은 AI보다 더 인간다워져야 한다.
 
세 번의 질문
유대교 삼부작의 긴 여행을 이제 마친다.
 
첫 번째 여행에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만났다. 거기서 물었다.
 
무엇으로부터 떠날 것인가.
 
우상에서 떠나고 노예의 상태에서 떠나 자유를 향해 걸어야 했다.
 
두 번째 여행에서는 토라와 탈무드, 안식일과 유대인의 가정을 만났다. 거기에서 다시 물었다.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다음 세대에 전할 것인가.
 
읽고 묻고 기억하고 쉬며, 배운 것을 삶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여행에서는 아인슈타인과 노벨상, 금융과 기업, 이스라엘의 혁신과 AI를 만났다. 마지막 질문은 더 무겁다.
 
그렇게 얻은 지식과 부와 힘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떠남은 자유를 만들었고 자유는 계약을 만들었으며 계약은 공부를 만들었다. 공부는 지식을 낳고 지식은 부와 힘을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난다면 문명은 완성되지 않는다.
 
힘은 다시 책임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유대교 삼부작의 처음과 끝을 잇는 고리다.
 
◆다시 아브라함에게
 
수천 년을 돌아 다시 아브라함의 출발점에 선다. 그에게 하나님은 떠나라고 했다. 익숙한 것에서 떠나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 떠나며 우상에서 떠나 새로운 길을 걸으라고 했다.
 
21세기의 인간에게도 어쩌면 같은 명령이 필요한지 모른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믿음에서 떠나고, 기술이 인간을 자동으로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떠나야 한다. 내 민족만 옳다는 믿음에서 떠나고, 내 종교만이 진리를 독점한다는 오만에서 떠나며, 내가 힘을 가졌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착각에서도 떠나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모세의 출애굽은 끝난 사건이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집트를 만들고 다시 그곳의 노예가 된다.
 
돈의 이집트, 권력의 이집트, 민족주의의 이집트, 기술의 이집트, 그리고 AI의 이집트.
 
그곳에서 다시 나와야 한다.
 
◆결국 사람이다
 
유대교의 긴 역사를 따라오면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신비한 성공비결이 아니다.
 
책 한 권이고 질문 하나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부모이고 스승에게 질문하는 학생이다. 안식일에 일을 멈추고 가족과 한 식탁에 앉는 사람이며, 낯선 땅에서도 학교를 세우는 공동체이고, 마침내 힘을 얻은 뒤에는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려는 양심이다.
 
문명은 거대한 건물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만드는 것이 문명이다.
 
노벨상도 결국 사람에게 돌아가고 기업도 사람이 만들며 AI도 사람이 만든다. 돈을 움직이는 것도 사람이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도, 평화를 만드는 것도 사람이다.
 
그래서 모든 문제는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어떤 인간을 만들 것인가.
 
유대교 3000년의 역사도 이 질문을 피해가지 못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진리·정의·자유
 
진리는 질문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온다.
 
정의는 힘을 가진 사람이 그 힘을 절제할 때 모습을 드러낸다.
 
자유는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까지 다스릴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영성은 진리와 정의와 자유를 하나로 묶는다.
 
많이 아는 것이 인간의 마지막 목적일 수 없다. 많이 갖는 것도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남보다 강해지는 것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이유일 수도 없다.
 
지식은 생명을 살리는 데 쓰여야 한다. 부는 인간의 존엄을 높이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힘은 약자를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지키는 힘이 되어야 한다. AI는 인간을 대신해 인간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과 문명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떠남에서 시작해 모세의 자유와 계약, 토라의 말씀, 탈무드의 질문, 안식일의 멈춤, 디아스포라의 공부, 아인슈타인의 과학을 지나 오늘의 AI까지 이어진 긴 여행이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이다.
 
그 질문 앞에서는 유대인도 기독교인도 무슬림도 불교인도, 그리고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답해야 한다.
 
무엇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앎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누구와 나눌 것인가.
 
얼마나 강한가가 아니라 그 힘으로 누구를 지킬 것인가.
 
아브라함은 떠났고 모세는 자유를 향해 걸었으며 그 후손들은 책을 들었다.
 
그리고 수천 년 뒤 인류는 AI를 손에 들었다.
 
이제 선택은 다시 인간에게 돌아왔다.
 
지식에서 지혜로.
부에서 나눔으로.
힘에서 책임으로.
지능에서 영성으로.
 
하나에서 와서 하나를 찾아가고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길에서, 유대교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의 인류에게 남기는 마지막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 모른다.
 
“그대가 얻은 힘은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지식은 지혜가 되고, 부는 나눔을 만나며, 성공은 문명이 되고, 힘은 정의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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