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세계 한복판에서 아주 작지만 인류의 정신사를 뒤바꿀 질문 하나가 시작됐다. 신이 정말 그렇게 많을까. 이 모든 세계와 인간을 있게 한 근원은 하나가 아닐까. 유대교의 시작이다.
오늘날 세계 인구에서 유대교 신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러나 유대교가 세계문명에 남긴 흔적은 신자의 숫자로 설명할 수 없다. 기독교는 유대교라는 토양에서 태어났고, 이슬람교 역시 아브라함과 모세의 전통을 자신의 신앙사 속에 받아들였다. 오늘날 세계를 움직이는 거대한 두 종교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서아시아의 작은 땅과 한 민족의 오래된 신앙에 닿는다.
그래서 유대교를 이해한다는 것은 한 종교를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며, 지난 수천 년 동안 세계를 움직여 온 종교와 철학, 윤리와 정치의 중요한 뿌리를 살펴보는 일이다. 그 첫머리에 한 사람이 서 있다. 아브라함이다.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고향과 친족,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나안을 향한다. 아브라함의 실제 생애를 독립적인 고고학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의 이야기는 우선 고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오랜 세월 전승해 온 종교적 기억과 신앙의 서사로 읽어야 한다. 성서 역시 오늘날의 역사책과 같은 기준으로만 읽을 수 없다. 역사와 법, 시와 기도, 신앙고백과 신학적 해석이 함께 들어 있는 거대한 종교문헌이다.그러나 역사적 검증의 문제와 별개로 아브라함 이야기가 이후 유대교 정신을 결정한 거대한 원형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 첫 번째가 ‘떠남’이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떠난다. 땅을 떠나고 혈연의 울타리를 넘어가며 자신이 알고 있던 신들의 세계에서도 떠난다. 종교는 여기에서 단순한 위안에 머물지 않는다. 인간에게 익숙한 것을 버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걸어가라고 요구한다. 신앙의 역사는 어쩌면 인간의 ‘떠남의 역사’인지 모른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은 완성된 국가도, 군대도, 성전도 아니었다. 약속뿐이었다. 후손과 땅, 그리고 복에 대한 약속이었다. 《창세기》는 이 관계를 ‘계약’으로 표현한다.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서 시작된 계약의 정신은 뒤이어 등장하는 모세와 시나이 계약을 거치며 이스라엘 신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으로 자리 잡는다.
여기서 유대교의 독특함이 시작된다. 신은 인간이 제사를 드려 달래야 하는 자연의 힘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과 관계를 맺고 인간에게 책임을 요구하며, 인간 역시 그 관계 안에서 약속과 의무를 지는 존재가 된다. 신앙이 계약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들 이삭으로, 다시 손자 야곱으로 이어진다. 야곱은 성서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기억된다. 역사적으로 열두 지파가 실제 하나의 혈통에서 그대로 분화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형성 과정은 성서의 족보보다 훨씬 복잡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종교에서 기억은 때때로 혈통보다 강하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우리는 야곱, 곧 이스라엘의 자손이다.” 이 공동의 기억이 여러 가족과 부족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었다. 국가는 영토로 국민을 묶지만 종교는 기억으로 공동체를 묶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한복판에 유대교 역사에서 가장 강렬한 사건이 등장한다. 출애굽이다.
노예의 울부짖음을 들은 하나님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으며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다고 전한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너는 이야기, 광야의 방황과 시나이산의 십계명은 유대교뿐 아니라 기독교와 서구문화에까지 깊숙이 들어온 이야기다.다만 이 거대한 출애굽 사건 전체를 성서가 묘사하는 규모와 방식 그대로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가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역사학이 신앙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대 종교문헌을 읽을 때 신앙이 고백하는 진실과 역사학이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의 층위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 구별을 하고 나면 출애굽이 갖는 정신사적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왕궁에서 처음 나타나는 신이 아니다. 노예들의 울부짖음을 듣는 신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신이다.
당시 제국의 신은 대체로 왕과 승자의 편이었다. 강대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나라의 신이 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히브리 성서의 하나님은 다르게 등장한다. 제국의 왕보다 노예의 절규에 귀를 기울인다. 권력보다 인간의 고통을 본다.
출애굽은 그래서 단순한 민족 이동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방의 이야기다. 이후 유대인의 유월절은 이 사건을 끊임없이 현재로 불러낸다. 먼 옛날 누군가가 이집트를 떠났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 역시 그 해방의 역사 안에 서 있다는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린다.
그런데 유대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곧 자유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노예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곧바로 율법이 주어진다. 해방 다음에 계명이 온다. 자유 다음에는 책임이 온다. 이것이 유대교의 독특한 정신이다.
모세와 시나이, 자유에 책임을 더하다
아브라함이 유대교의 ‘믿음의 조상’이라면 모세는 유대교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이며 율법 전통의 중심인물이다. 성서는 그가 이집트 왕실에서 성장했지만 결국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인들과 운명을 함께했다고 전한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그는 파라오 앞에 선다.“내 백성을 보내라.”
이 짧은 외침은 수천 년을 살아남았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사람들도, 인종차별과 싸운 사람들도, 독재와 식민지배에 저항한 사람들도 출애굽의 언어를 자신의 시대에 다시 불러냈다. 인간은 누구의 영원한 노예로 태어난 존재도 아니라는 인간 존엄의 선언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의 더 중요한 역할은 해방 이후에 나타난다. 시나이산이다. 성서에 따르면 모세는 그곳에서 십계명을 받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출발하지만 부모와 생명, 혼인과 재산, 증언과 욕망 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내려온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종교가 하늘만 바라보지 않는다. 하늘의 종교가 땅의 윤리가 된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삶이 달라져야 한다. 힘 있는 자가 약자를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고아와 과부, 이방인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정의롭지 못한 부와 권력은 예언자들의 준엄한 비판을 받는다. 훗날 아모스와 이사야, 미가 같은 예언자들이 사회의 불의를 질타할 수 있었던 정신적 뿌리도 이러한 계약과 정의의 전통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십계명은 단순한 금지 목록이 아니다. 자유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정하는 최소한의 질서다. 출애굽이 자유를 주었다면 시나이는 자유의 책임을 가르쳤다.
유일신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유대교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아브라함이 어느 날 갑자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완성된 철학적 유일신론을 세웠고, 그 순간부터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을 믿었다고 설명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지나치게 단순하다.성서 자체를 읽어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가 주변 민족의 종교와 끊임없이 충돌했고 우상숭배가 반복됐음을 알 수 있다. “야훼만을 섬기라”는 명령이 끊임없이 등장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다른 신들을 섬기는 현실이 존재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일신 신앙은 길고 치열한 정신적·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더욱 명료해졌다. ‘우리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출발해 ‘우리의 하나님이 가장 위대하다’를 넘어 마침내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며 온 우주의 하나님이다’라는 보편적인 신앙으로 깊어져 갔다.
특히 왕국의 멸망과 바빌론 유수 같은 역사적 재난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라가 무너졌다고 하나님도 패배한 것인가. 성전이 무너졌다고 하나님도 사라진 것인가. 그들은 오히려 반대의 답을 찾아갔다. 하나님은 한 나라의 영토와 하나의 성전에 갇힌 신이 아니라 하늘과 땅, 모든 민족과 역사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부족의 신에서 우주의 하나님으로. 유대교의 ‘하나’가 깊어진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유대교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가 ‘셰마’다. 《신명기》 6장에서 시작되는 이 고백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부름으로 시작해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여기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단어가 있다.
“들으라.”
보라는 말보다 먼저 들으라고 한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기 쉽다. 그러나 들으려면 자신을 낮춰야 한다. 다른 목소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다. 종교의 시작은 어쩌면 말하는 데 있지 않고 듣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자연의 소리를 듣고, 양심의 소리를 듣고, 이웃의 고통을 듣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근원적인 질문을 듣는 것이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인간이 마음대로 형상을 만들어 가두는 것을 경계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중심은 눈에 보이는 우상에서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이동한다. 말씀은 기록되고 기록은 토라가 된다.
그리고 훗날 유대민족이 나라와 성전을 잃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거대한 씨앗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영토는 빼앗길 수 있다. 성전은 파괴될 수 있다. 왕조도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은 가지고 갈 수 있다. 책은 국경을 넘는다. 기억은 쉽게 빼앗을 수 없다. 유대교 제2편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토라와 탈무드, 회당과 안식일, 가정과 교육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선택은 특권인가, 책임인가
유대교를 이야기하면서 피할 수 없는 말이 ‘선민’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다는 믿음이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민족적 특권의식으로 받아들이기 쉽다.그러나 유대교 전통에는 선택을 특권보다 계약에 따른 의무와 책임으로 이해하는 강력한 흐름이 존재한다. 선택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선택받았기에 더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오래된 종교적 관념은 오늘의 지도자와 권력에도 적용할 수 있다. 높은 자리는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 많이 가진 사람에게는 더 큰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많이 배운 사람은 자신의 지식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할 책임이 있다. 선택을 특권이 아니라 책임으로 읽는 순간 수천 년 전 유대교의 이야기는 21세기의 윤리가 된다.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 ― “떠남, 해방, 계약”
유대교 제1편의 긴 여정을 세 단어로 압축하면 이렇다.“떠남, 해방, 계약.”
아브라함은 떠났다. 모세는 노예들을 이끌고 나왔다. 시나이에서는 계약이 맺어졌다. 떠남은 인간을 익숙한 세계로부터 자유롭게 했고, 출애굽은 인간을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으며, 계약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책임을 부여했다.
그래서 유대교를 단순히 ‘한 분의 하나님을 믿는 종교’라고만 정의해서는 그 깊이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 하나의 궁극적 근원을 믿으며 그 하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서 20세기 한국의 한 사상가를 떠올리게 된다. 다석 유영모다.
다석은 평생 ‘하나’를 생각했다. 그가 말한 하나는 단순한 숫자 1이 아니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인간이 돌아가야 할 궁극을 가리켰다. 그리고 인간 안에는 그 하나를 향해 깨어나는 참된 자아, ‘얼나’가 있다고 보았다.
물론 유대교의 하나님과 다석의 ‘하나’를 같은 개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계약하고 모세를 부르며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계명과 책임을 요구하는 인격적 하나님이다. 반면 다석의 ‘하나’는 기독교와 동양사상을 자기 언어로 소화하면서 존재의 궁극을 탐구한 독특한 한국적 종교철학이다. 역사적·신학적 차이는 분명하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하나의 질문이 만난다. 이 수많은 것들을 있게 한 근원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아브라함은 그 물음을 안고 고향을 떠났고, 모세는 그 물음을 품고 광야를 걸었다. 다석은 20세기 한국에서 그 물음을 붙잡고 ‘하나’를 말했다.
시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며 종교도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 궁극을 향해 던지는 질문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어쩌면 5000년 아시아 영성의 역사는 바로 이 질문의 역사인지 모른다.
하나를 믿는다는 것
21세기는 다시 수많은 ‘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돈이 신이 되고 권력이 신이 된다. 국가와 민족이 신이 되기도 하고 기술이 신이 되기도 한다. 이제 AI조차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빠르게 판단하는 새로운 권위로 등장하고 있다.고대인이 나무와 돌로 우상을 만들었다면 현대인은 숫자와 알고리즘, 자본과 권력으로 우상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수천 년을 건너 우리에게 도착한 유대교의 첫 질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당신이 정말로 섬기는 것은 무엇인가. 돈인가. 권력인가. 욕망인가. 기술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하나인가.
유일신 사상의 정신사적 의미는 신의 숫자를 여러 개에서 하나로 줄였다는 데만 있지 않다. 인간이 절대시하던 세상의 수많은 것들을 상대화했다는 데 있다. 왕도 신이 아니다. 돈도 신이 아니다. 국가도 신이 아니다. 인간 자신도 신이 아니다. 그 모든 것 위에 궁극적인 기준을 세운다.
그러므로 하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많은 우상 앞에서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일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의 떠남에서 시작해 모세의 출애굽을 지나 시나이 계약에 이른 오래된 대서사가 오늘날에도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떠나라. 거짓된 신들로부터.
자유로워져라.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힘으로부터.
그리고 책임져라. 자유를 얻은 인간답게.
그것이 아브라함과 모세가 남긴 오래된 질문이며 유대교가 인류문명에 던진 첫 번째 거대한 메시지다. 그 길의 끝에서 다시 한 글자가 기다리고 있다.
“하나.”
수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수많은 것을 있게 하는 하나. 인간은 그 하나를 찾아 수천 년을 걸어왔다. 그 긴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이 기사는 생성형 AI를 활용해 작성됐으며 편집자의 검토를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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