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롭던 주식과 부동산 시장에 거꾸로 발목을 잡힌 꼴이다. 정치와 경제 양쪽 다 그렇다. 주식과 부동산이 6·3 지방선거 민심을 좌우했고, 최근 대통령 국정 지지도 급락, 개각과 청와대 정책실장 교체 등 모든 걸 집어삼키고 있다. 대단한 파괴력이다.
그런데 주식과 부동산보다 더 심각한 곳이 사실 많다. 예컨대 쿠팡의 새벽배송이 논란인 유통 물류 산업, 넷플릭스나 유튜브에 밀려 힘을 못 쓰고 있는 기존 방송미디어 산업이 대표적이다. 쿠팡 같은 온라인 유통 물류 비즈니스로 인해 오프라인 유통 산업이 초토화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마트 같은 대기업도 악영향이 크지만 그 여파가 최종적으로는 영세 재래시장에까지 미치고 있다. 사람들이 시장에 가지 않는다. 모두 온라인 주문에 매달리고 있다. 온라인에 이루 헤아릴 없는 상품이 진열돼 있고, 주문 즉시 온라인 배송업체가 세계 최고 속도로 상품을 주문자에게 가져다 준다. 이러니 결과는 뻔하다. 방송미디어 분야도 마찬가지다. 지상파나 유료방송 같은 전통적 시장이 꺾인 지 이미 오래다. 시청률이 과거와 천양지차다. 대신 넷플릭스 같은 OTT와 숏폼, 온라인 플랫폼 등이 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유통 물류와 방송 미디어 둘 다 일종의 플랫폼 비즈니스다. 기술 진보에 의해 새로운 플랫폼이 등장하고 번성하는 과정이다. 사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과정이기도 하다. 이때 기술 진보 생태계를 위해 신기술 뉴 비즈니스에는 최대한 규제를 적용하지 않고 대신 기존 기득권 올드 비즈니스에 강한 규제를 적용하는 소위 ‘비대칭 규제’가 상당 기간 유지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생태계 변화가 진행되면 다시 규제 체계를 전면 재정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과거와 달리 요즘 기술 진보 속도가 너무 빠르고 산업 생태계 변화 주기도 너무 짧아지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올드 비즈니스가 신기술로 무장한 뉴 비즈니스에 전례 없이 빠르게 꺾이고 있는데도 규제 틀의 재정비가 너무도 뒤처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생태계 변화가 충분히 이뤄지기 전에 전통 산업이 고사하면서 생태계 자체가 붕괴하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방송미디어 쪽은 상황이 어쩌면 더 심각하다. 현행 방송법은 1980년대 국가 통제 중심의 낡은 체계에서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다. 글로벌 OTT와 유튜브가 대중화된 현실에서 과거 지상파 독과점 시절과 아날로그 시대의 낡은 틀에 계속 묶여 있는 것이다. 이러니 광고 매출 급감 등 미디어 산업 전반의 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송과 OTT를 포괄하는 통합 미디어 법제를 마련하고 매체의 형식이 아니라 사업자의 시장 영향력과 이용자에게 미치는 위험에 따라 책임을 차등 부과하는 규제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구체적 사례로 2025년 제작된 드라마 ‘원경’을 보자. ‘원경’은 tvN에서는 전 회차가 15세 이상 시청가로 방송됐지만 티빙(OTT)에서는 1~6회가 청소년 관람불가 버전으로 공개됐다. 청소년 보호를 위해 차별적 규제를 적용할 나름의 이유가 납득이 가는 사례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같은 작품이 방송판과 OTT판에서 노출과 수위 높은 장면에 대해 다른 규제가 적용되는 현실이다. 게다가 비용과 의무 부과에서는 더욱 차별적이고 비대칭적이다. 국내 방송사는 방송통신발전기금이 부과되고 있고 시간과 형식의 제한, 시청자료 제출 의무 등을 부담시키고 있으나 넷플릭스와 유튜브는 이런 의무에서 대부분 제외돼 있다.
콘텐츠 지원정책도 더 치밀해지고 확대해야 한다. 2022년 경부터 ‘IP확보형’과 ‘플랫폼 연계형’ 등으로 나눠 콘텐츠 제작비 지원에 나서고 있으나 실제 지원사업이 제작사의 실질적인 수익 증가로 이어지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생성형 AI를 제작 혁신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적극 활용하되 학습 데이터 보상과 저작권 초상권 보호, 딥페이크 구제 기준 등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현재는 AI 기업이 어떤 방송 영상과 기사, 사진 등을 학습에 이용했는지 공개하지 않으면 방송사, 언론사 등 저작권자가 확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유통 물류 쪽도 마찬가지다. 남은 방법은 오히려 이마트 같은 오프라인 물류 업체에 새벽배송을 풀고 휴일 영업도 허용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기술 진보와 비대칭 규제는 자본주의만큼 그 역사가 길다. 그런데 이 역사 이면에는 하나의 원칙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바로 소비자 후생 증대다. 1980년대 이후 불어닥친 정보화 혁명 때도 마찬가지였다. 민영화, 경쟁 도입 등 명분은 소비자 선택권(채널) 확대였다. 그렇다면 우리 유통 물류 산업과 방송미디어 산업이 쿠팡과 넷플릭스를 넘기 위해서라도 변함 없이 견지할 원칙과 정신은 무엇이어야 할까. 역시 소비자다. 다만 거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은 소비자 선택권 확대가 아니다. 네트워크 산업의 자연독점에 뒷덜미를 잡혀 거꾸로 소비자 후생을 위축시키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트럼프 시대에는 소비자 후생 외에 한 가지 더 고려할 사항이 있다. 국내 산업 생태계와 일자리 보호를 위한 국경의 원칙이다. 깊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국제경제학과 및 동 대학원 ▷미국 미주리대 경제학 박사 ▷매경TV·매경출판 대표, 매일경제신문 워싱턴 특파원, 논설위원 등 ▷서울대 경제학부 객원교수 ▷한국데이터홈쇼핑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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