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전 국회의원]
주거기본권과 국가의 헌법적 의무
대한민국 헌법 제35조 제3항은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주거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인간다운 존엄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반드시 보장해야 할 법적 의무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국민 누구나 불안 없이 머물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공간을 보장하고 확보하는 일은 국가가 준수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책무다. ‘기본주택론’은 이러한 주거기본권을 보편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적 명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거는 시혜나 복지의 시선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시스템으로 뒷받침해야 할 기본권의 영역이자 국가의 당연한 의무임을 밝힌 것이다.
현실: 헌법 뒤에 가려진 열악한 주거 실태
그러나 헌법적 명제 뒤에 가려진 현장의 주거 실태는 매우 열악하다.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 및 공공 통계에 따르면, 최소한의 면적이나 전용 수세식 화장실·부엌 등 기초 시설조차 갖추지 못한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는 전국적으로 약 80만 가구(3.8%), 수도권 기준 4.4%에 달한다. 고시원·쪽방·비닐하우스 등 주택 이외의 거처에 몰린 비정상적 주거 가구까지 더하면 현실은 훨씬 심각하다. 2022년 여름 폭우로 발생한 서울 신림동 반지하 참사는 한국 사회의 주거 안전망 실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 정부와 지자체는 침수 위험지역 내 반지하 주택의 단계적 퇴출과 매입, 공공임대 이주 지원을 핵심 과제로 내걸었지만, 여전히 수도권에만 수십만 가구가 폭우와 재해 위험에 노출된 반지하에 그대로 남아 있다. 헌법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안전과 주거기본권이 대도시 밑바닥 삶에서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다.
전월세난
최근 가중되고 있는 전월세난은 서민들의 삶을 더욱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다. 매매가 불안에 따른 전세 선호와 보증금 미반환 공포가 겹치면서 전세의 월세 전환 속도는 가속화되었고, 임차인들의 실질 주거비 부담은 사회적 불안으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시장 불안 속에서도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오지 못하는 근본적 배경에는 정책 당국의 시각차가 자리 잡고 있다. 당국은 전세를 “임대인과 임차인 간에 형성된 사금융 제도이자,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변칙적 형태”로 보며 공적 금융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레 사라질 것으로 관망한다. 전세를 제도권 금융이나 공공의 영역이 아닌 개인 간 사적 채권·채무 관계로만 바라보는 이러한 인식 때문에, 당국은 전월세 불안을 극복할 근본적 정책 수단을 강구하기보다 대출 규제 등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만 소극적으로 접근해 왔다. 그 결과 시장의 불확실성은 더 커졌고 주거 안전망은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부동산 정책의 근본 목표는 '주거 안정'
부동산 정책의 지향점은 자산 가치의 부양이나 단순한 시장 관리를 넘어 국민의 ‘주거 안정’이라는 본연의 목표로 복귀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정책은 이 목표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주택을 투기나 금융의 수단으로만 접근하는 한, 열악한 거처에 방치된 이들과 전월세난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삶은 결코 개선될 수 없다. 국가가 헌법적 의무를 다하여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주거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것이 주택 정책의 본질이자 최우선 과제다.
전세보증 제도의 구조적 허점과 금융의 모럴 해저드
전월세난을 가중시킨 또 다른 핵심 고리는 역설적이게도 '서민 지원'을 명목으로 운용된 공적 보증제도에 있다. 동국대 박선영 교수가 지적했듯, 한국주택금융공사(HF)나 HUG 등 보증기관이 전세 보증금의 최대 100%까지 보증서를 발급해 준 것이 심각한 도덕적 해이로 귀결되었다. 시중은행은 공적 보증서만 있으면 세입자의 실질적인 상환 능력이나 신용도에 대한 평가(Underwriting)를 생략한 채 사실상 '무위험 대출'을 실행한다. 이로 인해 세입자는 소득 범위를 넘어서는 고액 전셋집을 대출로 얻고, 집주인은 이 갭 투자 자금으로 전셋값을 올리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예컨대 소득이 미미한 차주가 100% 보증을 등에 업고 3억 원짜리 전세 대출을 쉽게 받아 주택 가격 상승을 자극하고, 매매가와 전세가의 격차가 사라진 상태에서 역전세나 전세사기가 터지면 그 모든 손실과 위험은 세입자와 공적 보증기관(국민 혈세)으로 귀결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위험 리스크에 대한 금융기관의 신용평가 기능이 마비된 공적 보증이 전세 시장의 거품을 키우고 세입자를 더 깊은 불안으로 몰아넣은 셈이다.
시장 기능의 정상화와 공공임대 확충의 필요성
이상의 사례들은 부동산 정책이 단순한 시혜성 금융 지원이나 '어려운 서민 지원'이라는 명분에만 집착해서는 안 되며, 시장 고유의 위험 관리와 신용평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시장의 왜곡을 바로잡고 진정한 주거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역할을 확충하되, 시장 고유의 기능을 훼손하지 않는 균형 잡힌 접근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의 전체 주택 대비 장기공공임대주택 비율은 약 8% 수준에 머물러 있다. 독일이나 서구 선진국처럼 전체 주택의 15~20% 수준까지 공공임대 비중을 대폭 확충해야만, 비로소 민간 임대시장의 불안을 완충하고 주거기본권이라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는 튼튼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공공임대 공급의 구조적 전환과 시장 완충 역할
따라서 정책의 핵심 목표는 단순한 주택 공급을 넘어 주거기본권을 지탱할 실질적인 공공임대주택의 대폭적 확충이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재원 확보 및 재원 투입이 시장 기능을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과거 이명박 정부 당시 보금자리주택 공급 등 공공임대 확대 시도는 의미 있는 제도였지만, 재정 부담을 이유로 ‘10년 임대 후 분양’ 방식을 채택하는 한계를 보였다. 이는 공공이 지속해서 보유해야 할 주택 자산을 민간에 매각해 버림으로써, 주거 안전망 구축이라는 공공 본연의 목적과 배치되는 모순을 드러낸 사례다. 오스트리아 빈(전체 주택의 약 40%가 공공 및 사회주택)이나 독일처럼 공공임대 물량이 일정 규모 이상 구축되면, 민간 임대시장에서 임대료가 급등하더라도 공공이 시장 가격을 견인하고 완충하는 ‘가격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충분한 공공임대주택 확보가 시장의 거품과 임대료 폭등을 흡수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안전판이다. 전세제도를 단순히 소멸할 제도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주거 사다리' 기능의 상실로 불안해하는 서민들을 위한 실질적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현행 부동산 세제 및 금융 규제의 한계와 목표 미비
여기서 우리는 현행 부동산 세제와 금융 정책이 지닌 문제점을 직시해야 한다. 표면적으로 정책 당국은 '집값 잡기'와 '투기 억제'를 내걸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의 세제와 규제 수단들은 실질적인 주거기본권 확립이라는 목표와 거리가 있다. 대표적으로 1주택자와 다주택자, 혹은 주택(주거용)과 비주거용 부동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차등 과세하거나, 대출 규제(LTV·DSR) 등을 주요 정책 수단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투기적 수요가 세제의 틈새를 찾아 비주거용 부동산이나 꼼수 갭투자로 옮겨가는 풍선효과를 낳았고, 정작 실거주 목적의 무주택 서민과 청년층의 금융 접근성만 막아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집값을 잡겠다'는 수사 뒤에서 형식적 구분으로 자금 흐름을 억제하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정작 정책의 최종 목표가 '국민의 주거 안정'인지 '세수 확보 및 금융 리스크 관리'인지조차 모호해진 것이다.
세제 원칙의 재정립과 '기본주택'을 향한 명확한 지향점
부동산 정책의 목표가 더 이상 집값 억제라는 단기적 시장 반응이나 징벌적 세제·금융 통제에 몰두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동산 세제는 시장을 응징하거나 투기판을 쫓아다니는 수단이 아니라, 주거기본권을 보장하기 위한 지속 가능한 재원 확보 수단으로 명확히 재정립되어야 한다. 도로, 지하철, 학교 등 공공 인프라 구축으로 인해 발생한 부동산 가치 상승분(지대)의 일정 대가를 세금으로 정당하게 환수하고, 이를 다시 공공 주거 인프라 구축에 재투입하는 명확한 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 이제 '국민의 주거기본권 확보'라는 명확한 정책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다. 헌법적 가치를 시장에서 구체적인 시스템으로 구현해 내는 것, 그리고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지 않고 국민의 주거 안정을 지속 가능하게 지탱할 공공의 핵심 과제가 바로 '기본주택'이다. 정부와 정책 당국이 명확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주거기본권 실현에 과감히 나설 것을 기대한다.
▷서울대 경제학 박사 ▷제21대 국회의원 ▷카카오뱅크 공동대표 ▷한국투자신탁운용 총괄 최고투자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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