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바닷길은 오랫동안 정해져 있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물건을 보내려면 중국해와 말라카해협을 지나 인도양으로 들어간 뒤 홍해와 수에즈운하를 거쳐 지중해로 나가는 것이 정석이었다. 세계 해상무역의 상당 부분이 이 길에 의존했다. 미국이 인도·태평양과 중동에서 막강한 해군력을 유지해 온 것도 이 해상교통로의 안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지금 이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홍해에서는 후티 반군의 선박 공격이 이어지고, 중동의 군사적 긴장이 호르무즈해협으로 번지면서 기존 항로의 안전성이 흔들리고 있다. 일부 선사들은 수에즈운하 대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선택을 하고 있다. 배가 더 멀리 돌아가면서 운송기간은 길어지고 연료비와 보험료는 뛰었다. 무엇보다 화물이 언제 도착할지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북극항로 개척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해에만 23차례 항해했을 정도다. 러시아 북쪽 해안을 따라 유럽으로 가는 북극항로, 정확히는 북동항로(Northern Sea Route·NSR)를 새로운 물류축으로 키우려는 것이다. 이번 달 시레전드시핑(Sealegend Shipping)은 시험 항해 단계를 넘어 이미 중국~유럽 간 주간 정기 컨테이너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시작했다.
한국도 북극항로 개척을 위해 지난 22일 밤 2758TEU급(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 ‘팬스타 아크로(PANSTAR ACRO)’호가 힘찬 뱃고동을 울리며 부산항을 출발했다. 한국 선사가 컨테이너선을 이용해 북극항로를 운항하는 첫 사례다. 아크로호는 30일쯤 북극 해역에 진입해 다음 달 7일쯤 통과할 예정이다. 이후 영국 펠릭스토, 네덜란드 로테르담, 폴란드 그단스크를 차례로 들른 뒤 10월 5일쯤 부산신항으로 복귀한다. 기존 수에즈운하 항로보다 약 7000㎞ 짧은 길을 이용해 유럽까지 가는 시간을 10일 정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해양수산부는 이번 운항을 통해 북극항로가 기존 항로를 대체할 수준의 경제성과 안정성을 갖추고 있는지 면밀히 검증할 데이터를 확보하고 화물 확보와 운항 정시성, 보험·금융 비용 등을 분석해 향후 2030년을 목표로 한 정기노선 구축에 필요한 과제들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왜 지금 북쪽을 보는가
북극항로는 그동안 해운업계의 관심을 크게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해빙(海氷)으로 운항하기 어려운 구간이 많아 쇄빙선 없이 항해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제 유가 하락으로 거리 단축에 따른 연료 절감 효과도 줄었다. 그러나 최근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커진 데는 두 가지 요인이 겹쳐 있다. 하나는 기후변화다. 지구온난화로 북극 해빙이 빠르게 줄면서 여름철 몇 달 동안이지만 대형 선박이 지나갈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이 만들어졌다. 노르웨이 선박 추적 기관인 '북극권 물류 연구소(Centre for High North Logistics)'에 따르면 지난해 북동항로를 통과한 선박은 88척, 통항 횟수는 103회에 달했다. 2024년 97회, 2022년 43회였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2~3년 사이에 두 배 넘게 늘어난 수치다.
다른 하나는 지정학적 불안이다. 홍해에서는 예멘 후티 반군의 선박 공격이 이어지면서 주요 선사들이 수에즈운하 대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길을 택하고 있다. 여기에 호르무즈해협을 둘러싼 중동의 군사적 긴장까지 겹치면서 세계 해운업계는 '한 곳이 막히면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체감하고 있다. 배가 며칠만 늦어도 자동차 부품 공장의 생산라인은 멈춰 설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이 원하는 것은 가장 싼 운임이 아니라 위기가 터졌을 때 곧바로 갈아탈 수 있는 '두 번째 길'이다.
중국은 이미 한 발 앞서 있다
중국 시레전드시핑은 8월 15일부터 10월 3일까지 컨테이너선 7척으로 8차례 운항할 계획이다. 운송기간은 20~22일로 수에즈 경유 항로보다 15일 안팎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실어 가는 화물도 전기차, 리튬배터리, 태양광 관련 제품처럼 중국이 유럽에 대량 수출하는 고부가가치 상품들이다. 운임보다 배송 시점의 예측 가능성이 중요한 화물들이라는 점에서 중국은 북극항로를 단순한 원자재 수송로가 아니라 본격적인 컨테이너 물류망으로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2018년 북극정책을 통해 스스로를 '근북극국가'로 규정하며 북극의 경제·과학·항로 개발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에는 세 가지 셈법이 있다. 말라카해협과 홍해, 수에즈운하 같은 병목 지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물류망 다변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과 멀어진 러시아와 에너지 협력 강화, 그리고 항로가 완전히 열리기 전부터 운항 경험과 항만 노하우, 쇄빙선 기술을 축적해 두는 전략적 선점이다. 중국은 컨테이너선뿐 아니라 쇄빙선과 연구선까지 북극에 보내고, 러시아 북극권의 무르만스크 같은 항만과 연결망도 넓히고 있다. 항로가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항로가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딜레마···러시아와 협의해야 뜰 수 있는 배
그런데 한국의 이번 시범 운항에는 중국이 겪지 않는 문제가 하나 끼어 있다. 북동항로 대부분은 러시아 관할이라 러시아에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서방의 대러시아 제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팬스타 아크로호가 북극항로를 통과하려면 한국이 러시아와 협의하고 항해에 필요한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서방 동맹국들과 마찰을 빚을 가능성이 불거지고 있다. 한 유럽 외교관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언급하며 서방은 러시아를 고립시키려 하고 있고 러시아와 관련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로이터에 말했다. 이런 우려는 이미 외교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 쪽에도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단순한 불편한 시선에 그치지 않는다. 북극 해운 전문가들은 항해 도중 얼음에 갇히는 등 돌발 상황이 생겨 한국이 러시아 측에 도움을 요청하게 될 경우 그 자체가 대러 제재를 건드리는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배 한 척의 항로 선택이 외교·안보 이슈로 확대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이 미국을 비롯한 서방 동맹과 관계를 지키면서도 러시아의 협조 없이는 열리지 않는 항로에 발을 들여야 하는 이 구조는 중국이 러시아와의 밀착을 별다른 제약 없이 활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조건이다. 팬스타 관계자는 로이터에 중국이 이 항로에서 '선점 효과'를 확보하려 하고 있어 한국의 운항이 오히려 더 시급하다고 말했지만 그 시급함과 서방과의 마찰 우려 사이에서 한국 정부가 어떻게 균형을 잡을지는 이번 항해가 던지는 또 하나의 숙제다.
글로벌 대형 선사들은 왜 움직이지 않을까
여기서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매력적인 항로라면 머스크나 CMA CGM, 하파그로이드 같은 세계적인 대형 선사들은 왜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을까. 답은 앞서 살펴본 한국의 딜레마와 정확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첫째는 러시아 리스크다. 북극항로의 상당 구간은 러시아 연안을 따라가며, 운항하려면 러시아 당국의 허가와 쇄빙선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를 받고 있는 나라다. 항로 이용 자체가 제재 위반이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지만 러시아 기관·기업과 얽히는 과정에서 보험과 재보험, 금융 거래에까지 불똥이 튈 위험이 있다. 세계 각지의 금융기관, 화주, 보험사와 얽혀 있는 대형 선사일수록 이 리스크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환경과 안전이다. 북극해는 얼음이 움직이고 기상이 급변하며, 사고가 나면 구조 자체가 어렵다. GPS와 통신이 불안정해질 수 있고 항만이나 수리·구난 시설도 충분하지 않다. 셋째는 경제성이다. 20일 만에 갈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선박 크기가 제한되면 단위 운송비가 오르고, 쇄빙선 지원과 보험료까지 얹으면 비용 부담은 더 커진다. 전직 해군 장교 최혜원씨가 학술지 '오션 폴리시 리서치'에 낸 연구에서도 북극항로의 단위 운송비가 오히려 상승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최씨는 북극항로가 연중 상시 이용 가능한 길이 아니라 얼음이 녹는 여름 3개월 정도만 컨테이너선 항해가 가능한 계절 항로라는 점도 짚었다.
한국의 첫걸음, 무엇을 시험해야 하나
이런 조건 속에서 한국은 이제 막 출발선에 섰다. 정부 지원 입찰을 통해 시범 항해 사업자로 선정된 팬스타는 HMM 측에서 컨테이너선을 사들여 극지 항해에 맞게 개조했고, 한국인과 인도네시아인 20명으로 승무원을 꾸렸다. 이재명 정부는 이번 시범 운항을 발판 삼아 부산을 글로벌 해운 허브로 키우고 2030년까지 북극항로를 정기 상업 노선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번 북극 시범운항을 통해 우리가 가장 먼저 확인할 것은 실제 경제성이다. 거리가 줄었다고 원가가 줄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연료비와 쇄빙선 지원 비용, 보험료와 재보험료, 러시아 측에 지불하는 항행 관련 비용, 항만 대기 시간까지 모두 합쳐야 진짜 원가가 나온다. 두 번째는 정시성이다. 얼음과 기상 여건에 따라 일정이 사흘, 나흘 밀릴 수 있다면 화주 입장에서는 '20일'이라는 숫자보다 실제로 며칠 만에 도착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세 번째는 귀항 화물이다. 유럽으로 갈 때는 화물을 채울 수 있어도 돌아올 때 실을 화물이 부족하면 정기 노선으로서 수익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와 북유럽, 중앙아시아까지 화물망을 넓혀 양방향 물동량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부산을 북극항로 '허브'로
한국이 중국을 단순히 뒤쫓는 방식으로는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 중국은 이미 선박, 항만, 에너지, 자본이 얽힌 하나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이제 배 한 척으로 상업적 이용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최단 거리 뱃길인 북극항로가 활성화하면 자연스럽게 그 길목에 있는 부산항은 새로운 해상 물류의 중심지로 주목을 받게 될 전망이다. 그래서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물류 생태계 구축은 북극항로를 선점해 '글로벌 해양 강국'으로 도약한다는 정부 목표의 출발점이되어야 한다. 현 정부 출범 첫해인 지난해 12월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한 것은 이 같은 국정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첫 포석이었다.
낙관론과 회의론
한국에는 중국이나 유럽 국가들에는 없는 변수도 하나 더 있다. 바로 한반도다. 부산에서 출발한 배가 북극항로로 들어가려면 동해를 지나야 하는데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이 구간의 안전성부터 문제가 될 수 있다. 만약 북한의 위협 때문에 동해 대신 일본 열도 바깥으로 우회해야 한다면 북극항로가 주는 거리 단축 효과 자체가 줄어든다. 그래서 한국의 북극항로 전략은 해양수산 정책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앞서 짚은 서방과의 관계, 러시아와의 협의, 북한 변수까지 겹치면서 외교·안보·산업·에너지 정책이 함께 움직여야 하는 이유다.
북극항로를 둘러싼 논쟁에는 두 극단이 있다. 수에즈운하의 시대가 끝나고 북극항로의 시대가 열린다는 낙관론과 얼음, 제재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는 회의론이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북극항로에 대한 과장된 장밋빛 전망도, 섣부른 비관도 아니다. 이번 시범운항을 냉정한 실험으로 삼아 비용과 위험, 정시성과 화물, 제재와 안보 문제를 하나하나 검증하고 이를 국가 차원의 물류 전략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누가 새로운 바닷길을 지속 가능한 산업과 국가 물류망으로 만들어내느냐가 북극항로 경쟁의 핵심이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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