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에서 '시간'은 곧 경쟁력이다. 기술을 먼저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객이 원하는 시점에 제품을 내놓고 양산까지 연결해야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 인공지능(AI) 시대 들어 기술 변화 주기가 짧아지면서 이 시간의 가치는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 한국 반도체 산업이 또다시 '주 52시간' 논쟁 앞에 섰다. 정부가 추진하는 메가특구법에 반도체 연구개발(R&D) 인력 등에 대한 근로시간 특례를 담을지를 놓고 산업통상부와 고용노동부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김정관 산업부 장관은 "일하겠다는 젊은 사람들의 의지를 제도가 강제로 막아서는 안 된다"며 근로시간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김영훈 고용부 장관은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현행 제도에서도 높은 실적을 내고 있다며 예외 적용 논의가 과열됐다고 지적했다.
근로자의 건강권과 휴식권은 당연히 보호해야 한다. 장시간 노동을 산업 경쟁력으로 포장해서도 안 된다. 다만 지금 필요한 것은 '52시간을 지킬 것이냐, 풀 것이냐'는 이분법적인 논쟁을 반복하는 일이 아니다. 한국 반도체가 어떻게 경쟁국보다 빠르게 기술을 개발하고 시장에 내놓게 할 것인지가 우선돼야 한다.
특히 최근 중국의 추격 속도는 위기의식을 높인다. 중국 최대 D램 업체 창신메모리(CXMT)는 이미 글로벌 D램 시장 4위까지 올라섰고 범용 D램을 넘어 DDR5와 LPDDR5X,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차세대 기술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막대한 정부 지원과 공격적인 설비투자, 대규모 인력을 바탕으로 한국과 기술 격차를 빠르게 줄이는 모습이다.
중국의 이른바 '996'식 장시간 노동을 무작정 따라가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경쟁국이 정부와 기업, 인력이 산업 경쟁력 확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속도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노동시간을 둘러싼 찬반 논쟁을 반복하는 사이 경쟁국의 연구개발과 생산시설 증설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정부가 추진하는 메가특구법도 결국 속도가 핵심이다. 산업부는 약 300개의 규제 특례와 재정·세제 지원을 패키지로 제공하고 인허가와 전력·용수, 투자 애로를 한꺼번에 풀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에 R&D 인력의 근로시간 특례와 탄력·선택근로제 확대 등이 함께 검토되고 있다.
주 52시간을 전면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R&D 직군과 고소득 전문인력에 선택권을 넓히거나 연장근로 관리 단위를 유연하게 운영하면서 충분한 휴식과 보상을 보장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산업 현장의 현실과 노동권을 함께 반영하는 해법을 찾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반도체는 한번 놓친 타이밍을 돈으로 되돌리기 어려운 산업이다. 기술 개발이 몇 달 늦어지면 고객 인증과 양산 일정이 밀리고, 그사이 경쟁사가 시장을 차지한다. 수십조 원의 재정을 지원하고 대규모 클러스터를 지어도 제도에 묶여 필요한 순간 속도를 내지 못한다면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지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호황의 중심에 서 있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다. 중국의 추격은 이미 시작됐다. 논쟁의 출발점을 '52시간을 풀 것이냐, 말 것이냐'가 아니라 '근로자의 권리를 지키면서도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연구하고 개발할 환경을 만들 것인가'로 바꿔야 한다. 반도체 골든타임을 노동시간 논쟁 속에서 흘려보내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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