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자의 아시아의 영성(Spiritual Asia)㊲ | 기독교 이야기 ③] 2000년을 건너 다시 예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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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이야기 첫 편의 마지막에서 물었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두 번째 편에서는 그 질문이 한 종교와 문명의 역사로 확장됐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제 세 번째이자 마지막 편이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작은 예수 운동은 2000년을 건너 세계 최대의 종교적 전통 가운데 하나가 됐고, 가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라는 세 개의 거대한 강줄기 안에서 수많은 교파와 수도회, 신학과 영성운동이 태어났다. 교회는 성당과 수도원을 세웠고 학교와 대학을 만들었으며 병원과 구호기관을 운영했다. 찬란한 음악과 미술, 건축과 철학을 남겼고 인간 존엄과 양심, 자선과 봉사의 언어를 세계 곳곳에 심었다.

그러나 다른 얼굴도 있었다. 교회는 권력과 손잡았고 전쟁과 박해의 역사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선교는 때때로 제국주의와 함께 움직였다. 노예제에 맞서 싸운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노예제를 정당화한 기독교인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의 발을 씻긴 사람이 있었지만 종교의 이름으로 부와 권력을 누린 사람도 있었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인간은 어떻게 이렇게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기독교 삼부작의 마지막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2000년을 살아온 기독교는 오늘도 사랑하고 있는가.

네 개의 복음서, 네 개의 창으로 본 예수

기독교는 한 권의 성경을 가진 종교이지만 그 책 안에는 하나의 목소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중심에는 마태·마가·누가·요한이라는 네 복음서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초기 교회가 예수의 생애와 말씀을 하나의 완벽한 전기로 합쳐놓지 않고 서로 다른 네 개의 복음서를 정경 안에 함께 남겼다는 사실이다. 같은 예수를 바라보지만 강조점과 문체, 구성과 신학적 시선은 서로 다르다.

마가복음에서는 고난받는 메시아의 모습과 긴박한 전개가 두드러지고, 마태복음은 예수를 유대교의 역사와 긴밀하게 연결하면서 산상수훈을 비롯한 그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전한다. 누가복음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여성, 병든 사람과 사회적 주변인을 향한 시선이 특히 두드러지며 선한 사마리아인과 탕자의 비유 같은 이야기가 인간의 마음 깊숙이 들어온다. 요한복음은 또 다른 차원에서 시작한다. 태초의 ‘말씀’, 곧 로고스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를 단순한 현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을 잇는 존재로 고백한다.

네 사람이 네 개의 창을 열었다. 창밖의 인물은 예수였지만 창문의 위치는 달랐다. 이것은 오히려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같은 산도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과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산이 둘인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는 여러 예수 전승 가운데 이 네 복음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고, 이 네 개의 창을 통해 예수의 삶과 죽음, 가르침과 부활 신앙을 후대에 전했다.

그러나 네 복음서 밖에도 예수에 관한 글들은 존재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른 뒤 이집트의 사막에서 놀라운 문서 하나가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사막에서 돌아온 도마복음

1945년 이집트 나그함마디 부근에서 오래된 콥트어 문서들이 발견됐고, 그 가운데 세계적인 관심을 끈 문헌 하나가 도마복음이었다. 도마복음은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과 형식부터 다르다. 예수의 탄생에서 활동과 수난,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는 전기적 이야기가 거의 없고, 대신 예수에게 돌려진 약 114개의 말씀을 모아놓은 어록집에 가깝다.

이 문헌의 첫머리는 이 말씀들을 ‘디두모 유다 도마’가 기록했다고 밝힌다. 기독교 전승의 사도 도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오늘의 역사학은 이것만으로 예수의 제자 도마가 직접 받아 적은 기록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작성 시기와 장소, 실제 저자와 정경복음서와의 관계를 둘러싸고 학계의 논의도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도마복음은 매우 흥미로운 고대 기독교 문헌이다. 그 안의 여러 말씀은 정경복음서의 예수 말씀과 닮아 있고 일부는 다른 형태로 전해진다. 따라서 도마복음을 ‘다섯 번째 정경복음서’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초기 기독교 세계가 오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전승과 사상의 흐름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는 의미는 크다.

여기에서 더 근원적인 질문이 생긴다. 예수는 무엇을 말했는가. 제자들은 무엇을 기억했으며 공동체는 무엇을 전하고 무엇을 선택했는가. 그리고 2000년 뒤의 우리는 그 말씀 가운데 무엇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가.

경전은 책장 속에 보존되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읽는 인간의 삶 속에서 다시 질문이 될 때 살아난다.
 
책에서 삶으로

성경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번역된 책 가운데 하나이며 문학과 음악, 미술과 철학, 정치와 윤리에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읽는 것과 성경의 가르침을 삶으로 옮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문장을 외우는 것과 실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다르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자신을 공격한 사람에게 증오로만 응답하지 않는 것도 다르다. 가난한 사람을 돌보라는 말씀을 읽는 것과 자신의 것을 실제로 나누는 일 사이에는 긴 거리가 있다.

그래서 모든 경전의 마지막 시험장은 인간의 삶이다. 토라의 마지막 시험장도 삶이고 불경과 논어와 도덕경의 마지막 시험장도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현장이다. 성경도 다르지 않다. 경전이 인간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경전을 이용하기 시작할 때 종교는 위험해진다.
 
기독교와 서양문명, 빛과 그림자

2000년의 기독교를 십자군과 종교전쟁만으로 설명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사랑과 봉사의 역사만으로 미화하는 것 역시 온전한 역사 읽기가 아니다.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아야 한다. 수도원은 고대의 문헌을 보존하고 교육의 공간이 됐으며 중세 대학의 성장에도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많은 병원과 구호시설이 기독교적 자선의 정신 속에서 세워졌고, 미켈란젤로의 예술과 바흐의 음악, 고딕성당의 첨탑에서 수많은 철학자와 신학자의 저술에 이르기까지 기독교를 빼고 서양문명을 온전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 문명 안에서 십자군과 종교전쟁, 종교적 억압과 박해도 일어났다. 종교는 인간에게 사랑을 가르쳤지만 인간은 때때로 종교를 이용해 자신의 폭력과 욕망을 정당화했다. 문제는 신앙의 확신 자체라기보다 그 확신이 권력과 결합하면서 스스로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적용되는 순간에 있었다.

자신의 믿음을 진리라고 확신하는 것과 그 믿음을 타인에게 강제로 적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신앙은 확신을 필요로 하지만 문명은 절제를 필요로 한다.
 
과학과 기독교, 갈등을 넘어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 역시 단순한 적대의 역사로만 설명할 수 없다. 갈릴레오의 사례처럼 교회의 권위와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이 충돌한 사건이 있었지만 근대과학을 발전시킨 사람들 가운데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도 적지 않았으며,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일을 창조세계의 질서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문제는 과학과 종교 가운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지배하려 할 때 생긴다. 과학은 ‘어떻게’를 묻는 데 탁월하다. 우주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생명은 어떻게 변화하는가, 뇌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AI는 어떻게 학습하는가를 끊임없이 탐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옳은가, 무엇을 위해 기술을 사용할 것인가,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던진다.

과학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고 해서 종교의 모든 주장이 과학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과학이 자연현상을 설명한다고 해서 인간의 모든 가치와 의미의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지식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본주의와 기독교, 부는 축복인가 책임인가

근대사회가 발전하면서 기독교는 또 다른 거대한 힘과 만났다. 자본이다. 근면과 절제, 직업을 소명으로 바라보는 일부 개신교 전통과 근대 자본주의 정신의 관계는 오랫동안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가 엄청난 생산력과 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과 동시에 인간에게 새로운 윤리적 질문을 던졌다는 점이다.

돈을 버는 것 자체가 죄일 수는 없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 자체가 곧 인간의 성공과 도덕적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가 던지는 더 어려운 질문은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보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느냐에 있다. 부가 사람을 살리는가, 사람이 부를 위해 희생되는가. 시장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이 시장의 부속품이 되는가.

예수가 오늘의 거대한 금융시장과 다국적기업, 플랫폼 경제와 초거대 자본 앞에 선다면 무엇을 먼저 물을까. 아마도 200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가장 작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민주주의와 인권, 인간은 왜 존엄한가

기독교와 근대 민주주의 및 인권의 관계도 한 줄로 설명할 수 없다. 교회가 언제나 민주주의 편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근대 인권이 오직 기독교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그리스·로마의 정치사상과 자연법, 계몽주의와 시민혁명, 세속철학과 사회운동 등 여러 전통이 오늘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함께 만들었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존엄하다는 기독교의 인간관이 서구의 인권사상과 인간 존엄의 언어에 중요한 도덕적 자원을 제공한 것도 역사적으로 살펴볼 가치가 있다. 동시에 기독교 사회 안에서도 노예제가 존재했고 인종차별이 있었으며 여성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가 제한됐다.

여기에서도 역사의 역설을 만난다. 성경을 읽으며 노예제를 정당화한 사람이 있었고 같은 성경을 읽으며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싸운 사람도 있었다.

결국 문제는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무엇을 읽는가만큼 어떻게 읽는가가 중요하다.
 
선교와 식민주의, 복음은 누구와 함께 갔는가

기독교는 선교의 종교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은 유럽으로 갔고 유럽에서 다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로 퍼졌다.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문자교육과 의료, 구호활동을 펼쳤으며 여러 지역의 언어를 연구하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 세계선교가 유럽 제국주의의 팽창과 같은 시대에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복음을 들고 간 사람 곁에 군함과 상인이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 역시 한쪽만 보아서는 안 된다. 생명을 살리고 현지인의 권리를 옹호한 선교사가 있었고 현지 문화와 종교를 열등하게 바라본 선교사도 있었다. 식민주의를 비판한 기독교인이 있었는가 하면 제국의 팽창을 종교적으로 정당화한 사람도 있었다.

복음과 제국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는 때때로 함께 걸었다. 그것이 기독교가 정직하게 기억해야 할 자신의 역사다.
 
한국에서 다시 만난 세 갈래의 기독교

한국의 기독교 역사도 독특하다. 앞선 편에서 보았듯 천주교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에서 들어온 서학서를 읽고 토론하면서 자발적인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데서 시작됐다. 박해와 순교의 시대를 거쳐 한국 가톨릭은 교육과 의료, 사회복지와 인권의 영역으로 활동을 넓혀갔다.

개신교는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들어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성경을 한글로 번역·보급하는 데 힘썼으며, 근대교육과 의료, 독립운동과 시민사회의 형성 과정에서도 여러 기독교인과 교회가 역할을 했다. 정교회 역시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한국 기독교사의 한 흐름으로 자리해왔다.

가톨릭, 정교회, 개신교는 예배 방식과 교회제도, 신학적 강조점에서 서로 다르다. 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갈릴리의 예수에게 닿는다.

그렇다면 한국의 기독교도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교회가 커지면 사랑도 커지는가

한국에는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큰 교회들이 생겼고 신앙의 열정과 해외선교도 활발했다. 교회와 기독교계 기관은 교육과 의료, 복지와 구호, 국내외 봉사의 영역에서 많은 일을 해왔다.

그러나 성장에는 언제나 시험이 따라온다. 교회가 커지면서 건물이 신앙의 크기를 대신하지는 않았는가. 신자의 숫자가 복음의 깊이를 대신하지 않았는가. 헌금과 재산, 지위와 명예가 교회의 성공을 측정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았는가. 목회자가 섬기는 사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지는 않았으며 종교가 정치권력과 지나치게 가까워지지는 않았는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할 이웃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는가.

이 질문은 특정 교단이나 특정 교회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2000년을 살아온 기독교 전체가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예수는 제자의 발을 씻겼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교회는 높아질수록 더 낮아져야 하지 않는가.
 
가톨릭도 정교회도 개신교도 다시 예수에게

가톨릭에는 2000년에 가까운 전통과 보편교회의 유산이 있고, 정교회에는 초기교회의 전례와 영성을 이어온 깊은 전통이 있으며, 개신교에는 성경과 개인의 양심, 끊임없는 개혁을 강조해온 역사가 있다. 각각 소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전통은 목적이 아니다. 교황도 예수를 대신할 수 없고 총대주교도 예수를 대신할 수 없으며 목사도 예수를 대신할 수 없다. 교리도 교단도 건물도 예수를 대신할 수 없다.

기독교의 마지막 기준은 결국 예수다.

그렇다면 2000년을 살아온 기독교의 개혁은 새로운 교회를 하나 더 만드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처음 던졌던 질문으로 돌아가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전쟁의 시대, 원수를 사랑하라는 불가능한 명령

인류는 여전히 전쟁을 한다. 민족과 영토, 종교와 이념, 자원과 패권을 둘러싸고 인간은 인간을 죽이며, 기술이 발전하면서 과거보다 훨씬 먼 거리에서 훨씬 많은 생명을 파괴할 능력까지 갖게 됐다.

그런 세계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필요한 가르침인지 모른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범죄를 처벌하지 말라는 뜻도 아니며 정의를 포기하라는 명령도 아니다. 더 근원적인 뜻은 누군가를 적이라고 부르는 순간에도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까지 지워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정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증오가 정의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평화는 힘이 없어서 싸우지 못하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힘을 가지고도 인간의 존엄을 끝까지 지키려는 절제가 필요하다.

2000년 전에도 어려웠고 오늘도 어렵다.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은 가르침이다.
 
지구라는 하나의 집

기독교가 처음 시작됐을 때 인간에게는 지구 전체의 생태계를 바꿀 정도의 힘이 없었다. 오늘의 인간은 다르다. 산을 깎고 바다를 오염시키며 대기와 기후에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강해졌다. 한 종의 생명체가 지구 전체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렇다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에서 이웃은 어디까지인가. 옆집 사람만 이웃인가. 다음 세대는 이웃이 아닌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이웃이 아닌가. 숲과 바다와 다른 생명은 인간의 욕망을 위해 무한히 소비해도 되는 대상인가.

기독교의 창조 신앙 역시 인간이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해도 된다는 오만으로만 읽혀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 창조세계를 돌보고 다음 세대에 넘겨줄 책임이 있다는 청지기의 윤리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사랑의 범위가 사람에서 자연과 생명으로 넓어져야 한다.

그리고 AI가 왔다

이제 인류는 또 하나의 거대한 문턱에 서 있다. 인공지능이다. 증기기관이 인간의 근육을 확장하고 컴퓨터가 계산능력을 확장했으며 인터넷이 정보와 연결을 확장했다면 AI는 인간의 지적 능력 자체를 확장하려 한다. 기계는 글을 쓰고 그림을 만들며 음악을 작곡하고 질병을 분석하며 법률문서를 검토한다. 인간이 오랫동안 자신만의 영역이라고 여겨온 언어와 추론, 창작의 영역으로까지 들어오고 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은 머리가 좋다는 데 있는가. 인간보다 더 잘 계산하고 더 많이 기억하는 기계가 나타나면 인간의 존엄은 줄어드는가.

그럴 수 없다.

인간의 가치는 지능의 순위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린아이도 존엄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도 존엄하며 기억을 잃어가는 노인도 존엄하다. 인간의 존엄을 능력의 크기로만 설명할 수 없다.

여기에서 기독교의 오래된 인간관이 새로운 질문과 만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AI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AI에게 영혼이 있는가

앞으로 인류가 만나게 될 가장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AI에게 의식이 있는가, 자유의지가 있는가,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영혼이 있는가. 오늘 우리가 이 질문들에 최종적인 답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AI에게 영혼이 있는지를 묻기 전에 AI를 만드는 인간에게 영혼이 살아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더 강한 AI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만들어야 하는가. 더 많은 개인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고 모두 수집해도 되는가. 인간을 완벽하게 감시할 기술이 있다고 사용해도 되는가. 전쟁에서 인간보다 효율적으로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사에 관한 판단을 기계에 넘겨도 되는가.

‘할 수 있다’와 ‘해도 된다’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른다. 그 강의 이름이 윤리다.
 
HAI에서 SAI로

그래서 AI 시대에는 Human-centered AI, 곧 인간 중심 AI만으로 충분한지도 다시 물어야 한다. 인간 중심이라는 원칙은 중요하다. 기술이 인간을 지배해서는 안 되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탐욕과 증오,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전쟁을 일으키며 더 많은 부와 권력을 위해 기술을 사용한다면 단순히 ‘인간 중심’이라는 말만으로 충분한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Spirituality-centered AI, SAI, 곧 영성 중심 AI라는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는 특정 종교를 AI에 주입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나 불교, 유교의 특정 교리를 기계에 입력하자는 것도 아니다. 영성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욕망보다 더 큰 가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를 절제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절제, 가질 수 있어도 나누는 마음, 이길 수 있어도 상대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 자제, 강해질수록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책임이다.

AI가 인간보다 똑똑해지는 시대가 온다면 인간은 AI보다 더 인간다워져야 한다.
 
지능에서 영성으로

인류는 지능을 발전시키는 데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불을 발견하고 문자를 만들었으며 철학과 종교를 세웠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이루고 원자를 쪼갰으며 달에 갔다. 생명의 유전자를 읽고 편집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인간의 지능을 닮은 기계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만큼 지혜로워졌는가.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증오와 탐욕도 사라지지 않았다.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했지만 인간의 마음이 같은 속도로 성숙했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인류의 다음 혁명은 지능의 혁명만이어서는 안 된다. 영성의 혁명이어야 한다.
 
다석 유영모, 다시 ‘하나’와 ‘얼나’로

기독교 삼부작의 마지막에서 다시 다석 유영모를 만난다. 다석은 평생 성경을 읽었지만 서양 신학을 그대로 받아 적는 데 머물지 않았다. 불교와 유교, 도교의 고전을 함께 공부하면서 한국말과 동양의 사유 속에서 예수의 길을 다시 물었다.

그가 찾은 것은 ‘하나’였고 인간 안에서 참된 자기를 ‘얼나’라고 불렀다. 욕망과 집착에 매달리는 ‘제나’를 넘어 더 큰 생명과 진리를 향해 솟나는 인간이었다.

예수의 하나님과 다석의 ‘하나’를 신학적으로 단순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예수의 구원론과 다석의 얼나 사상 역시 그대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길은 하나의 근원적인 인간 질문에서 만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돈을 위해 사는가, 권력을 위해 사는가, 명예를 위해 사는가, 나만을 위해 사는가. 아니면 나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가.

세 편의 질문

이제 기독교 삼부작을 돌아본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갈릴리의 예수를 만났고 그가 남긴 사랑이라는 혁명을 따라갔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예수의 작은 공동체가 교회가 되고, 교회가 제도가 되며, 제도가 문명과 권력을 만나가는 2000년의 길을 따라갔다. 그곳에서 다시 물었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네 복음서와 도마복음에서 출발해 교회와 과학,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인권과 식민주의, 한국 기독교와 전쟁, 생태와 AI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질문 하나가 남는다.

“2000년을 살아온 기독교는 오늘도 사랑하고 있는가.”

다시 갈릴리로

기독교는 세계를 얻었다. 수많은 성당과 교회가 있고 대학과 병원이 있으며 교황청과 총대주교좌가 있고 수많은 개신교 교단과 신학교, 신학자가 있다. 세계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앙공동체가 있다.

그러나 2000년 전 예수가 오늘 다시 갈릴리 바닷가를 걷는다면 무엇을 먼저 물을까. 얼마나 큰 성당을 지었느냐, 몇 명의 신자를 모았느냐,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느냐, 어느 교단이 가장 옳으냐고 물을까.

어쩌면 훨씬 단순한 질문을 할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었는가. 병든 사람의 손을 잡았는가. 외로운 사람 곁에 앉았는가. 낯선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였는가. 원수를 증오하는 데서 멈추지 않을 수 있었는가. 그리고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으로 약한 사람을 지켜주었는가.

2000년을 돌아 결국 첫 번째 질문으로 돌아온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진리·정의·자유, 그리고 사랑

진리는 사랑을 필요로 한다. 사랑 없는 진리는 타인을 찌르는 칼이 될 수 있고, 정의 역시 사랑을 잃으면 심판과 복수로 기울 수 있으며, 사랑 없는 자유는 자신의 욕망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권리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 또한 진리와 정의를 필요로 한다. 거짓을 눈감아주는 것이 사랑은 아니며 불의를 방치하는 것도 사랑이 아니다. 약자를 억압하는 사람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평화일 수 없다.

그래서 진리와 정의와 자유와 사랑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진리는 길을 밝히고 정의는 기준을 세우며 자유는 인간을 일으킨다. 그리고 사랑은 그 모든 것을 다시 사람에게로 돌려놓는다.

결국 사랑이다

아브라함은 떠났고 모세는 자유를 향해 걸었으며 예언자들은 정의를 외쳤다. 유대인들은 책을 들고 질문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예수가 나타나 사랑하라고 말했다.

그 뒤 2000년 동안 인간은 그 한마디를 수없이 읽었다. 성경을 만들고 교회를 세우고 신학을 만들었으며 가톨릭과 정교회와 개신교라는 거대한 강을 이루었다. 성당을 짓고 학교와 병원을 만들었으며 찬란한 문명을 일구었다. 그러면서 싸웠고 갈라졌으며 정복했고, 잘못을 깨닫고 회개했으며 다시 개혁하고 또다시 사랑을 말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은 AI라는 새로운 지능을 손에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지능을 갖게 되더라도 인간에게 남는 마지막 질문은 아주 오래된 질문일지 모른다. 무엇을 아느냐보다 그 지식으로 누구를 살리는가, 얼마나 가졌느냐보다 가진 것을 누구와 나누는가, 얼마나 강하냐보다 그 힘으로 누구를 보호하는가, 어떤 종교를 믿느냐보다 그 믿음으로 어떤 인간이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지식에서 지혜로, 부에서 나눔으로, 힘에서 책임으로, 지능에서 영성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기독교 2000년의 길은 어쩌면 이 한 문장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교회가 세상을 사랑하기 전에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면 예수에게서 멀어지고, 진리를 말하면서 사람을 미워한다면 역시 예수에게서 멀어진다. 십자가를 높이 세우면서 자신의 십자가는 지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 역시 갈릴리의 처음과 멀어진다.

그러나 가장 작은 사람 곁에 앉고 고통받는 생명을 살리며,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절제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존엄까지 지켜줄 수 있다면 2000년 전 갈릴리에서 시작된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물었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두 번째 이야기에서 물었다.

사랑으로 시작한 종교가 권력을 갖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이제 기독교 삼부작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묻는다.

2000년을 살아온 기독교는 오늘도 사랑하고 있는가.

그 대답은 교리문답 속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성당의 높이에도, 교회의 크기에도, 신자의 숫자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결국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으며, 인간이 자신보다 약한 생명과 자연, 아직 태어나지 않은 다음 세대, 그리고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2000년을 돌아 기독교는 다시 갈릴리로 간다. 그곳에는 왕관도 군대도 재산도 없는 한 사람이 서 있다. 세계를 정복하라고 명령하는 대신 인간을 사랑하라고 말했던 사람이다.

그가 다시 묻는다.

“너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가.”

기독교 2000년의 시작도 그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마지막도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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