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북중미 월드컵이 막을 내리고 마침내 스페인이 감격스러운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 혹은 승자들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한다. 경기장에서 이긴 승자 말고 매력적이고 인상적인 모습을 통해 전 세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승자말이다. 경기가 끝난 후에도 팬들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오래 기억되는 나라, 즉 월드컵을 통해 자국의 존재를 과시하고 문화를 자랑하며 소프트파워를 보여준 나라들이다. 사실 월드컵과 같은 글로벌 스포츠 축제는 강요나 보상 대신 매력과 설득을 통해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 즉 한 국가의 '소프트파워'를 키울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무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일까? 필자가 꼽는 최고의 소프트파워 승자는 우승한 스페인도, 전설적인 선수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도 아니다. 아프리카 서쪽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다. 지도에서 찾기조차 어렵고 이름도 생소한 인구 50만명의 소국. 그러나 이 작은 나라는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해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우승국 스페인을 맞아 0대0 무승부를 기록했고 32강에선 준우승국 아르헨티나를 만나 한 골 차 아쉬운 패배를 했다.
실적도 실적이지만 무엇보다 이 섬나라 팀은 축구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신사적인 경기 매너로 축구팬들을 매료시켰다. 카보베르데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자국의 존재조차 몰랐던 수억 명의 머릿속에 강인하고 매력적인 국가라는 브랜드를 각인시켰다.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운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오직 열정과 실력만으로 전 세계의 자발적인 경외감을 이끌어낸 카보베르데야말로 이번 2026 월드컵이 배출한 가장 빛나는 승자다.
관광 전문지 트래블 투마로에 따르면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카보베르데에 대해 검색 수가 미국에서만 5000% 증가했다. 한국 검색창에서도 이 섬나라에 대한 검색이 폭증했다. 필자도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국가에 카보베르데를 포함시켰다.
또 다른 승자를 꼽는다면 노르웨이를 들 수 있다. 작지만 강한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는 이번 대회를 통해 한 국가의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력도 우수했지만 그보다는 팬들의 인상적이고 열정적인 응원을 통해 바이킹의 자랑스러운 후예라는 점을 전 세계에 알렸다.
자국 팀이 출전하는 북중미 개최 도시들을 가득 메운 노르웨이 원정 팬들은 거대한 바이킹 배의 노를 젓는 시늉, 이른바 '바이킹 로잉(Viking Rowing)' 응원으로 경기장 분위기를 압도했다. 일사불란하면서도 유쾌한 이 시각적 퍼포먼스는 상대 팀에 대한 위협이 아닌 경기장 전체를 하나로 묶는 거대한 축제의 장을 만들어냈다. 현지 미국 팬들과 일반 관중들까지 경기장에서, 거리에서, 그리고 소셜미디어에서 자발적으로 노 젓기 대열에 합류하게 만든 이 독창적인 응원은 이번 대회 최고의 문화적 행위 중 하나였다.
경기 결과나 성적이라는 지표보다 한 국가가 지닌 문화적 품격과 가치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한, 교과서적인 소프트파워의 승리였다.
그렇다면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의 성적은 어떠했을까? 비록 경기에서는 참담한 결과를 보여 32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나름대로는 소프트파워를 과시할 수 있었다. 즉 한류와 K-팝을 통해 문화 강국이라는 모습을 각인시킨 것이다. 개막식에서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이재가, 그리고 폐막식 하프타임 쇼 무대에서는 BTS가 멋진 공연을 통해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확인시켰다.
반면 이번 대회를 통해 소프트파워가 추락한 패자는 미국이 아닐까 생각된다.
북중미 월드컵 주요 호스트 국가인 미국은 세계 최대 선진국답게 역대 최대인 48개국 대회를 차질 없이 치러내며 막대한 상업적 이익과 하드파워의 위용을 과시했다. 경기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비싼 관람권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축구팬들은 각 스타디움을 가득 메웠고 경기를 치르는 도시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스포츠외교의 핵심이자 월드컵이 지향하는 ‘국경을 초월한 연대와 환대’라는 측면에서는 미국의 소프트파워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대회 기간 내내 이어진 개최국의 지나친 정치적 개입과 경직된 국경 정책은 전 세계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이라크의 핵심 공격수가 공항에 내리자마자 장시간 억류되어 조사를 받고, 국제 심판이 비자 거부로 입국조차 하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더욱이 지정학적 갈등 관계에 있는 이란 대표팀에 대해 비자 발급을 제한하고 티켓 배정을 취소하는 등 축구 경기장을 정치적 압박의 수단으로 활용한 미국의 행태는 '축구는 세상을 하나로 묶는다'는 FIFA의 오랜 슬로건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결국 미국은 완벽한 무대를 세우고 티켓을 파는 데는 성공했을지언정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도덕적 권위와 문화적 감동을 주는 데는 실패했다고 본다. 자국의 안보 논리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스포츠 정신보다 앞세운 미국은 진정한 ‘문화적 중심’이 아닌 그저 냉정한 ‘공간 대여자’에 머물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그나마 정치권의 실망스러운 성적과는 달리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미국인들은 해외에서 온 축구팬들을 도시마다 환대하고 이 대회를 통하여 잠시나마 국내 정치적 혼란을 잊을 수 있었다는 언론 보도를 보고 축구의 매력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이번 대회의 또 다른 패배자를 든다면 FIFA가 아닌가 한다. 무엇보다 상업적 이익을 위해 축구의 전통을 훼손시킨 점이 지적된다. 선수들에게 휴식시간을 준다는 명분으로 만든 hydration break. 중간 휴식 시간이 TV 광고를 넣기 위한 돈벌이 수단이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레드카드로 벨기에와의 경기를 뛰지 못하게 된 자국 선수를 구제하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이 압력을 행사했는데 FIFA가 여기에 동조한 점 역시 실망스럽다. 금과옥조 같은 경기 규칙과 규정을 상업적 이익과 강대국의 압력 때문에 맘대로 뜯어 고친다는 인상은 월드컵 축구와 FIFA를 신뢰하는 세계인 마음에 치명적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된다.
▷전 CNN 서울지국장 ▷전 외교부 문화협력대사 ▷국제방송교류재단(아리랑국제방송) 사장 ▷전 대통령실 해외홍보 비서관 ▷전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전 뉴욕타임스 기자 ▷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