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인공지능(AI) 모델을 첨단 반도체나 군사기술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앤스로픽은 12일(현지시간)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최신 AI 모델인 ‘페이블5’와 ‘미토스5’에 대한 외국인 접근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혔다. 명령은 미국 안팎의 모든 외국인에게 적용되며 외국 국적의 앤스로픽 직원도 포함된다.
이번 조치가 특정 모델의 안전성 논란에 따른 일시적 대응으로 끝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 정부가 AI 모델 자체를 국가안보와 직결된 전략 자산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기업 규제 사건이 아니다. AI 경쟁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신호다.
그동안 AI 경쟁은 반도체 경쟁이었다. 누가 더 많은 GPU를 확보하고 더 큰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느냐가 핵심이었다. 이제는 다르다. 반도체 위에서 작동하는 AI 모델 자체가 국가 경쟁력의 핵심 자산으로 떠오르고 있다. 냉전 시대의 전략 자산이 핵무기였다면 정보화 시대는 반도체였고, AI 시대에는 AI 모델과 데이터, AI 에이전트가 새로운 전략 자산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 조치를 둘러싼 논란도 적지 않다. 앤스로픽은 정부가 문제 삼은 탈옥(jailbreak) 기법이 특정 상황에서만 가능한 제한적 취약점일 뿐이며, 동일한 수준의 취약성은 다른 선도 AI 모델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반박한다. 업계에서도 특정 기업과 특정 모델만 겨냥한 조치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이번 조치는 몇 가지 모순을 드러낸다. 미국 정부는 AI 안전을 이유로 규제에 나섰지만, 동일한 기준이 다른 AI 기업들에도 적용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특정 취약점 하나를 이유로 상용 모델 전체를 차단하는 것이 과도한 조치라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만약 이런 선례가 굳어진다면 향후 AI 기업들은 신모델 출시 자체를 두려워하게 될 수 있다.
또 다른 논란은 동맹국 문제다. 미국은 AI 동맹을 강조하면서도 이번 조치에서는 영국과 한국 등 우방국 기업과 연구기관까지 사실상 접근 제한 대상에 포함시켰다. 일부 전문가들이 "중국 견제보다 동맹국 통제가 더 강해 보인다"고 비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논란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미국 정부가 옳으냐, 앤스로픽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본질은 AI가 국가안보의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더욱 복잡한 문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AI 시대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사실상 주도하고 있다. 미국 AI 데이터센터와 초거대 AI 인프라가 작동하는 데 한국 기업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그러나 정작 그 위에서 작동하는 최고 수준의 AI 모델은 대부분 미국 기업이 보유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한국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AI 시대 핵심 부품 공급국이지만 AI 두뇌는 남의 것을 쓰고 있다. 만약 특정 국가가 정치적 이유든 안보적 이유든 AI 모델 접근을 제한한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이번 사건은 그 질문을 현실의 문제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한국도 GPT를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은 성급하다. 실제로 AI 업계에서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 오픈AI와 구글, 앤스로픽, xAI는 매년 수십조 원을 투자한다. 한국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쟁해 세계 최고 수준의 범용 AI를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한국이 반드시 미국과 경쟁해 세계 1위 AI 모델을 만들 필요는 없다. 스마트폰 운영체제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국이 IT 강국이 아닌 것은 아니다. 모든 핵심 기술을 독자 개발해야만 경쟁력을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세계 최고 AI를 만드는 것과 AI 주권을 확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AI 주권은 GPT를 이기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할 때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AI 역량을 확보하는 데서 나온다. 국방, 금융, 제조업, 공공행정, 의료와 같은 국가 핵심 분야까지 모두 외국 AI에 의존하는 것은 또 다른 위험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이 집중해야 할 것은 범용 AI 경쟁이 아니라 산업형 AI다. 제조 AI, 반도체 AI, 금융 AI, 국방 AI, 의료 AI, 공공 AI와 같은 분야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경쟁력과 산업 데이터를 갖고 있다. 특정 산업 분야에서는 미국 못지않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데이터와 AI 에이전트다. 앞으로의 경쟁은 누가 더 큰 LLM을 보유했느냐보다 누가 더 좋은 데이터를 확보하고, 누가 더 강력한 AI 에이전트를 구축하느냐에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LLM은 점차 전기나 인터넷처럼 범용 인프라가 될 수 있지만, 그 위에서 어떤 서비스를 만들고 어떤 산업을 혁신하느냐는 각 나라의 몫이다.
정부도 AI 정책의 관점을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AI를 디지털 산업 육성 정책의 일부로 봤다면 이제는 국가 전략산업으로 접근해야 한다. 반도체와 방산, 우주산업을 육성하듯 AI도 장기 국가 프로젝트로 추진해야 한다. AI 인재 양성, 데이터 확보, 컴퓨팅 인프라 구축, 산업 특화 모델 개발을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기업 역시 AI를 단순한 생산성 향상 도구 정도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AI는 앞으로 모든 산업의 운영체제를 바꾸는 기술이다. AI를 활용하는 기업과 AI를 설계하는 기업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커질 수밖에 없다.
기본은 기술이다. 원칙은 자립이다. 상식은 국가의 미래를 전적으로 남의 기술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번 앤스로픽 사태는 일시적 사건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받아야 할 교훈은 분명하다. AI 패권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반도체만으로는 부족하다. 세계 1등 AI에 대한 환상도 경계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국가가 필요할 때 스스로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AI 역량, 다시 말해 AI 주권이다.
대한민국이 AI 시대의 단순한 부품 공급국에 머물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술 강국이 될 것인지는 지금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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