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모든 나라에게 같은 기회를 주지 않는다. 어떤 나라는 수백 년 동안 변방에 머물고, 어떤 나라는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반대로 시대의 변곡점마다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잡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올라서는 나라들도 있다. 대한민국은 후자에 속했다.
1945년 해방 후 1950년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은 1960~1970년대 산업화를 통해 가난을 극복했고, 1980~1990년대 민주화와 세계화를 통해 선진국 문턱에 올라섰다. 2000년대 이후에는 반도체와 정보통신기술(ICT)을 앞세워 세계가 주목하는 기술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은 또 한 번의 역사적 갈림길 앞에 서 있다.
6·3 지방선거가 끝났다. 이재명 정부는 집권 2기를 준비하고 있다. 국무총리 교체가 추진되고 있고 여야 모두 지도체제 재편 논의에 들어갔다. 정치는 새로운 판을 짜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 안에서 벌어지는 변화보다 더 큰 변화가 있다. 세계의 판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은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에 국가의 명운을 걸고 있다.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한 AI 혁명은 산업 구조를 뒤흔들고 있고,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망은 새로운 국가 경쟁력의 기준이 되고 있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경제와 복지 시스템을 흔들고 있으며, 세계 질서는 공급망 재편과 기술 블록화라는 거대한 변화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지금 산업화 이후 가장 큰 구조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다.
세계는 지금 산업혁명 이후 가장 거대한 문명 전환기를 통과하고 있다. AI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새로운 산업 질서이며 새로운 문명의 운영체제다.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을 만들었고 전기가 대량생산 시대를 열었으며 인터넷이 정보혁명을 이끌었다면, AI는 인간의 지적 노동과 사회 운영 체계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
국가 경쟁력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영토와 인구, 자원이 중요했다. 이후에는 제조업과 금융, 정보기술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했다. 이제는 AI와 데이터, 반도체와 에너지, 그리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인재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 이 변화는 대한민국에 위기인 동시에 기회다.
AI 혁명의 본질은 반도체 혁명이다. 오늘날 세계 AI 산업은 엔비디아의 GPU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 위에서 움직인다. 특히 AI 서버의 핵심 부품인 HBM(고대역폭메모리)은 AI 성능을 결정하는 전략 자산으로 떠올랐다. AI가 두뇌라면 메모리는 기억이다. 기억 없는 두뇌가 존재할 수 없듯 메모리 없는 AI도 존재할 수 없다.
대한민국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중심에 있다. 미국은 AI 플랫폼을 주도하지만 첨단 메모리에서는 한국에 의존한다. 중국은 AI 자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첨단 메모리 분야에서는 아직 한계를 안고 있다. 유럽은 AI 규제와 윤리 논의에서는 앞서 있지만 생산 역량은 부족하다. AI 시대 핵심 공급망의 중심에 대한민국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최근 코스피 상승 역시 우연이 아니다. 세계 자본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단순한 반도체 기업이 아니라 AI 시대의 핵심 인프라 기업으로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 한때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말이 익숙했지만 이제 세계 시장은 대한민국이 가진 전략적 가치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반도체만으로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전력망과 에너지 산업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로봇과 자율주행, 바이오와 국방, 스마트시티와 제조업 혁신도 결국 AI 생태계 위에서 움직인다.
대한민국은 반도체 강국에서 AI 강국으로, AI 강국에서 피지컬 AI 강국으로 도약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제조업 경쟁력에 AI를 결합해 제조업 AX(AI 전환)를 선도해야 한다. 이것이 앞으로 10년 대한민국 산업 전략의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산업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의 본질은 권력이 아니다. 권력은 국민을 위한 수단이다. 지방선거 이후 여야 모두 변화 요구에 직면해 있다. 승리한 쪽도, 패배한 쪽도 국민의 경고를 들었다. 국민은 정쟁보다 문제 해결을 원하고, 진영 논리보다 국가 운영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가 해야 할 일은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AI 시대 국가 경쟁력은 기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부와 국회,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정치의 판도 새로 짜야 한다.
교육은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대한민국은 교육의 힘으로 성장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은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성공 공식은 영원하지 않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정답을 빠르게 찾는 인재를 길러냈다. 하지만 AI는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정답을 찾는다. 생성형 AI는 논문을 요약하고 코드를 작성하며 복잡한 문서까지 분석한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정답 찾기가 아니다. 문제를 정의하는 능력, 새로운 해답을 설계하는 능력,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통찰력과 창의력이다. 정답 교육에서 해답 교육으로, 암기 교육에서 창의 교육으로, 경쟁 중심 교육에서 문제 해결 중심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AI 시대 교육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교육의 판도 새로 짜야 한다.
인구 문제는 더욱 절박하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늙어가는 나라가 되고 있다. 합계출산율은 반등했지만 여전히 세계 최저 수준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저출산과 고령화를 경험했다. 수십 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지만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일본의 경험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출산율은 삶의 조건에 반응한다. 청년들이 결혼과 출산을 미루는 이유는 단순히 돈 때문이 아니다. 일자리와 주거, 교육비와 노동환경 때문이다. 청년이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나라에서 출산율 반등은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출산 장려 정책이 아니라 청년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구조다. 지방소멸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늘어나는 인구를 전제로 설계된 행정과 교육, 복지 시스템을 줄어드는 인구에 맞게 다시 설계해야 한다. 인구의 판도 새로 짜야 한다.
에너지 역시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변수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전력을 소비한다. AI 강국이 되려면 동시에 에너지 강국이 되어야 한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송배전망과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포함한 국가 에너지 전략을 장기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에너지 없는 AI는 존재할 수 없다.
결국 대한민국 앞에 놓인 과제는 하나다. 산업의 판을 바꾸고, 정치의 판을 바꾸고, 교육의 판을 바꾸고, 인구의 판을 바꾸고, 에너지의 판을 바꾸는 일이다. 이는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니다. 국가 시스템의 전면적 재설계다. 이재명 정부 2기와 새 총리 체제의 진정한 과제도 여기에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흔들리고, 부처가 바뀔 때마다 국가 비전이 달라지는 나라로는 AI 시대를 선도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5년짜리 국정과제가 아니다. 20년, 30년, 50년을 내다보는 국가 대전략이다.
산업화는 대한민국을 가난에서 구했고, 민주화는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다. 이제 AI 시대 국가개조는 대한민국의 다음 100년을 결정할 과제가 되고 있다. 역사는 모든 나라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지금 또 한 번의 기회를 맞고 있다. 앞으로 5년은 어느 정권의 성패를 결정하는 시간이 아니다. 앞으로 50년 대한민국의 국운을 결정하는 시간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쟁이 아니라 설계다. 대한민국의 판을 새로 짜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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