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호의 모시모시] 한일 경제공동체의 본질은 AI 산업동맹이다

일본 재계에는 오랫동안 하나의 믿음이 있었다.

"반도체는 일본이 다시 찾을 것이다."
 
1980년대 세계를 지배했던 일본 반도체의 영광은 일본 산업계의 집단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일본은 소재와 장비를 갖고 있고, 제조 기술도 있다. 언젠가는 다시 정상에 설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런데 2026년의 일본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난 10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실린 최태원 SK그룹 회장 인터뷰는 단순한 투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SK는 일본에 AI 데이터센터, 이른바 'AI 팩토리'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일본 내 반도체 공장 건설 가능성도 언급했다. 더욱 눈길을 끈 것은 일본을 향한 "필요한 에코시스템이 모두 갖춰져 있다"는 최 회장의 평가다. 예전 같으면 일본 기업이 한국을 향해 했을 법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 기업이 일본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세계 산업 지형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사실 일본은 지금 AI 시대를 맞아 새로운 고민에 직면해 있다. AI 경쟁의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엔비디아, 오픈AI, 구글이 시장을 이끌고 있다. 제조 경쟁력은 중국이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그 사이에 낀 일본은 반도체 장비와 소재, 정밀 제조 기술은 강하지만 AI 생태계에서는 존재감이 크지 않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에 수십조 원을 투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도체를 잃으면 제조업의 미래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일본이 부족한 것은 공장만이 아니다. AI 시대의 데이터와 연산 인프라다. 최 회장이 "일본에 더 필요한 것은 반도체 공장보다 AI 팩토리"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주목할 대목은 일본 경제계가 이런 주장에 점점 공감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도쿄에서 열린 닛케이포럼에서 일본과 한국 재계 인사들은 한목소리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AI, 반도체, 에너지, 공급망, 조선, 로봇, 원전, 의료까지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장면이다.
 
2019년 일본의 수출규제 당시 양국은 반도체 소재를 놓고 정면 충돌했다. 당시 일본은 기술을 가진 나라였고 한국은 고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은 세계 최대 HBM 생산국이 됐고 엔비디아 공급망의 핵심 축이 됐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재와 장비 기술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 서로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최종현학술원 이사장이 9일현지 시간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닛케이포럼 한일특별세션에 참석해 한일경제연대 청사진을 소개하고 있는 모습 사진SK그룹
최태원 SK그룹 회장 겸 최종현학술원 이사장이 9일(현지 시간)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열린 닛케이포럼 '한일특별세션'에 참석해 한일경제연대 청사진을 소개하고 있는 모습 [사진=SK그룹]

최 회장이 수년 전부터 주장해온 '한일 경제공동체' 구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경제협력이나 자유무역 확대 구상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경제공동체의 본질은 통상적인 자유무역 확대가 아니다. AI 시대의 산업동맹이다.
 
미국은 기술 패권을 추구하고 있고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을 무기로 움직인다. 유럽은 규제를 만든다. 일본과 한국은 각각 강점을 갖고 있지만 단독으로는 시장 규모와 영향력에 한계가 있다. AI 데이터센터, 반도체, 에너지, 공급망, 조선, 로봇, 헬스케어 등 미래 산업에서 양국이 하나의 산업 생태계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다. 역사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정치권은 언제든 갈등을 확대할 수 있다. 양국 산업계에도 경쟁심리는 남아 있다. 그러나 AI 시대는 과거처럼 한 나라가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일본은 한국의 AI 반도체 경쟁력이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소재·장비 생태계가 필요하다. 양국은 경쟁 관계이면서 동시에 협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들어서고 있다.

최태원 회장이 말하는 한일 경제공동체의 본질은 자유무역 확대가 아니다. AI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산업동맹이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에너지와 공급망, 조선과 로봇, AI 제조혁신까지 미래 산업 전반에서 협력하자는 구상이다.

한일 경제공동체는 이상론이 아니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시대에 일본과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생존 전략이다.

지금 일본에서 시작되는 변화는 협력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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